원심원사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647년(신라 진덕여왕1)영원(靈源)이 창건하였다. 영원은 보개산에 영원사(靈源寺)· 법화사(法華寺)와 함께 이 절을 세웠는데, 당시에는 흥림사(興林寺)라고 하였다. 고려 때 나머지 절은 폐사되었으나 이 절만은 명맥을 유지했다.
720년(성덕왕 19) 사냥꾼 이순석(李順碩) 형제가 지장보살의 감화를 입어 석대암(石臺庵)을 세웠으며, 이후 우리 나라 제일의 지장신앙 성지로 이름났다.
859년(헌안왕 3) 범일(梵日)이 천불을 조성했고, 1393년(조선 태조 2) 불에 탄 것을 1395년에 자초(自超)가 중창하면서 산 이름을 영주산(靈珠山)에서 현재의 보개산으로 바꾸고 절 이름도 심원사로 고쳤다고 한다. 1398년 성주암, 1400년(정종2) 석대암을 각각 중창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595년 인숭(印崇)과 정인(正印) 등이 중건했다. 이후 많은 고승을 배출하고 천불전과 해장전 등 건물 만도 250칸이 넘는 대사찰로 발전했으나 1907년에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고 말았다. 1909년 연수 등이 중창하였으며, 1931년 사찰 건물의 내부를 완전히 중수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다시 절이 불에 탔고, 전쟁 후에는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자 1955년 김상기(金相基)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창하였다. 본래 절터의 위치는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이다. 1962년 명주전을 짓고, 1970년에 대웅전과 요사채 2동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명주전과 대웅전·삼성각·노전·화산경원 등이 있다. 이 중 화산경원은 1935년 한규설(韓圭卨)의 부인 박선심화(朴善心華)가 지장보살의 발광을 보고 시주하여 지은 불교연구원이다. 유물로는 1991년 4월 12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재138호로 지정된 연천군 심원사지 부도군이 있으며, 옛 절터에 사적비와 공적비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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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심원사지 부도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342-1번지 심원사지 부도군은 본래 20여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12기의 부도탑과 3기의 비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팔각원당형과 고려시대말과 조선시대에 걸쳐 유행하였던 석종형을 취하고 있다. 비석은 취운당 대사비,경월당 경헌대사비,박씨대사비이며 부도는 영월당부도,풍담당부도,청하당부도,호연당부도, 청심당부도,그리고 불명부도 등이 있다. 17세기 전반에 활동하던 승려 경월당.경헌.취운당.학린.호연당.태호.청심당.도일청허.휴정(1520~1601년)등의 법맥을 이은 선사들의 비와 부도부도로 제월당경헌당(1542~1642년)의 비는 기단 위에 구름과 용의 문양이 조각된 지봉돌을 갖춘 비신이 세워져 있고.제월당에 대한 내용을 적은 비몸의 “제월당대사비명”은 전서체로 비명내용은 해서체로 적혀 있다. 취운당 학린(1575~1651년)의 비는 효종3년에 세워졌는데 . 위로 올라 갈수록 폭이 넓어지며 상단은 둥근 호패형으로 마감하였다. 석대암(한 때 “석대사” 라 불렀다)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 지장산 관음봉아래 있다. 720년(신라성덕왕19년)사냥꾼 이순석이 출가하여 창건 하였다.고려 때 중령이 중창했고 1400년(조선정중2년)3창했다.1861년(철종12년)내탕금을 하사받아 중건했으며 1887년(고종24년)김상궁의 시주를 받아 다시 중건 하였다. 1931년 중건 하였고 1935년 주지 서상인이 중수하였다.절이 있는 보개산은 금강산.오대산과 함께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은 영상이라 하며 절은 지장보살의 상주처(常住處)로서 높이 신봉되는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다. 창건설화가 전해지는데 어느 날 순석과 순득 두 사냥꾼은 금빛 멧돼지를 활로 쏘았는데 멧돼지는 피를 흘리면서 觀音峰 쪽으로 달아났다.그 뒤를 쫒아 샘물있는 곳으로 가니 멧돼지는 보이지 않고 왼쪽 어깨에 화살이 꽂힌 지장보살 석상만 샘 속에 있었다.이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두 사람은 참외하고 출가하여 도를 이루었다.
그 뒤 그들은 300여명의 제자와 함께 이 절을 창건했고 두 사람이 항상 숲속에서 돌을 모아 대를 쌓고 그 위에서 정진했으므로 “석대사”라 이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