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14년 11월 15일 , 날씨: 맑음
산행지;용문산
산행자:홀로
산행코스:양평역~휴양림~두리봉~백운봉~함왕봉~장군봉~용문산~마당바위~용문사~용문산관광지
산행거리16.4km,산행시간09시간
소모칼로리:3963.6kcal
백운봉(941m)
양평읍에서 북동쪽으로 약 10 km 떨어진 용문산 남쪽끝의 바위 봉우리 백운봉은 높이가 936m로 주변의 용문산, 도일봉, 중원산 등과 함께 경기도 안에서는 비교적 높은 산이다.능선의 골이 깊고 다향하여 매혹적이고 사적지가 많다. 잘 알려지지 않아 오염이 덜 되어 있고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겨울철 하산길에 즐길 수 있는 자연 눈썰매코스가 매력적이다. 정상에서 남북으로 이은 주능선과 지능선마다 소나무와 암봉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능선에는 철쭉, 단풍나무, 고목들이 우거져 있고 비좁고 험한 급경사길이 있다.
정상은 높은 암봉으로 어루어져 있으며 앞이 탁 트이고 멀리 운악산, 용문산이보이며 남쪽으로 남한강 줄기가 보인다.백운봉은 능선상으로 함왕봉과 1시간 거리로 떨어져 있어 백운봉과 함왕봉을 동시에 오를 수 있다.
용문산(龍門山)
경기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용문산(龍門山, 1157미터)은 경기도에서 가평군에 있는 화악산, 명지산 그리고 국망봉 다음으로 높다. 북쪽의 봉미산, 동쪽의 중원산, 서쪽의 대부산을 바라보고 있는 용문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빼어나며, 골이 깊어서 예로부터 경기의 금강산으로 이름이 높았다. 용문산이 언제부터 용문산이라고 불렸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며, 용문산의 옛 이름은 미지산(彌智山)이다. 「대동여지도」나 「동국여지도」에는 용문산으로 나오지만, 그보다 앞선 신경준의 『산경표』에는 일명 ‘미지’라고 부른다 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용문사는 미지산에 있는데, 그 산 이름은 용문이라는 절 이름으로 부른다”라고 밝혔다.
『용문사 중수기』나 이색이 지은 『대장전기』 또는 「정지국사비문」이나 「원증국사비문」에도 미지산 용문사, 미지산 사나사로 표기되어 있다. 그 미지산을 승려들은 “용문산의 고승대덕들의 덕풍지광(德風智光)이 충만해 있었다”라는 말로 풀이한다. 그러나 우리말 어원으로 풀어보면 미지란 바로 미르, 곧 용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양평군은 “용문에 의지하고” 있는 곳이며, 용문이란 곧 용문산을 의미한다. 양평의 진산인 용문산을 두고 조선시대의 시인 이적은 “왼쪽으로는 용문산에 의지하고, 오른쪽으로는 호수를 베개 베었다”라는 시를 남겼다.
산세가 지리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북한강과 남한강이 산을 에워싼 채 흐르고 사방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에 계곡들이 깊고 도처에 기암괴석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이 절경을 이룬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기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용문산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10.5, 다음생각)
용문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절 용문사가 있다. 신라 진덕여왕 3년(649)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진성여왕 6년(892)에 도선국사가 중창했다고 하나, 신라 선덕왕 2년(913)에 대경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양평군지』에 따르면 창건 당시 당우(堂宇, 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통틀어 일컫는 말)가 304칸에 300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하지만, 절의 앉은 모양새나 그 터의 형세로 보아서 300여 칸의 당우는 너무 부풀려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뒤 몇백 년간의 기록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고려가 쇠퇴기에 접어든 우왕 때 지천대사가 개풍군 경천사의 대장경을 이곳으로 옮겨 대장전을 짓고 봉안했다는 기록이 전하며, 1395년에는 조안대사가 용문사를 중창하면서 그의 스승 정지국사의 부도와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용문사는 1907년 의병 봉기 때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는다. 그 후 취운스님이 중창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그 유명한 용문산전투 와중에 큰 피해를 입고 만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1958년 이후 지어진 것들이며, 정지국사의 부도와 비를 비롯한 몇 개의 부도와 석축들만이 옛 모습 그대로일 따름이다.
하지만 이 절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56대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자 아들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는 나라 안에서 제일 크고 가장 나이가 많은 은행나무가 남아 그 옛날의 발자취를 전해주고 있고, 절 위쪽 용문산 중턱에는 세조에 얽힌 이야기가 남아 전하는 상원사와 사나사라는 절이 있다. 용문산에서 이름난 것이 뱀과 산나물인데 용문산의 산나물을 시로 읊은 사람이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안국이다.
산나물 향기롭고 연하긴 용문이 그만인데
그것으로 손님 대접하면 후의(厚意) 있음을 알리라
방장(方丈)의 고량진미를 어찌 부러워하리오
한 바구니 속에 부귀영화도 저버리라 하였다
산나물 들어온 것이 있어 시를 지어 보내며 사례하였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 상태로 15km가 넘는 산행은 무리인 것 같다.
너구나 산행초입부터 끝 날때까지 이어지는 지독한 너덜길은 무릎에 무리를 주어 더욱 힘들게 하였고~
예정시간은 7시간이었으나, 아홉시간이 넘는 산행으로 이어 져 오랫만에 영등포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었던
유종선형님과의 약속도 이행하지 못하게 되어 서운한 마음이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 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느낌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