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미륵사지와 대원터에 대한 고찰
불교문화가 전해 진 이동로였으며 삼국의 격전지로 영남으로 연결되는 최초의 도로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계립령 아래 자리잡고 있는 "중원미륵사지와 미륵대원터"에 대하여 고찰 해 보고자 한다.
계립령이 열리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였을 시기의 절터와 원터의 흔적으로 보아 미륵사지는 우리나라에 있는 석굴사원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 져 있으며 건출물들은 모두 북쪽을 향 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하늘재 아래 역원의 기능으로서 길손의 숙소와 말(馬)의 마방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는 "미륵대원터"는 回자 형태의 구조물로 가운데 있는 입口자 모양은 원(마방)의 역할로 도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중앙에 두고 바깥족의 입口자 모양은 원(숙소 및 주막)를 두어 길손들의 쉼터 구실을 하는 건축물이엇던 것으로 보인다.
※ 말(馬)이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을 조선시대와 삼국시대에는 재(嶺) 아래 "역"의 기능을 하는 "원"을 두어 국가의 비상을 알리는 파발마와 길손들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라 아달왕3년(서기156년)에 개통되어 처음에는 계립령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부터 하늘재로 불리는 곳으로서 삼국시대에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신라 경순왕의 자녀인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패국의 한을 품고 고개를 넘었다는 전설과 함께 주변 곳곳에 오랜 역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을뿐만 아니라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충북의 자연보존 명소 100선 중 10걸로 지정된 곳입니다. 2000.9.28 충청북도지사 충주시장 ................................................................................................................................................................................. 덧 붙이는 글
하늘재(계립령)는 조선시대에 조령(새령)이 개통되기 전까지 (죽령은 서기158년에 개통됨)한양과 영남을 이어 주던 최초의 길이였다.
장승과 솟대
고갯길 어귀에는 장승을 세워 이정표 역할을 해 왔으며 마을입구에 세워진 장승은 이정표 구실은 물론이고 정월대보름날 동제 모실 때 마을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풍년을 기원하는 소원을 비는 신앙적 역할을 하였다.
미륵대원터에서 하늘재로 넘어가는 어귀에 재현 해 놓은 장승과 솟대도 이정표 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길손의 애환을 달래주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장승의 유래
★ 솟대의 모양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지만 일반적인 것은 기다란 장대꼭대기 세 갈래 나뭇가지에 세 마리의 새를 올려 놓은 꼴이다. (솟대는 소나무의 공이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며 오리모양과 까마귀.갈매기.까치 등으로 표현한다)
★ 고대 성기숭배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장승에는 선돌에서 유래한 석장승과 솟대에서 유래한 목장승의 두 종류가 있고 지방마다 다른 모양새로 세워 져 마을을 지키는 마을장승.사찰의 사찰장승.길을 알려주는 공공장승 등으로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으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 장승은 보통 남녀로 쌍을 이루며 남자상은 머리에 관모를 쓰고 전면에 천하대장군, 상원대장군이라 쓰고 여자상은 관이 없고 전면에 지하대장군,지하여장군,하원대장군 등의 글을 새긴다.
중원미륵사지(사적317호)창건 후에 지리적 여건과 역원제도의 정비로 동쪽에 역의 기능을 담당하는 원을 세우고"미륵대원"이라 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것은 삼국유사의 "미륵대원계립령동령야"라 한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이 원터는 계립령(하늘재)와 연관되어 고려초기부터 설치되어 운영되다가 조선시대에 조령(새재)에 3관문과 동화원 등의 시설이 완비되면서 하늘재의 쇠퇴와 더불어 이 곳의 원터도 점차 그 기능이 상실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2차에 걸친 조사(충북대와 이화여대)결과 중소(화재로 소실 된 것을 새로 건축함)축)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사찰(하늘재로 향하는 미륵대원터 가장자리에 서 있는 3층석탑이 증명하고 있다)의 기능과 원터의 기능이 함께 이루어진 고려초기 및 조선시대의 중요한 문화유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 원(阮)은 고갯마루에 설치한 것으로 현재의 여관과 같은 구실을 하였다 문헌에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며 "권근"의 기문에 나라의 들에는 10리길에 여(초막)가 있고 30리에 숙(여관)이 있었으며, 후세에는 10리에 장정(쉬는 집) 5리에 단정(쉬는 작은정자) 하나씩이 있었는데 모두 나그네를 위 한 것이였다고 적었다. 나라에서는 파발마를 두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릴 때나 외국으로 사신을 보낼 때 숙소로 사용하였고 상인과 길손(여행자)에게 편의을 제공하되 공과 사의 구별을 분명하였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길손을 위한 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 그 시절에는 큰 재(嶺)를 넘나드는 길목에는 반드시 원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조령의 동화원. 이화령아래 요광원 하늘재아래 관음원 등이 있다.
중원 미륵사지(사적317호) 안내도
미륵사지는 동쪽으로 하늘재.서쪽으로 지름재 사이의 분지에 위치하고 있고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남북의 중요한 길목에 있어 사찰의 역할뿐만이 아닌 군사적.경제적으로도 중요한 구실을 하엿을 것으로 짐작된다.
1970년대에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미륵당. 미륵당초.원주 (명창3년 대원사주지 승 원명)이라 적힌 기와 등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절 이름은 "미륵대원"으로 미륵 대원터는 본존불.석등.5층석탑이 일직선으로 놓인 배치로서 삼층석탑.사각등. 당간지주. 미완선석불. 건물지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이 부분은 난해하다. 미륵대원터와 사원터를 하나의 사찰로 규정한 조사결과이기 때문이다) ※ 전문가들의 심도있는 재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모든 건축물이 북쪽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이 곳(미륵사지는 석굴사원의 크기에서 우리나라 제일이다)에는 어떠한 비밀이 숨겨 있을까?
북방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신라의 야망일까? 덕주사에 머물고 있는 누이를 그리는 마의태자의 애 타는 마음일까?
★ 덕주공주가 음각하였다는 송계계곡 암반에 새긴 마애불과 일직선으로 마주보고 있는 미륵사지 석불입상은 마의태자가 누이(덕주공주)를 그리는 사무치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전설이 스며있다.
당주지주 연꽃(연화문)이 새겨진 당간지주와 둥근 받침이 새겨진 당간좌대 등이 해체되고 부러진 것은 한 곳에 모아 둬 이 곳을 찾는 이들에게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당간지주: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개의 석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주축돌과 석재들..
여기에 모아진 지주석과 석재들은 월악산이 관광지로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민가와 영업집들의 뒷 뜰 장독대로 쓰였다고 하며 석불입상 앞에 있는 용머리와 사자상도 나뒹글어 다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사찰의 남북 중축선에서 약간 좌측(동쪽)에 위치하여 북향으로 누어 있는 길이605cm,높이180cm의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이다.
귀부의 배면은거북등의 껍데기 모양은 생략하였으며 좌측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 두 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형태를 양각 하였고 앞쪽의 발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나 형식화 되었다.
귀부의 등에는 비좌가 있어 비신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비신에는 창사 내력이나 연혁 또는 중수사실 등이 기록되어 이 사지의 모든 것이 밝혀질 것으로 추정되나 2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찾지를 못하였다. 석탑과 석등,석불입상은 모두 정북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석불입상과 5층석탑 중간지점에 정북방향에 세워진 석등으로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석등이다. 받침돌은 사각형으로 윗 부분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의 간주석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8각형 돌기둥으로 상대석은 양련을 조각 하였다.
위로는 등을 설치했던 8각형 화사석이 있는데 4면에 화창이 있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옥개석과 상륜부 받침을 두고 연꽃 봉우리 모양의 보주를 조각 하였다.
5층석탑 높이 6m의 석탑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위로 받침돌과 1층 기단을 만든 후 몸돌을 올려놓았다. 바위 안쪽을 파내어 만든 기단면석 한 면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일반적인 탑의 모습과 비교할 때 지붕돌의 너비가 몸돌에 비해 아주 좁으며 각 부분의 조성기법이 형식적이고 각 층의 체감률도 고르지 못 해 투박하고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미륵리 절터의 주존불로 특이하게 북쪽을 향해 서 잇으며 본래 석굴식 법당을 이루고 있었으나 석국의 목조 건축물이 불탄 후 석축만 남게 되었다.
석불의 표정이나 신체 등의 조각솜씨는 불상 및 절터의 규모 및 석굴에서 풍기는 웅장함과는 달리 소박한 편이다.
다른 부분에 미하여 유달리 흰 얼굴은 신비감을 불러 이르키며 불상의 거대한 원동형의 몸체. 소박한 조각솜씨. 머리의 갓(보개). 엉성한 옷주름 표현 등을 볼 때 고려초기 충청도 지방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자연적 바위레 약간의 인공이 가미되었으며 바위의 생김모양이 거북이와 비슷하여 거북바위라 불리어지고 있으며 정상부분에 좁은 폭으로 길레 홈을 파서 그 홈을 따라 바위 밑 부분까지 물이 잘 바지게 되어 있다.
바위 위에 올려진 긱졍1m가량의 둥근돌(공기돌)은 고구려 평강왕 때의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싸우기 위하여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이 공기돌로 힘자랑을 하였다고 하여 온달장군 공기돌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평강왕의 사위이자 우리에게 바보온달로 더 친숙한 온달장군은 아차산성에서 전사하였다. 대원터는 한양과 영남땅을 넘나들던 백성들과 국사적 목적으로 이 곳에 주둔한 삼국의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맺음글
대원터에 묵어가는 길손의 발걸음과 말울음 소리 들려오는 저작거리의 풍경에.... 미륵사지에서 들려오는 고요한 불경소리와 새벽을 알리는 타종소리의 번잡함이 고요한 현실과 교차되어 과거의 그 시절로 타임머신 타고 날라가 보고 싶어진다.
신라의 패망 후 고려땅으로 가자는 아버지(경순왕)의 요청을 뿌리치고 개골산으로 들기 전 덕주사에 머물게 되는 덕주공주와 애타는 남매의 정을 나누었을 마의태자의 망국의 한을 토해내는 절규가 들리는 그 시간속으로.... 미륵대원터와 중원미륵사지에 대하여 산악인의 입장에서 개인의 생각들을 가미하여 기록한 것임을 밝혀 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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