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산행지: 태백산(참새골에서 ~ 화방재까지)
산행자: 백두대간 꿈의종주대
산행코스: 참새골~곰넘이재~
도상거리:22.93km, 어프로치:7km
산행거리:12.93km, 산행시간:11시간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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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이 번 구간의 특징은 민족의 영산으로 불리고 있는 태백산에 대한 고찰이다.
文獻에 나타나는 太白山은 3 개가 있다.
白頭山과 妙香山 그리고 지금의 “太白山”이다
태백산의 뜻은
“크게 밝은 뫼”이며 “한밝달” 또는 한배달” 등 인데 모두 檀君神話와 연관이 있다.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세 단군 구을 임술원년에 태백산에 天祭壇을 축조하라 명하시고 사자를 보내어 제사하게 하였다
<환단고기>
일성왕(신라7대왕으로 유리왕의 맏아들)5년 10월에 왕이 태백산에 올라 천제를 지냈고,
기림왕3년3월에 왕이 춘천에서 태백산을 바라보고 망제를 올리니 “낙랑”과 “대방”이 항복하여 왔다
<삼국사기>
태백산은 삼척부의 서남쪽에 있는데 신라 때 오악 가운데 북악이라 하였으며 산 꼭대기에는
산사가 있는데 이름하여 “태백천왕당’이라 하고 여러 고을 백성들이 봄 가을로 천제를 올린다.
<태종실록지리지>
태백산은 삼산(山神山의 준말)과 新羅五岳(토함산(동악).팔공산(중악).계룡산(서악).지리산(남악) 태백산(북악))에 속하며 中祀(나라에서 지내던 “祭享”의 하나로 대사(大祀)보다 의식이 간단함)의 제를 올리던 곳이다
<동국여지승람>
三道(강원.충청.경상)의 백성들이 산 꼭대기에 천왕단을 지어 놓고 단군(한배검)을 위한 祭祀를 지내니
“천제”를 모시고자 오가는 사람들의 어깨가 부딪치고 발 뒤꿈치를 밟을 정도이다
<허당백집>
그 밖에 “부도지”와 “척주지” 등에도 나타나는데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던 이러한 관습은
중국의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하여 통일신라 이 후 맥이 끊어졌다가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이 등극하여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원구단”을 지어 천제를 올렸으나 일제강점기에
다시 폐지 되었다가 광복 후 되 살아나 나라가 위급할 때 마다 태백산에서 祭를 올렸다.
舊韓末에는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이 곳에 올라 白馬를 잡아 기도를 올리니 하늘이 울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 때는 천평(태백산아래)에 살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독립”을 위한 기원제를 지냈다.
지금은 태백시가 주관이 되어 개천절 날 “天祭壇”에서 천제(예전에는 소를 통째로 祭床 에 올리고
天祭를 올렸다고 전해 져 오지만 지금은 소 머리를 놓고 祭를 올린다)를 올리는 전통은 이어져 오고
있지만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는 강화도 마니산에서 행하고 있으며 태백산에서는 무속인들이
주도하는 天祭가 더 유명하다.
태백산 정상에는 세 개의 祭壇이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일직선 나열 해 있으며
각 각의 명칭 및 용도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정상인 비로봉에 위치한 것으로 “천왕단”이라 하고 하늘(천신)에 제가 지냈다.
두 번째는 장군봉에 위치한 것으로 “將軍壇”이라 하고 장군(사람)에게 제사 지냈다.
세 번째는 비로봉 남쪽 끝 부분에 위치한 것으로 “하단”이라 하고 땅(지신)에게 제사 지냈다.
세 개의 제단을 통틀어 “천제단”이라 한다.
문헌에 나타나는 지금까지의 기록들은
태초에 환인의 아들 환웅천왕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나라를 열고 배달민족의 터전을 잡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문헌에서 말하는 태백산은 “백두산”을 일컫는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으며 지금의 태백산은 신라가 제사지내던 주산(북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고,남북 분단 이 후 백두산에 갈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던 사람들에 의해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제례의식을 계승하여 주산의 상징성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은 자료수집과 문헌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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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후면 중국은 달에다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짓는다고 하는데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는 그만하고 산행코스에 대해 설명 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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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골의 깊은 계곡을 따라 곰넘이재에 도착하면 본격적으로 마루금 따라가기가 시작된다.
힘들게 오르면 외롭게 정상을 지키고 있는 무덤이 반겨 주는데 차돌배기능선 따라서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하늘금이 떠 오르는 아침 해의 기운을 받은 色의 조화로 아름답기 이를데 없다.
각화산 줄기 따라 펼쳐지는 석문골의 秘境도 이 번 구간에 빼 놓을 수 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각화산을 남쪽으로 보내고 깃대배기봉 가는 길은
오른쪽으로 솟아 있는 두리봉과 청옥산의 괴기한 암석들은 깊은 산의 묘미를 한층 더 해주며
7부 능선 따라 부쇠봉 갈림길에서
부쇠봉에서 천제단 가는 길따라 “구름에 달가듯이” 신선되어 걷는 기분을 뒤로 하고
천제단의 歷史를 뒤 돌아 보며 유일사쉼터로 내려서는 길목에 서 있는 “살아천년 죽어천년”의
아름드리 주목들의 고고함은 至尊으로 손색이 없으며 건너편 함백산은
또 다른 꿈을 꾸게 만든다.
유일사 지나서 사길령 가는 길에 산신을 모시는 山靈閣을 지나고
밭둑을 건너고 낙엽송 숲 길을 따라 화방재에 내려서면서 산행 길 終了하게 된다.
단체로 하는 산행!
쉽고도 어렵다..
그러나..
각 자의 본분만 지킨다면 홀로 산행보다
줄거움은 배가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마루금에 이르기까지 7km의 어프로치를 할 것이다.
조금은 짜증스럽게 느껴질 수 도 있지만 서로를 격려하는 마음으로 어두운 색채의 시멘트 포장길과
나란히 하는 계류를 따라서 청량한 물소리가 서곡을 알리는 끝 없는 어둠속으로 빨려들어 갈 것이다.
참새골과 석문동의 갈림길이다.
이 곳에서 참새골을 경우하여 곰넘이재까지 7km의 어프로치를 할 것이다.
///참새골과 석문동을 이 고장 사람들은 이름으로 열두 도심이라 한다///
열 두골짜기로 이루어진 참새골과 석문동은 시루봉 능선을 따라 구룡산에서 고직령.신선봉.차돌배기의 백두대간 마루금을 따라 각화산으로 가지를 내리는 산 줄기의 내경에 속하는 계곡으로 행정상 애당리로 표현 하지만 다른 이름으로 열두 도심이라 이르고 그 뜻은? 골이 깊어 들어 갈 때와 나올 때의 길이 다르다 하여 이른 말이라 한다.
_북하산연가 심산님의 설명에서-
-10도의 새벽길을 걸어 곰넘이재에 도착하니 바람한 점 없는 날씨라 흔건하게 적셔진 솟 옷의 땀 내음은
이 곳에서 오랫 동안 쉬어 가게 한다.
이동 중
시루봉 아래 대각사에서 움직이는 불빛은 어둠을 헤치는 대간꾼들의 움직임으로 착각하게 만들었고
마지막 외 딴집을 지날 때 짖어대는 개들의 합창은 깊은 산 중의 친구들을 깨우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었다.
///곰넘이재의 뜻///
영가지(선조41년 "권기"가 편찬한 안동읍지로 8권4책의 목판본이다)에 웅현(熊峴)으로 표기되어 있는 곰넘이재는
"곰님이재"로도 불린다.
"곰"은 "검"에서 온 말로 "신"을 의미하고 태백산으로 천제를 지내려 가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가며 행렬을 이루니
"신"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곰(검신)님이"이라 불렀다.
즉, 웅현(熊峴)은 우리말로 "곰재" 혹은 '검재"이니 다른말로 "신령(神嶺)이다.
일설에는 "곰"을 "고개"로 해석하고 "님이"를 "넘이"로 봐서 "곰님이"는 "고개넘이"로 본다.
신선봉 아래 첫 번째 무덤을 만나는 곳 까지 방화선으로 이어 져 한 적한 임도를 걸어가는 느낌이다.
07:11
첫 번째 무덤을 지나고 나무계단과 로프가 매여 져 있는 조릿대 구간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사면을 치고 오르면
신선봉을 외로이 지키고 있는 손씨문중의 묘가 반겨 주지만 쓸쓸한 느낌 지울 수 없어 김상헌님의 詩 한 수 읆어
위로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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路傍塚(노방총) 길가의 무덤-
路傍一孤塚(노방일고총)
길가의 저 오래된 외로운 무덤
子孫今何處(자손금하처)
자손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惟有雙石人(유유쌍석인)
오직 두 돌사람만
長年守不去(장년수불거)
오랜 세월 지키며 떠날 줄 모르네
金尙憲(김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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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주의 구간 입니다 ★
신성봉 정상에 있는 묘지를 지나가면 알바하게 됩니다.
반드시 묘지를 넘어가지 말고 오던길 묘지앞에서 4시방향으로 등로를 찾아야 합니다.
이 곳에서 많은 분들이 알바를 하고 있습니다.
신선봉을 지나고 차돌배기 가는 길 중간 지점에서 만나는 일출이다.
잡목사이로 떠오르는 햇살은 거리가 가까워 둥근 해는 담아보지 못하였다.
눈 덮힌 북사면은 한 겨울이다.
여기서 각화산과 왕방산 줄기를 낳는다.
그런데...
차돌하나 없는 이 곳을 "차돌배기"라 한다.
이정표 옆에 있는 안내판에는 "이 곳에 차돌이 박혀있어서 차돌배기라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차돌이 있었다면 그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차돌을 닮은 사춘같은 돌 덩어리 하나 없다.
참고로
각화산으로 알바 주의하시고 아랫글 읽어 보시기 바란다.
차돌배기...차돌바기...차돌박이...차돌빼기...
표준어에서 배기는 "-배기"로 적고 -배기는 "그 나이를 먹은 아이" 뜻하는 접미사이다"
"한 살배기~세살배기" 처럼 사용한다.
바기는 "-박이"로 적고 "박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박기는 "점박이.덧니박이.오이소박이.불박이.장승박이. 토박이 등으로
쓰인다.
빼기는 "-빼기"로 적고 뜻은 "곱빼기.코빼기.고들빼기"등으로 쓰이나 "뚝배기.학배기.언덕배기"등은 -빼기로 소리나지만
배기로 적는다.
푸줏간에서 양지뼈 사이에 박힌 희고 단단한 부분을 주문할 때 ...
차돌배기.차돌바기.차돌박이.차돌 등의 예를 들어 "차돌박이"주세요.
해야한다.
한국말 되게 어렵네~~
-성재훈님의 우리말에서 인용함-
각화산에 대한 설명
각화산 아래 중턱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태백산사고"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실록을 서울로 옮긴 후
폐허가 되어 사고터만 남아 있다.(서울로 옮긴 실록은 연유도 모른 채 불타 없어졌다)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가가 창건하고 "태백산사고"를 관리하던 각화사는 한 때는 신도수가 8천명이 넘어
3대 사찰의 하나로 융성 하였다.
차돌배기에서 각화산 줄기를 보내고 깃대배기봉으로 가는 길은
서쪽사면의 7부능선을 따라 걷다가 윗 사진의 능선에서 남사면의 7부능선으로 양 사면을 가로 지르는 줄거움을 준다.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그 아래에서 아침식사를 하였다.
한산님의 과메기에 소주한 잔은 천하의 일미였다.
호산자님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이다.
두 개의 정상석이 서 있다.
하나는 "한얼뫼오름회"라고 하는 곳에서 2007년 9월에 두리봉 갈림길에 세운 정상석이고 다른 하나는 "산림청'에서
2007년12월에 300여미터 떨어진 지점에 세운 정상석이다.
이렇게 두 개의 정상석을 세워 산을 찾는 분들에게 헷갈림을 주는 곳을 여러 번 목격하였다.
도솔봉의 정상석이 그렇고 간월산. 견두산 등이 그렇다.
민간단체에서 세워놓은 지점이 정확하지 않다면 서로가 협조하여 옳바른 위치로 옮기면 될텐데.
권위의식 인가? 뒷 북인가?
집행 된 예산을 되 돌리지 못하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은 시정되어야 하며 국민의 헐세를 아껴 다른 곳에
사용해야 할 것이다.
산림청에서 세운 정상석이 있는 곳이 깃대배기봉의 정상일지는 몰라도 두리봉 갈림길 삼거리가 깃배배기봉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 할 것이다.
뚜렷한 명칭의 유래도 없이 붙여진 "깃대배기봉"라는 이름이 "억지 춘향" 같은 느낌이라 그렇다는 것이다..
백두대간 상 부쇠봉에서 분지되는 산줄기이자 무속신앙인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이다.
이 곳에는 어느 도사가 쌓았다는 다섯 개의 돌탑이 있다.
부쇠봉의 정상 400m지점에 설치 된 이정표이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은 부쇠봉의 정상을 넘어 오지만 7부능선의 서쪽 사면을 우회하게 되어 있다.
마루금은 부쇠봉 정상에서 문수봉을 보내고 장군봉으로 이어진다.
★ 대간꾼들이 반드시 거쳐야할 곳이 부쇠봉이다★
왜냐하면?
마루금이니까...
세 계의 천제단 중 가장 핵심이 되는 "천왕단"이 있는 곳이며 일설에 의하면 정상이 "비로봉"으로 알려져 있지만
태백산의 정상은 "장군봉"이다.
참고로 장군봉보다 30cm가 더 높은 곳으로 알려진 천완단이 있는 곳은 탑의 높이를 더 쌓아 올려 그렇게 불리는 것인지?
정확한 유래는 모르지만 문수봉이 있는 곳에는 비로봉과 관음봉을 뜻하는 봉우리들이 있듯이
천왕단이 있는 이 곳을 "비로봉"으로 지명하지 않했나 가늠하여 본다.
나 또한 "비로봉"으로 보고 싶다.
★ 산 줄기에 대한 나의 생각 ★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에 대하여 태백산 구간에 설치된 이정표에는 태백산에서 두 개의 산맥이 나누어 진다고 적혀있다.
어떻게 하여 태백산에서 나누어 지는 지 이해가 안 된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은 일본의 "고토분지로"라고 하는 지질학자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광복된 지 63년이 되어도 아직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지리의 명칭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몫이라 하지만 백두대간으로 불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대한국인 모두의 마음일 것이다.
산경표에는 태백산맥을 낙동정맥으로 표기 했으며, 소백산맥은 백두대간 상 매봉산에서 함백산. 태백산.소백산.속리산.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줄기를 말하고 그 분기점은 천의봉과 삼수령(피재)의 중간지점으로 보고 있다.
태백산이라 오기한 것을 바로 잡아 산경표에 따라야 할 것이다.
구룡산 아래 하얗게 눈 덮인 곳을 천평이라 한다.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 때 태백산 정상을 天嶺이라 하였고 천제단이 있는 곳을 天山이라 하여
그 아래 있는 들을 "하늘들"이라 하여 "天平"이라 하였다
부쇠봉과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이정표.
하단이 있는 안부까지 철쭉과 주목 군락지가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정상부에 있는 천제단의 위치도!
(지도에 적시한 비로봉은 임의로 기록한 것이다)
어떤 기록을 검토하니 천왕단이 있는 위치가 장군봉(1567.7)보다 30cm높게 표기되어 있다.
원래부터 그렇게 높은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장군단보다 천왕단을 높게 쌓아"비로봉"이란
지명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 이 것은 개인적인 연구이므로 확대 해석은 금물임을 밝혀둔다★
기록에는 천제를 지내는 곳으로 되어 있지만 지신(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지도상에는 부소봉으로 표기되어 있고 태백산의 안내판 등에는 부쇠봉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의 명칭으로 통일되어야 할 부분이다.
천왕단 주변에 세워져 있다.
무당들의 안식처였던 당골로 내려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
문수산의 미끈한 능선이 시선을 압도한다.
태백산 정상에 자연석을 쌓아 만든 3기의 제단이다. 태백산은『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기록에서 신산(神山)으로 섬겨져 제천의식의 장소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천제단 역시 이런 제를 올리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
태백산 정상에 있는 천왕단을 중심으로 북쪽 약 300m 떨어진 곳에 장군단과 남쪽 아래에 있는 이름없는 제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북에서 남으로 일직선상에 배열되어 있다.
천왕단은 2m 남짓한 높이로 자연석을 쌓아 남쪽으로 계단을 조성한 원형제단이다. 그 위에 4각 시멘트제단과 대종교에서 단군을 모신 장소로 성역화하는 과정에서 세운 것으로 알려진 비석이 있다. 1949년 조사기록에 의하면 당시에는 석단이 9층을 이루었기 때문에 ‘구단탑’이라고 하였으며 중앙에 태극기를 꽂고, 그 주위에 무속신들을 상징하는 각종 기를 세웠다고 한다. 장군단은 남쪽에 계단이 있는 석단으로 천왕단과 거의 비슷한데 천왕단 상부에 있는 4각 제단이나 비석 등은 없다. 천왕단 남쪽의 숲 속에 위치한 단은 특별히 지칭하는 이름이 없고 소박한 인상을 풍기는 단아한 제단이다.
제단을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부족국가시대부터 이곳에서 천제를 지냈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일제시대까지 이곳에서 천제를 지내고 그 의식이 아직도 이어져 매년 개천절에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국가의 태평과 안정, 번영을 기원하는 동제의 장소로 이어지고 있다.
-문화재청-
소백산을 대표하는 봉우리로 비로봉.국망봉. 상월봉이 있다면.태백산에는 장군봉.부쇠봉.문수봉( 천왕단이 위치한 비로봉에 대해서는 확실한 고증이 없어 문수봉과 연계해 본 개인의 생각일 뿐이었다)이 있다
우리는 오늘 태백의 정상에서 저 멀리 실루엣으로 다가 오는 상월봉을 바라보며 양백지간을 이어주는 오작교 구간을
마음 껏 그려보고 있다.
선달산.박달령산령각.옥돌봉의 오백년 된 철쭉.구룡산 방화선과 신선봉 등.......
꽃 피는 봄 날에 다시 찾아 오리라 .....
다짐하면서....
태백산을 찾은 많은분들과 함께 올 한해를 보낸 아쉬움을 달래며
무사히 넘기게 해 주신 산신님께 삼배를 올렸다.
이 것은 종교의식을 떠 난
선조들이 행하여 왔던 의식을 재현 해 보고자 했던 이유였다.
우측에 있는 生死木의 주목들이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워 준다.
나라를 지키다 순절한 장군(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태백산은 신라의 삼산오악 중 북악에 속하는 산으로 신령시 하여 주산으로 삼고 왕들이
이 곳에 올라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단군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나라를 열고 제사를 지냈다는 환단고기와 역사서에 나오는 태백산에 대한 기록들은
현재의 백두산을 일컫는 것으로 연구학자들은 보고 있으며 지금의 태백산은 신라의 주산(북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며, 개요에서 열거한 문헌집들은 더욱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유일사(매표소) 갈림길
! 여기 알바주의 구간이다.
마루금은 이름없는 석탑이 있는 10시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오른 쪽 임도는 유일사 매표소로 내려가는 곳!
사길령 가는 길은 한적하다.
마루금 쉼터에서 장군봉방향 오른 쪽 절벽이다.
즐비하게 서 있는 돌탑 아래 건물은 산신각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고즈넉한 풍경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유일사 입구 갈림길을 지나서 산령각에 도착한다.
산령각의 유래
강원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던 고개로 화방재(일명:어평재)가 뚫려 현대교통수단이 발달하기전까지 길손들의 왕래가 많았으며
특히. 보부상들은 수십명씩 대열을 이루어 고개를 넘나 들었다.
맹수와 산적들이 자주 출몰 하기에 보부상들은 고갯마루에 당집(산령각)을 짖고 제를 올렸으며 지금도 매년 음력4월15일
태맥산 산신님께 제사를 올린다.
현재 태백산사길령산신각회계에 보관중인 "천금록"은 200여년 전부터 보부상들이 이 곳에서 제사를 올린 기록을로
우리나라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산령각 옆에 세워져 있는 설명문에서 인용-
밤길을 걸을 때 오색천을 보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다는 두타행님의 여담이 생각 나
홀로 웃음 흘리니 함께하는 대원은 영문도 모른 채 같이 웃음지어 준다.
사길령 매표소
입장료 폐지로 닫혀있다.
마루금은 12시방향으로 밭의 중앙을 가로질러 가야한다.
낙엽송 숲을 헤치며 10분 걸어가면 산행종료점인 화방재이다.
오른쪽은 유일사 매표소 가는 길이므로 알바에 주의해야 하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마루금을 놓친다.
고갯마루 서쪽에 있는 어평리에서 유래되는 어평재는 대간꾼들에게는 화방재로 더 알려져 있다.
태백산의 산신이 된 단종대왕이 어평리에 이르러 "이 곳부터는 내 땅이다"라는 전설에서 유래된 어평재와
고갯마루에 진달래와 철쭉이 많아 "화방재" 또는 "꽃방석재"로 불리는 이 곳에서 산행을 종료하니15시 30분은
넘어서고 있다.
다음에 이어 갈 마루금은 폐가를 우회하여 낙엽송 숲으로 .......
함백산 가는 길이다.
후기
고치령에서 "차돌백이"구간 까지를 소백산과 태백산을 이어주는 양백지간을
유유자적하며 3회에 걸쳐 건너왔다.
오는 길에 마셨던 오전약수의 뚝 쏘는 청량한 물맛과 깊이를 알 수 없이 원시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참새골의 비경을 보았고 조선시대 예언가 "남사고"가 말하는 십중지 중에 제일이라는 땅도 밟아 보았다.
오작교의 중앙부분이라 할 수 있는 선달산에서는 과거에 급제하여 입궐을 기다리는 선비가 되어 보았고..
영월 땅!
바라볼 때는
17세의 어린나이에 사약을 받아야 했던 단종의 비극과 정순황후의 애타는 사부곡을 들으며 슬퍼 했으며
옥동천 상류인 남대리를 무대로 궁예가 펼치던 미륵세계의 꿈은 용솟음 치는 야망의 기운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조부를 욕되게 한 詩 한 수 때문에 평생을 후회하면서
해학과 풍자로 일생을 마감한 김삿갓의 유량생활 앞에서는 절규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스러져 간 역사의 한 토막이지만
오작교를 건너 오면서 그 들의 세계를 음미하였던 꿈 같은 시간들은
지금까지 느껴오지 못했던 또 다른 삶의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돌아 오는 길.......
저녁을 먹기 위해 무심코 찾아 들엇던 음식점(기사식당)이 단종대왕이 잠 들어 있는 장릉이었던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아마도...
먼 길 오느라고 수고 했다고 당신집에 들려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고 푸짐한 상 베풀어 주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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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두대간의 꿈! 두문동재에서 피재까지 -북진28구간- (0) | 2008.0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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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두대간의 꿈!화방재에서 두문동재까지 -북진27구간- (0) | 2008.01.21 |
[스크랩] 백두대간의 꿈! 박달령에서 차돌배기까지 -북진 25구간- (0) | 2007.12.12 |
[스크랩] 백두대간의 꿈! 고치령에서~박달령까지 -북진24구간- (0) | 2007.11.27 |
백두대간의 꿈! 죽령에서 고치령까지 -북진23구간- (0) | 2007.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