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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두대간의 꿈! 두문동재에서 피재까지 -북진28구간-

㉥ 백두대간 記

by 운해 2008. 1. 2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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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08년 01월26일(음력12/19)날씨:맑음 기온: -17도

 

산행지: 백두대간(천의봉)

 

산행자: 백두대간 꿈의 종주대

 

산행코스:싸리재(태백방향)~두문동재~금대봉~비단봉~매봉산(천의봉)~피재

 

도상거리:9.75.어프로치(약) 3km.

 

산행거리 : 12.75km , 산행시간.11시간10분


개요


이 번 구간의 개요는 27구간 산행기 란에 기록하였으므로 생략하고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건의령(한의령)에 관련된 내용으로 쓰고자 한다.


건의령(巾衣領)은 고려 말 忠臣들과 연관된 고개로 삼척군에서 소개하는 안내판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려충신들이 巾衣領을 넘어올 때 관과 관복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다시는

조정에 발을 들여 놓지 않겠다고 하며 함백산 골짜기로 은거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함백산 골짜기는 두문동으로 보이나 정선군 남면 가칠현동에는 고려유신 7인이 은거하였다는 

또 하나의 기록이 있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高麗忠臣들이 두 곳으로 나누어 隱居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영.정조 실록에 처음으로 언급되는 杜門洞은 全國에 걸쳐 여러 곳이 있으나 송도(고려의 궁궐이 있던 곳)광덕산에

있는 두문동과 연관이 있는 것 만은 사실이다.


아래에 내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세 곳의 두문동에 대해 살펴보면 대략적으로 이렇다.


1

松都(개성) 광덕산에 있는 두문동 이야기이다.

요동정벌에 나섰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찬탈하여 朝鮮을 열고 과거를 치르나 고려충신들은

“不事二君“을 외치며 과거에 應試하지 않는다.


여러 차례에 걸쳐 권유에도 응하지  않는 고려유신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이성계는 정몽주를 제거하라고

 이방원(후 태종)에게 지시한다.

 

명을 받은 이방원은  刺客(조은규)를 보내  선죽교에서 포은정몽주를 살해한다.

 

정몽주가  살해를 당하자 고려충신들은  송도(지금의 개성)의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는 상여 집(마을에서 상여를 놓아두던 곳)에 모여 상의를 하는데 조선왕조에 입궐을 하느니 수양산의 伯夷叔齊처럼 고사리나 꺾으며 살자고 결의하고 “관(巾)과 관복(衣)”을 벗어 나무 가지에 걸어 놓고 다시는 되 돌아오지 않을 고개를 넘어서 골짜기 깊이 숨어 "杜門不出" 해 버린다.

 (무신 48명은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숨어들었다고 "개성지"는 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고려백성들을 돌보게 하기 위하여  총명하고 나이 어렸던 충신을 조선의 조정에 내 보냈는데 그가 바로  조선시대에

 가장 훌륭하고 청백리의 표상인 "황희 정승"으로 평생에 두 가지를 후회 했다고 한다.

(첫 번째가 두문동에서 나온 일이요, 두번 째가 조선에 입궐한 것이라고) 


훗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관.관의를 벗어 걸어놓은 고개를 “不朝峴”이라 하고 高麗忠臣들이 숨어버린 골짜기를

 “杜門洞”이라 했으며 高麗六隱 (圃隱:정몽주.牧隱:이색.冶慇:길재.陶隱.이숭인.農隱:민안부.樹隱:김충한)등을

포함한 충신들을 “杜門洞七二賢“이라 했다.

 

(불조현=조선에 나가지 않기 위해 넘어간 고개

두문동=고려유신들이 "백이숙제"처럼 고사리나 캐 먹으며 살자고 결의하고 살아가던 곳

두문동72현= 74현으로 보는 자료도 있으나 두문동에 들었던 유신들의 명단)

 

2

매봉산 금대봉 아래에 있는 두문동과 정선군 남면 가칠현동의 고려유신들 이야기이다.


먼저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유신들은 공양왕을 모시던 신하(내관)들과 연관 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양왕은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로 유배되어 “살해재“에서 살해 되는데 그 때 살아남은 신하들이

도망쳐 巾衣領(일명:한의령蹇衣嶺)을 넘어 와 두문동에 은거한 것으로 보인다. (정선군 남면 가칠현동의 고려유신

은거지는 두문동과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고증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가칠현동에 은거하던 고려유신들은  송도 광덕산의 두문동에 의거하던 분들로 전오륜(全五倫). 김충한(金仲漢).

고천우(高天祐). 이수생(李遂生). 신안(申晏). 변귀수(邊貴壽). 김위(金瑋) 등 7人이다.


이들은 이성계가 두문동 72현을 핍박하기 시작하자(다른 史料에 의하면 조선왕조 참여를 거절하는 두문동72현에

화가 난 이성계는 “두문동에 불을 놓아 72현을 살해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확인이 필요한 자료임)살아 남은 자들은

 다른 隱居地를 찾아가기 시작했고, 그 때 전오륜의 고향인 “가칠현“으로 숨어 든 7인은 백이산의 고사리를 뜯어

 목숨을 이어 가면서 松都를 그리는 애타는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樹隱 金 沖 韓 (수은 김 충 한)

 

一片丹心不二心 .松京何在淚流中

(일편단심불이신 송경하재루류중 )

 雲山獨立苞桑世 .無愧首陽斷絶塵
(운산독립포상세.무괴수양단절진)

 

○ 일편단심은 두 나라를 섬기지 않으니

송도 는 어데 있는지 눈물만이 흐르네

 

먼 산은 흥망성쇠에 아랑곳 없이 우뚝 섰으니 세상에 부러움 없이

 수양산 고사리나 캐어 먹으며 숨어 살겠네.


★ 이 글은 훗 날 정선 아리랑의 시원이 된다.


 

3

마지막으로 남원 두류산(지리산) 아래에 있는 두문동(지리산 서쪽 견두산줄기) 이야기이다.


가칠현동에서 머물던 樹隱金忠漢은 마지막 거처지로 남원의 頭流山자락 서쪽(송동면 영동리)을 택하여

그곳에 草幕을 짓고 草根木皮 하면서“나는 亡國大夫이니 죽은 뒤 祭祀도 조촐하게 지내고 封墳도 만들지

 말 것이며 碑石도 세우지 말라”는 遺言을 남겼다.


지금도 그의 무덤에는 봉분이 없으며 死後에 태종이 史曹判書(正二品) 벼슬을 내렸지만 子孫들은

그의 유언을 받들어 행하지 않았다.


세 곳 모두 高麗유신들이 새 왕조의 入闕에 동의하지 않고 두문동에 들어가 世上과 담을 쌓고 고사리를 캐며

 草根木皮로연명하면서 “伯夷叔齊“를 따르던 실천은 같으며 지형 또 한 모두가 송도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두문동72인의 역사는 조선왕조 영.정조 실록에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이 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영조는

재위27년(1751년)에 이들을 복위 시키고“표절사”를 지어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후손들은 조정에 등용하게

하였으니 조선건국 124년만의 일이며 아래의 글은  표절사에  세워진 영조가 지은 비문 중 두 개만 기록 해 본다.

 

高麗忠臣杜門洞碑

英祖御題曰,勝國忠臣今焉在,特堅其洞表節

영조어제 왈, 고려충신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특별히 그 동네에 비를 세월 그 절의를 표양하노라.

 

杜門洞碑陰記

英廟御題曰, 崇禎紀元後百二十四年辛未季秋, 追感杜門洞.

前組忠臣七十二人節義,命錄用基孫,寔子卽阼二十七年

英祖어제 왈. 숭적기원후 백이십사년(신미1751년) 가을에 두문동칠십이인의 절의(의리)를 추모하여

그 자손들을 등용할 것과 비를 그 동에 세울 것을 명했노라, 내가 즉위한지 이십칠년이다.

(참고문헌:영.정조실록,경주김씨수은공파 족보)


정조대왕도 이들의 충절을 기렸으며

壬辰倭亂으로 인하여 義州로 피난 길 올랐던 宣祖도 이들의 충성심을 떠 올리며 이렇게 읊었다. 


 宣祖贊

善竹橋 血赤之日,詠松岳葉黃之句

선죽교 피 붉은 날을 슬퍼하고 나뭇 잎 누른 것을 읊노라

 

 일부 알려진 자료를 보면 "정조"가 표절사를 창건하여 두문동72현을 봉안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경주김씨 수은공파 문중의 족보(영조가 비문을 짓고 손자가 세웠다)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영조의 지시로

비문이 새겨지고 표절사도 착공되어 정조 때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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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記錄은 조선건국 124년 만에 영조에 의해 두문동72현이 표절사에 奉安되고 그들의 후손들이 登用되기 시작 하면서

영.정조 實錄에 기록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사실과 다를 수 있어 高麗六隱 중 한분이고 杜門洞72賢 중

 한 분인 樹隱 金忠漢의 자손들인 慶州金氏 樹隱公派 족보에 있는 기록을 나름대로 풀어 쓴 소견임을

밝혀 두는 바이며 두문동과 가칠현동의 고려유신들에 대한 부분은 세밀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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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로(허리까지 차 오르는 눈 때문에 피재까지만 진행하였다)

두문동재 상세도

 

백두대간 마루금인 두문동재에 오르기 위 해 많은 고심을 하였다.

 

사실적으로 대간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 하는 것이 어프로치 구간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로 일어 난다.

 

나 또한 어프로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  이러한 문제에 부닥치면 나름대로 고심을 많이 한다.

이 번에도 그랬다.

 

두문동 이장님께 부탁하여 마루금까지 차량을 이용하려고 통화를 하고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제설작업이 되지 않아

차량이 갈 수 없다는 금요일 오후에 최후 통첩을 받는다.

 

어찌하나! 고심을 해 보지만  이제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두문동에서 오르는 방법과 태백쪽의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것이다.

(양 쪽은 각각 3km의 거리로 같다)

 

그래도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끝에 위성사진을 관찰하기 시작하여 싸리재터널(정선사람들은 두문동터널이라 하고 태백사람들은 싸리재터널이라고 하는데 태백방향이니까 사리재터널로 표기한다)입구에 있는 희미한 길을 발견하고 두문동이장님께 전화넣어 보니 터널공사 때 관계자들이 다니던 길이나 1m가 넘게 쌓인 눈 길에 위험하니 도로를 따르는게 좋다는 이야기를 전 해 듣는다.

 

별 수 없이 도로를 따르기로 하지만 한 시간이 넘게(지난 번 하산 때 그랬다)지루한 어프로치구간 선택은 나를 힘들게 한다.

궁즉통(窮卽通)이라 했던가!

 

"백두대간을 그리며"팀의 맏형이신 호산자님 전화 하시는데 싸리재터널 옆 구길이 보이는 것 같은데

그 쪽으로 어프로치 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씀이다.

 

나 또한 전적으로 동의 하지만 혼자서 결정 내리기는 월권이라 "가는 길에 대원님들과 상의하여 결절 하기로 하지요" 하였다

차 안에서 논의가 이루어 진 결과 에베레스트 등정를 준비 중인 출발님이 러셀을 자청하고 나선다.

 

좋다.

비록 이 길이 캄캄한 밤 중이고 처녀 구간이지만 나를 믿고 신임 해 주는 대원들이 있어 흔쾌히 승락한다.

 

산행대장으로서 등로 선정과 결정은 대원들을 편하게 할 수도  어려운 곤경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대원들의 생각보다 더 많은 고심을 한 끝에 내리는 결정인만큼

조금은 불만스러워도 스탭진의 결정에 따라 주는 넓은 마음이 있기를 바란다.

 

"어떤 결정이 내려 지더라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서로를 격려하는 믿음이 아름다운 산행을 만든다."

 04:20

(오른 쪽  도깨비사진은 싸리재 터널 통과하여 태백방향 도로 가장자리에 서 있는 태백시의 상징물이다)

 

새벽 길을 달려 도착한 사북은 불야성이다.

한 탕을 노리는 전국의 도심님들의 주머니를 박살나게 만드는 카지노의 불빛 사이로 우리는

어느 이름모를  해장국집에 들려 떡국과 선지해장국으로 이른 아침을 해결한다.

 

심설 산행에서 한 끼 해결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서 받아주지 않는 위장을 달래가며 한 숟가락

억지로  삼키니 예의는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살야야 하기 때문에  먹는다고  양해를 구하니  마지 못 해 받아주기는 한데...

기분은  영 아닌 가 보다..

 

식사 후 두문동재터널을 벗어나 우측 도로변 가장자리에 내려 산행 준비 완료하고 터널방향 어프로치 구간에 들어서는 순간!

이 선택이 잘못 되었다면 어떻게 하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잡념을 다져 잡고 눈 속에 묻혀버린 길을 찾아 어둠속을 헤치는데 사타구니까지 빠지는 눈 길은

방울소리 요란하게 하고 어려운 산행을 알리는 서곡에 불과 하더라.

 

눈 속에 파 묻혀 버린 길을 찾는 것은 포기한 채

감각에 의존한 진행으로 지독한  어프로치구간을 빠져 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고.....

 

아이젠에 관계 없이 미끄러지는 급사면 오름길은 스틱도 무용지물이라...

나뭇가지와 조릿대 등을 부여잡고 올라가는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까?

이름모를 잡목들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오늘에야 알았다.

 05:33

한 시간에 걸친 어프로치 끝에 도로에 오르지만 대원들의 표정도 각양각색이라 ....

두문동재까지 도로 따라 가는 1km의 그 길도 만만치가 않더라.

 

두문동재에 도착하니 사북방향으로 "하이원"인가 하는 스키장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슬로프가 장관을 이루고

태백방향 도로 따르는 수은등도 신혼방처럼  연분홍빛 활홀감을 연출하지만 바람없는 매서운 추위는

 어서가라 부추킨다.

 

 그 바람에 이정표 뒷 쪽

돌무더기를 치마자락에 담아다 쏟아 놓았다는 마고할머니의 전설이 스며있는 돌탑에

인사도 못하고 지나쳐 버렸다.

 

 태백시 화전동과  고환읍을 연결하는 해발1268m에 위치한 두문동재는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만항재가 개통되기 전까지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고개에 위치한 도로로  5.16이후에 전국에서 체포된 깡패들 가운데

 B,C급으로 분류 된 근로대 1268명이 만든 도로이다.(A급은 지리산 허리 자르는데 투입됐나보다 ㅎㅎ.)

 

 이 도로는 철도가 개통되기 전 까지 석탄을 원할하게 수송할 수 있었으며 후에  개통한 두문동재 아래를 통과하는

 터널은 운행거리를 단축시켰으나 싸리재와 두문동재를 혼용하여 터널이름으로 표기하고 있어

이곳를 찾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 

정선군이나 태백시 중  한 곳에서 양보하여 하나의 이름으로 통일 되기를 바란다.

 

" 불바라기"라는 이쁜 이름은 두문동재에서 금대봉과 우암산(검룡소방향)까지를 불바래기(방화선)이라 한다.

"불을 바라본다"라는 말인데 화전을 일궈 먹고 살던 시절에는 밭을 만들기 위해 태백쪽이나 사북쪽에서 산불을 놓고

이곳에 올라 불의 진행 방향을 보고 맞불을 놓으면 양쪽의 불이 불바래기에서 만나 불이 꺼져 버렸다 한다. 

 06:23

두문동재에서 금대봉 아래까지 이어지는 방화선 도로는 바람불어 쌓인 눈 때문에 진행이 어려운 구간이었다.

 

가는 길에 정선아리랑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수심편의 한 가락 뽑아 본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이것이 民間에게 전해지기 시작한 정선아리랑 "수심편"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만수산 먹구름은 이성계의 軍을 의미함)

 금대봉 오름길 우측으로 보이는 태백 쪽 수은등은 반짝이는 별처럼 아름답다.

 06:56

금대봉에 도착 한다.

낙동정맥 너머 동해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하는 해오름은 사바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고

백두대간의 종착역(남한구간만)을 향 해 치 닫고 있는 대원들의 불 타는 야망을 대변 해 주는 것 같다.

 


금대봉은 두문동 동쪽으로 태백사 화전동과 장전동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산(해발1418)이다.

金臺란 말은 신이 사는 劍帶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나 일설에는 산 속 깊이 금이 묻혀 있어서 나온 말이라 한다.

 금대봉은 지명과 광산이 일치하는 우리나라의에서 예가 많은 곳 중의 하나로 예전부더 광산업자가 몰려들던 곳이다.


실제로 일제시대에 산 이름이 금대인 까닭으로 황소만한 금덩어리가 묻혀 있다고 해 많은 광산업자가 몰려들었으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도 산에 가우"

"예! 갑니다"

"눈이 와서 위험한데 오늘은 가지 않으면 안 될까?"

"대간 하는 사람들이 계절의 변화를 아나요.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우리는 간다우?

"그래도 그렇지. 눈이 1m가 넘게 왔다는데 당신이 걱정 되어 그래요"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을 다 보겠구랴? 나를 다 걱정 해 주고.."

"언제는 내가 당신 생각 안 했남??

"하여튼 갑니다"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고집 누가 꺽으리오!"

 

이상은 대간 길 나서는 안나푸루나님이 전날 밤 남편과 나눈 대화였습니다.

ㅋㅋ.

 금대봉에서 비단봉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없어진지 오래이고..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리본은 이정표 역할을 훌륭하게 완수 하지만 오늘만큼은 무용지물이다.

나침판과 지형지물에 의존하는 수 밖에...

 개척자는 외롭다.

뒤 따라 오는 사람은 선답자의 노고를 모른다.

 

오늘도 그랬다

04시20분 출발하여 11시간10분에 걸친 사투 끝에 피재에 도착하니 11시에 두문동재를 출발 하였다는 다른팀이

우리와 함께 도착한다.

 

앞에서 럿셀 해 주어 우리는 편하게 진행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 보다 따듯하게 끓이고 있는 국물에다 소주나 한 잔 줄 것이지..

에~잉

... 

그래도 그렇지..

여섯시간 까지 차이가 낫단 말인가!

 동해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하는 해오름을 우리는 잡목 사이로 보아야 한다.

전망대에 대기하고 있다 보는 일출은 우리에게 사치일 뿐이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랬다.

 

영하20도의 뼈속을 에이는 추위 때문에....

 자연이 만들어 낸 그림.

 

어떤 화가가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낼까?

요즘 사회적으로 떠들썩 하고 있은 요상한 그림 한 점에 70억이니 하는 소리 들어 보면

이 그림은 700억 짜리이다.

 

넘들..

 

치장에 쓸 돈 있으면

불우이웃 돕기나 할 것이지?

 

돈만 벌 줄 알았지

쓸 줄은 모르나 보다.

 

태안 앞바다는 죽어 가는데도...

책임지는 자 없고

 

"국민들께 죄송합니다" 가

고작이다.

 

만나서 의.식.주 자랑이나 하는 못난이 졸부들 처럼~~~

 08:26

예전에는 검룡소 가는 이정표가 있었는데....

 

아래 빈 공간에 쓸 내용이 궁금 해 진다.

 멧돼지의 흔적.

 

잠시동안 만이라도 멧돼지의 럿셀로 편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고맙다 /멧돼지야..

 비단봉.(북사면)

비단치마처럼 아름다운 봉우리다.(남사면)

 

비단봉 가는 안부에 "쑤아밭령"라는 괴상하면서도 예쁜 이름을 가진 재(嶺)가 있다.

 (화전동과 창죽동을 넘나들던 "재" 이다)

 

쑤아밭령에 대해 수 없는 문헌과 유래를 찾아 보았지만 뚜렷한 설명이 없다.

다만 서울대00산악회에서 기록 해 놓은 산행글에 "水禾田嶺"이라 표기 해 놓은 것을 보았다.

 

거기에서 힌트를 얻어 나름대로 그 뜻을 풀어 보았다.

쑤아발령은 행정구역상 태백시 화전동(禾田洞)과 창죽동의 경계를 나누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이다.

쑤아밭령은 화전동과 대덕산 아래 창죽동을 넘나드는 재이다.

 

우리의 고개지명은 대개 마을 이름에서 빌려와 지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화전"이라는 이름에서 고개이름을

 빌려와 "화전령"또는 화밭령"으로 지명한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쑤화밭령은 무엇인가? 생각 해 보았다.

 

화전은 산간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던 곳을 이르는 말인데 왜 화전일까?하는 의구심에서 출발 해 보니

쌀 농사는 기원전 4000년 전 부더 중국에서 시작하였다고 한다.

 

논에서 벼농사를 짓기 전에는 밭에다 벼를 심는 것이 최초의 재배방법이었다 .

여기까지 접근하니 해답은 예외로 쉽게 얻었다.

 

밭에 벼를 재배하니 벼(禾)와 밭(田)이고.밭에서 벼를 수확하니 거둘(收)이다.

조합 해 보면 收火田이 되고 여기에 재(嶺)을 붙이니 "收火田嶺"이 된다.

 

쑤아밭령의 발음은 "수화"가 된 발음으로 "쑤아"로 변음되고 田은 "밭" 이니 嶺을 붙이면 "쑤화밭령"이 된다.

실제로 중국식 발음을 해 보아도 "쑤아밭령"으로 발음된다.

                                             收(shōu),禾(hé), 田(tián).嶺( ling) :괄호(안)은 중국식 발음표기

                                                 (동네 식당에서 일하시는 조선족 아줌마에게 물어 봤다)

 

참고로 논(畓)자는  우리나라 고유의 한자로 밭에다 물을 댄다는 뜻이니 벼 농사를 논에서 짓기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가 최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태백산을 넘으면서부터 조선시대보다는 고려의 역사가 펼쳐진다.

이것은 아마도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산속 깊숙하게 문화의 전달이 늦어진 결과이리라...

-운해생각-

 대덕산

야생화의 보고이다.

 은대봉과 금대봉.

사에에 두문동재가 있다.

 

은대봉은 하함백산으로 불리기도 하며 자장율사의 전설이 서려 있는 산이다.

중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 온 자장율사는 정암사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세 군데에 나누어 모셨다고 전해진다.

 

정암사에 있는 수미노탑, 은대봉,금대봉이며  두 곳(금대봉과 은대봉)에는 도난을 걱정하여 불심이 강한 자에게만

보이도록 숨겨 두었다는 내용이다.

 함백산.

 

북사면은 선수촌을 만들기 위한 도로 개설로

남사면은 스키장과 탄광의 개발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 금할 수 없게 한다.

 금대봉을 가까이서..

 

우리나라게 제일 높은 고산대에 있다는 추진역이 아스라이 보인다.

11:37

이름처럼 이쁜 봉우리.

 

문희와 보희가 꿈을 비단치마로 사고 판 설화가 생각나는 것은 왜 일까?

 만사태평님.

 

멀리 전라북도 장수에서 백두대간의 꿈은 안고 참석 하시는 분이다.

부부가 함께 참여 하는데 우리는 두 분은 "만태"와 "천태"로 부른다.

 

사실 대간길 겉는 시간보다도 더 지루할 차량 이동이 만태님을 더 힘들게 할 것이다.

장수에서 대전까지 자가용 이용하여 대전에서 열차편으로 서울에 상경.

사당역에서 버스에 올라 대간길 마치고 역순으로 귀향 하는 모습을 보며 대간길이 도대체 뭐길래 저토록

빠지게 하는 것일까? 생각 해 보면 가슴 뭉클 해 진다.

 

대전에부터는 손수 운전하기 때문에 소주한 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것!

마음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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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하는 그 날까지 화이팅!

 드디어 매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릎은 남의 것이 된 지 이미 오래이다.

 농사철에는 윗 사진처럼 진행할 수 없다.

 

아랫사진 오른 쪽 그림처럼 농로를 따라서 농기구창고 안쪽 길 택하여 배추밭 언저리까지 오른다음 매봉산으로 들어야 한다.

오늘만큼(비농사철)은 정확하게 밟을 수 있지만 농장측에서 마루금만이라고 만들어 주면 좋겠다.

 

왜냐하면

농사철 배추밭을 무단횡단한다고 대간꾼들 욕할 것이 아니라 정확한 마루금을 고집하는 그들을 위해

길 하나 만들어 주는 것도 한미재단의 선행보다 더 큰 배품이 될 것이기에.....

 

항간에서는 생태계복원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미 개간되여있고 서울시민에게 배추와 무우공급50%를

 공급한다는 취지를 넘어 복구만이 능사가 아닌 더 이상의 훼손은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풍력발전기를 향해 오름길을 재촉한다.

 우리는 그들을 "귀연 사인방"이라 부른다.

서울 부산 이천 찍고~~ 남해에서 태여나 인천에 살면서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초.중.고등학교 학부형회장을

지낸 인연으로 귀연산악회 식구들이 되어 선.후배를 형제처럼 아끼며 살아가는 이 분들의 모습을 보면 "反哺之誠"의 "예"라 

 혼탁한 이 시대에 배울 바 있어 이들이 우정을 여기에 기록한다...

 

자신만의 득위을 위해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세상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산사랑님

 

어질러 놓은 사람 있으면 청소하는 사람 있듯이..

바위에 써 놓은 낙서를 지우러 다니는 분이다.

 

한 그릇 채울 능력도  안 되면서 자기를 나타내지 못하여 안달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목표를 묵묵히 실천 해 가는 모습에서  우리시대 진정한 영웅으로 부르고 싶다.

 가덕산으로 보이는데  맞는 지 모르겠다.

요즘 촛점이 흐려져서..

^^**

  비단봉

연분홍 치마가 바람결에 휘 날리더라!!

우리 선친의 애창곡이었다.

 외로운 고목 한 구루

세찬 바람 홀로 맞으며 동해를 바라보고 있다.

 지형도

 

빗살무늬처럼 이쁘다.

눈 아래 똑 같은 형태의 지형이 숨어 있다.

심설산행의 독도는 이러한 지형은 이용해야 한다.

겨울은 편서풍이니 눈 결은 당근, 동쪽으로 쓸려 있다.

 덕항산으로 가는 마루금은 운무에 가려있다.

 두문동재

자꾸만 되 돌아 보아도 싫지 않는 것은 수 많은 사람의 영혼과 애환이 깃들여 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카페 회원이신 "왕손"님은 산거북이님의 카페에 올린 함백산구간 산행기의 댓글에 이렇게 화답을 주셨다.

 

"함백산...그곳으로부터 대간의 줄기는 휘어지기 시작한다 하더군요 예전 대 선사들은 반드시 함백산에서 공부를 하셨다 합니다. 혹자는 함백을 거치지 않고는 큰 그릇이 될수 없다고 까지 합니다.우리 나라 산중 그 산세가 가장 원융하기에 그런 마음을 닦기에 가장 필요한 곳이라합니다. 정암사 반대 편 에는 심적사라는 절터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산속 깊이 심적, 은적, 묘적, 원적이라는 4개의 암자가 있었답니다 . 아직 저도 한 곳 외에는 인연이 안다았답니다 언젠가 꼭 모든 곳에 인연이 닫기를 바랍니다 " (귀중한 자료를 공개하여 주신 왕손님께 감사드립니다)

 13:16 

네덜란드에 있을 풍차가 여기에도 있다

ㅎㅎ

 13:53

매봉산(천의봉)


해발1442.3미터의 아담한 산으로 산경표에는 “수다산(水多山)으로 쓰고 있다.

(天衣峰은 “하늘의 옷은 바느질이 없다”라는 天衣無縫에서 온 말로 보이며 水多山은 뜻 그대로 물이 많은 산,

매봉산은 風水地理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매봉산으로 불려 진 동기가  언제부터인지 문헌상 기록을 찾지 못하여 태백군지에 소개하는 내용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천의봉을 일명 매봉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황지동 대명광업소가 있던 아래쪽에 작은 연못이 하나 있고

윗 쪽에 오래된 무덤이 하나 있다.

 

연일 정씨 묘로 금계포란 형국의 명단이라 하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면

 천의봉이 매(鷹)처럼 바라 보이기에 매봉이라 부른 것이다.


 금계포란은 닭이 알을 품는 형상의 명당인데 이럴 때 매의 부리가 이곳 명당자리를 노려보고 있어야 된다는

풍수이치 때문에 인위적으로 천의봉이 매봉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정선총쇄록”에는 이 봉우리가 정암사의 주봉으로 마치 팔뚝을 내밀고 손바닥을 위로 펼친듯하고

시세가 정암사의 수미노탑에 닿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 수다산은 이름만큼이나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신중히 이 산을 맞이하여야 할 것이다.


산 이름이야 하나로 정리하면 끝이지만 이 산이 전 하고 있는 黙言은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사랑하고

보호하여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산에 오르면 “山自分水嶺“이 무엇인지 스스로 가르치고 있다.

이곳에서 두개의 산줄기가 분지하고 세 개의 江이 분수 한다.


산줄기부터 살펴보면

백두산에서 시작되는 백두대간은 이곳에서 두 개의 산줄기로 분지하는데 하나는 백병산을 시작으로 동해안을 따라

부산의 몰운대로 이어가는 낙동정맥이고, 다른 하나는 함백산을 따라 소백산.속리산.덕유산.지리산으로

이어가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이다.


현재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태백산맥이니, 소백산맥이니 하는 산줄기는 태백산에서 분지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태백산의 안내판에도 그렇게 적고 있지만 확실한 분지점을 제시하지 못한 채 막연하게 “태백산에서 분지 한다”라고

 적고 있는 것은 직무유기다. (곰넘이재에서 피재까지 태백산으로 본다면 무방하겠지만 그 사이에는 함백산이 있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걸어 본 사람이라는 누구나 공감하는 천의봉((배봉산)이 분기점이란 것을 알 수 있는 바

올바르게 잡아져야 할 것이다.


또 한 일본인이 지명 해 놓은 태백산맥이니, 소백산맥이니 하는 지명을 버리고 우리 선조들이 지명 해 놓은 산경표나

 여지편람. 택리지 등에 밝혀 놓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등으로 바로 잡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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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누군가  질문한다.

매봉산을 "매"자의 한자표기를 어떻게 쓰냐고~~

이럴 때 참 남감하다.

답할 수 없으니까!

 

내가 아는 한 매봉산에 대한 뚜렷한 한자표기는 없으니까...

사람들이 풀어쓰는 매봉산의 "매"는 매화나무(梅)자를 쓴다.

 

과연 옳을까?

매봉(梅峰)이라 하면 그 뜻 그대로 매화꽃 피어 있는 형상을 닮은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매봉의 뜻은 梅峰과는 거리가 멀다.

 

매와 관계되는 것을 살펴보면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아래를 굽어보며 날으는 매와

먹이를 발견하고 공격을 개시하기 위해 정조준 하는 부리(수리)

사냥감을 먹기 위해 앉자 있는 매의 늠름함.을 뜻 할 것이다.

 

천의봉이 매봉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어떠한 문헌을 찾아 보아도 없었는데(있을지도 모르지만)

정암사를 지을 때 기록에 의하면 매봉산자락에 터를 잡았다는 내용과 태백지에 나오는 (위에서 설명한 연일정시

묘에 관한 내용이 전부이다)내용은 그들만의 이기로 보아 실제로 매봉산이란 이름이 존재하는 지 여부도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굳이 매봉산으로 고쳐 부른다면 한자로는 매응(鷹) 봉우리봉(峰)을 써 "응봉산"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을 것이며

한글식 발음으로 "매봉산"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매화나무(梅)자를 붙여서 쓰는 것은 (억지 춘향) 격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물줄기이다.

이 산에서 분수 되는 물줄기는 백두대간을 따라 속리산에서 분지되는 금북한남정맥 안 쪽으로는 한 강이 흐르고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중앙으로 흐르는 강물은 낙동강이며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동쪽으로는 오십천이 흐른다.

1한강

검룡소에서 발원하는 한강 물줄기는 정선의 아오라지를 지나 남한강을 만들고 금강산에서 발원하는 북한강과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만나서 한강을 만들어 서해로 합수되는 514km의 물줄기를 발원한다.(한강의 길이는 건설교통부 전국하천일람표에는 481.7km로 705개의 유입하천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것은 오대산의 우통수를 발원지로 하여 조사한 것으로 보인다)

 

2낙동강

황지에서 발원하는 낙동강 물줄기는 낙동정맥을 따라 태백시를 지나 경상북도와 남도를 관통하여 525km를 굽이굽이 흘러서 을숙도의 철새도래지는 만들어 놓고 몰운대에서 남해바다와 키스한다.

            

 

-아래는 사단법인 낙동강 보존회에서 조사한 참고자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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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의 발원지(차수)는 1,634곳

 

1486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삼척도호부"편에 "황지(黃池)부 서쪽 1백10리에 있다.

 

그 물이 남쪽으로 30여리를 흘러 작은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가는데 천천(穿川)이라 한다

 

곧 경상도 낙동간의 원류이다.관에서 제전을 두어서 날시가 가물면 기우(祈雨)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1차수(발원산) / m
기점
지도상 길이 / ㎝
실제길이 / ㎞
순위
황지못
합수점
14
3.50
5
태백산 (1,546.5)
합수점
41
10.25
4
함백산 (1,572.9)
합수점
48
12.00
3
금대산 (1,418.1)
합수점
50
12.50
2
천의봉 (1,442.3)
합수점
52
13.00
1


 3오십천

백산(백병산아래)계곡에서 발원하는 오십천물줄기는 통리 미인폭포를 만들어 놓고 태백시과 삼척시를 이어주는

38번국도와 함께 동해바다로 흘러가는 59.5km의 물줄기로 아름다운 협곡은 한국의 그랜드캐년으로 불린다.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검룡소 및 황지는 양 대강의 발원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지역이며 실제적인 발원지는 고목나무샘(한 강) , 너덜샘(낙동강)으로 최근 조사 되었다. (오십천은 낙동정맥 백병산아래 "백산골"로 보고 있다)

 

★ 이 구간에는 낭만이 있다.

두 개의 산줄기와 세 개의 물줄기를 그 명성은 가려져 있지만 차량이 다닐 수 있는 고도가 제일 높은 도로가 있고

추전역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스위치백 철로가 있다.

 

지도상 스위치백 철로구간을 보면 급경사 구간을 극복하기 위해 갈(之)형으로 철로를 만들어 열차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면서 오르는 방법을 말함인데 기술의 발달로 멀지않아 역사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매봉산에서 조망하는 함백산

 백두대간 마루금은 여기에서 휘여진다.

배추밭 개발로 인하여 매봉산을 마루금에서 50m 벗어나 있다.

 

천의봉을 내려올 때 신발속에는 개구리 울음소리 노래를 한다.

스패츠를 착용하였지만 스패츠 속으로 들어 온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바지가랭이 얼어  붙은지 오래이나

움직이는 발가락으로 영향으로 신발속은 물구덩이 되어 발가락 바그락 거리는 소리가 썩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럴 때 김삿갓의 詩 설경(雪景) 한 구절 읆조린다.

..................................................................................................................................................................

飛來片片三月蝶 (비래편편삼월접)

날리는 눈송이는 삼월의 나비 같고

 

踏去聲聲六月蛙 (답거성성유월와)  

눈 밟는 소리는 유월의 개구리 같구나

 

 15:02

낙동정맥과 백두대간이 분지되는 지점이다.

 

구봉산의 아홉굽이를 넘어 백병산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의 마루금을 대할 때 마다 혼자만의 아쉬움을 느낀다.

역사의 기록을 부정한 자로 매맞을 소리인지 몰라도 낙동정맥을 백두대간으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매봉산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굴곡이 너무 심하여

"백두대간 맞어?" 스스로에게 우문을 한 것이 한 두번 아니어서 더욱 그렇다.

 

한반도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무슨 "호랑이그림인가"를 보게 되는데 그 느낌은  가져다 주는 먹이나

 얻어먹으며 쪼그리고 앉아 있는  병들고 늙은 호랑이의 모습이나 재롱부리는 고양이로 보인다.

 

인간은 직립이라 두 발로 걷지만 호랑이는 네 발로 걸을 때 그 위상과 용맹이 나타난다.

척추를 곧게 펴고 용맹스럽고 위엄스럽게 먹이를 사냥하는 늠름한  모습을 보고 싶다.

 

그 것은

낙동정맥을 척추로 세우고 소백산,월악산.속리산.덕유산.지리산과 정맥들을 오장육부(五臟六腑)으로 하여

 날렵하게 먹이를 사냥하는 용맹스러운 호랑이로 만들면 어떻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에서이다.

 

이 사진 찍으면서  아끼느라 써 보지 못하는 안경을 처음으로 꺼냈다가 잃어 버렸다.

용케도 주으신 분은 아껴시기 바란다.

 풍력발전기.

한전의 시설물이고 여기에서 생산되는 전기는 이 지역에 공급된다.

 낙동정맥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내려서니 매봉산으로 출사길에 나선 차량들이 왕래가 빈번한 도로를 따르다

 삼수령300m터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서 산 길로 접어 들어 피재에 도착하니 우리의 애마 기다리고 있다.

 15:30

 

피재(삼수령)

건의령으로 가는 길을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에서 산행을 마감한다.

시간당 1km를 진행하지 못하는 어려운 러셀이었다.

 

우리보다 6섯시간이나 늦게 출발한 다른팀들과  하산시간은 같았으니 세상사 모두가 그렇게 흘러가는 가 보다.

 

 ★

연동과 적각동 경계에 있는 높은 고개로 천의봉 동북편에 있다.

 해발 920m정도 되는데 35번 국도가 지나가며 포장이 되어 있다.


옛날부터 황지지역이 「이상향」이라하여 시절이 어수선하면 삼척 지방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이 고개를 넘어 왔기에

 피난(避亂) 온 고개라는 뜻이며 피해 오는 고개라는 뜻이다.

 

또한 피재를 피산장등(彼山長嶝)이라고도 하는데 피안(彼岸, 이상향, 고통이없는 理想境)으로 가는 큰 산등이란 뜻이다.


직치(稷峙)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피재를 한자표기로 하는 과정에서 피직(稷)자를 쓴 것이다.

 70여년 전 봇짐장수와 등짐장수(褓負商)들이 세운 산령각(山靈閣)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태백군지-

 

이 번 산행후기는 생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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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요구에 불응할 것을 상소(斥和의 上疏)하였으나 "형제지국의 관계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바꿀 것과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청나라의 연호를 쓸 것을 강요한 청나라의 요구에 和親을 한 것에 분개하여

蛟龍山(남원 수지) 자락 장동에 은거한 鹿友亭 金光玉의 누정(현판이나 액자에 담은 글)詩 한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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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獐洞에 들며...

 

老去身何托

늙어 가는 몸을 어디에 의탁하랴
棲來地一丘

머무를 곳 찾아오니 이 언덕이구나.
山禽忘俗事

산새는 세속의 일을 잊게 하고
野鹿伴人逝

들 사슴은 사람과 짝하여 노는구나.
天豁層峯聳

열린 하늘로 산봉우리 층층이 솟아있고
林開晩霧收

숲을 열리니 저녁 안개가 걷히는구나.
瀑聲喧鶴洞

폭포소리는 학 마을을 울리는데
朱夏亦成秋

여름은 역시 가을을 불러오는구나.

 

 녹우정 김광옥은 김수은(김춘한)의 9세손이며 本은 경주金이다.

 녹우정의 9세손이며, 김수은의 19대 자손이라 조상들의 피를 이어 받아서인지

나 또한 산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출처 : 운해의산방
글쓴이 : 운 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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