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08년 04월05일(음력: ) 날씨 :맑음
산행지: 백두대간 북진 29구간(피재~연칠성령)
산행자:홀로
산행코스: 피재(삼수령)~노루메기~건의령~구부시령~덕항산~환선봉~광동댐이주단지(배추밭)
~큰재~댓재(죽현)~햇댓봉~통골~두타산~청학산~연친성령(비박)
산행거리“36.5km, 산행시간. 16시간36분
개요
지난 28구간 산행기에 피재에서 건의령까지 정리하였으니 29구간의 나머지 부분은 “산행글“에서 중요한 지명과 유래를 정리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개골산(금강산)들어 麻衣草食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사연에 대해 풀어쓰기로 한다.
백두대간 산행기에 자료도 분명하지 않은 천 년 전의 이야기를 쓰느냐에 대한 따가운 눈초리를 받을 수도 있으나 망국의 한을 품고 이 길을 걸어 금강산으로 산 왕자의 가슴시리는 족적을 따라 가 보는 산길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에서이다.
천왕봉을 시작으로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따라 진행 해 온 나의 山情(정취)은 유난히도 다른 느낌으로 이 길을 밟아 왔기에
선조들의 애환이 깃 들어 있는 이 길을 또 다시 밟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움찔 놀라곤 한다.
아흔아홉골 지리산에 숨어 들어던 인민군(빨치산)들을 소탕할 목적으로 불을 놓아 민둥산이 되어 버린 재석봉의 황량한 비탈에 외롭게 서 있는 고사목(불에 타죽은 주목나무)을 통해 전해지는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운봉의 여원재를 넘어올 때는 임란 때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 이성계의 가슴 후련한 이야기가 있었고 십중지 중의 하나인 운봉고원이 있어 아늑함을 느꼈다.
봉화산줄기를 걸어 올 때는 한을 토해내는 동편제의 가락에 맞춰 한민족의 가슴을 후련하게 씻어주는 흥부전의 판소리가 있었는가 하면 무릉고개 넘을 때는 국방군의 장교와 빨치산여인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있었다.
육십령 재 넘어 올 때는 왜장을 끌어 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의 의절이 신분이 기생이었다 하여 고향 땅(장수군 대덕리 주촌)에 묻히지도 못하고 타관객지 서상 땅((함양군 금당면 방지리 산31-2)에 묻혔는데 세월이 바뀌어 소유권를 주장하는 함양군과 장수군의 싸움에 지금도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하고 있는 논개가 환생한다면 그 작태에 어떠한 호통을 칠지 내심으로 궁금하다.
육십령의 도적이야기와 덕유산을 넘어서 대덕산을 지나고 추풍령에 이르면 구름도 쉬어 간다는 남상규의 노랫말에 흥얼거려 보고 중화지구대를 넘어 속리산에 이르니 백두대간의 초안을 잡아 낸 성호사설의 “이익“선생와 십승지를 완성시킨 택리지의 이중환의 이야기속에 대권터산을 무대로 후삼국을 꿈을 꾸었던 아자개와 그의 아들 견훤의 이야기을 시작으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거머쥔 세조에 의한 조선시대의 역사가 고스란히 펼쳐 졌었다.
지름티재 넘어올 때 일전을 불사했던 봉암사스님과의 만남은 불쾌하기 이를 데 없었고
관음세계와 미륵세계를 넘나드는 계립령 아래에 남북으로 마주보고 미륵사지터와 덕주사의 전설에 나오는 망국의 왕자 마의태자와 덕혜공주 남매의 애타는 사부곡은 우리를 슬프게 하였다.
불교의 전설이 가득한 소백산의 부드러운 산줄기를 넘을 때 천리행군에 나선 공수부대원들과 함께하였던 시간도 하나의 추억거리요 단군대왕의 비사를 들을 때는 비분강개 하였으나 해학과 풍자로 일생을 살다간 김삿갓의 기구한 운명에 울다 웃다 하면서 궁예의 훈련지였던 남대리 지날 때 젊은 날 기상을 다시 한 번 느꼈었다.
곰넘이재를 넘으면서부터 바뀌기 시작하는 고려시대의 역사는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느꼈던 근대사와 조선시대의 역사를 뒤로하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니 타임머신타고 1000년 전으로 여행을 떠 나게 된 느낌이었다.
한문으로 이두문자화 되어 버린 지명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해 져 오던 순수 우리말 지명이 곳 곳에 남아있어 다정다감으로 다가오고 두문동을 지날 때는 아우라지 물줄기를 타고 심금을 울려주는 정선아리아의 장단에 고려충신의 충.의.효를 배울 수 있었으니 대간길이 주는 고마움 어떻게 표현할까?
영남은 물론이요,강원도와 충북지방 일부와 .서울,경기,인천까지 우리의 젖줄인 3대강 물줄기가 발원되고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분지하는 천의령에 올랐을 때 감격은 지금도 흥분으로 떨려 온다.
///////////////////////////////////////////////////////////////////////////////////////////////////////////////
이쯤에서 마의태자의 이야기를 풀어쓸까 한다.
마의태자는 신라 경순왕 3남1녀 중 장자로서 죽방부인 박씨가 어머니이다.
일부 기록에 경순왕은 9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나타나는데 나머지 분들은 고려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의 소생이다
우리가 배웠던 마의태자에 대한 문헌은 극히 일부가 전해지기 때문에 그의 행적에 대한 자료가 미비하여 “망국의 한을 안고 계골산에 들어가 麻衣草食으로 일생을 마쳤다”라는 기록만 남아 있어 경주김씨 수은공파 유사에 전해 져 오는 내용 중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피를 토하는 마지막 설전을 여기에 남긴다.
두 사람의 설전을 말하기 전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대략적으로 아래와 같다.
견훤의 침략으로 경애왕이 살해(일부자료에는 견원의 강요에 자결한 것으로 되어있음)당하고 경순왕이 즉위하나 신라의 운명은 이미 견훤에 의해 지배되는“풍전등화”의 신세라 신흥세력인 고려와 “화친”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신라는 왕건에게 나라를 맡기기로 하고 어전회의를 주재한다.
경주김씨 유사에서 전해 져 내려오는 어전회의 내용 일부를 발췌하여 옮겨 적는다.
이 글은 慶州金氏遺事 7쪽에 있는 원문의 내용을 풀어 적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61호로 지정된 경주 김씨 보판각은 모두 314판(板)이 보존되어오고 있는데 신묘보(辛卯譜, 1711년) 79판, 무인보(戊寅譜, 1758년) 45판, 정사보(丁巳譜, 1797년) 142판, 수은실기(樹隱實記, 1824년) 판각(板刻) 30판, 신묘보(辛卯譜) 서(序) 8판, 무인보(戊寅譜) 서(序) 10판 등이며 이 중 26판이 파손된 상태이다.
마의태자의 마지막 생애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의 說話가 있으나 수은공파 족보에 나타나는 내용 중 아버지와 이별하는 마의태자는 그를 따라 가겠다는 두 동생에게 아버지를 보살 펴 드릴것을 지시하는데 2남 “굉”은 출가를 하였고 3남 “명종”은 고려에 귀순한 경순왕이 왕건의 뜻에 따라 낙랑공주와 결혼하고 정승공에 봉해 져 신라를 경주로 고쳐 식읍으로 받은 아버지를 모시고 효도를 다하고 후대를 이어 가니 그들이 바로 경주김씨 영분공파 자손들이다.(마의태자에 대한 기록 중 수은공파에 전해진 내용의 일부로 경주김씨 전체 문중에 해당하지 않은 자료임을 밝혀둔다)
지나 간 역사적 사건들이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 해 주고 있다.
견훤이나 궁예, 이성계처럼 피를 흘리며 나라를 찬탈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백성들을 위해 천년사직을 고려에 넘겨 야 했던 경순왕의 비통한 결단!
싸워보지도 않고 천년사직을 넘겨야 하는 아버지와 설전을 벌이는 젊은 왕자(마의태자)의 피를 토하는 절규!
그리고 귀순하는 경순왕을 받아드려 큰딸(낙랑공주)과 결혼시키고 식읍을 주어 패자의 아픔을 안아주는 왕건의 정치!
오늘날 우리가 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 들이다.
진행도
「빗물의 운명」
하늘이 열리고 우주가 재편된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명으로 빗물 한 가족이
대지로 내려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 빗물 한 가족은 한반도의 등마루인
이곳 삼수령으로 내려오면서 아빠는 낙동강으로 엄마는 한강으로
아들은 오십천 강으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반도 어느 곳에 내려도 행복했으리라
이곳에서 헤어져 바다에 가서나 만날 수밖에
없는 빗물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이곳 삼수령만이 전해주고 있다.
-피재의 있는 시비에서 옮겨 적다-
.................................................................................................................................................
산행글
피치못 할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단했던 29구간을 이어 가기 위해 4일밤 청량리역에서 강릉행 22시40분
무궁화호를 이용 해 태백에 내리니 익일 03시08분이다.
출발할 때 랜턴을 준비하지 많아(요즘 건만증이 심하다) 생각 끝에 곧 장 들머리로 향 하지 못하고 태백골해장국집에
들려 선지국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근처의 PC에서 시간을 보내다 06시10분 피재 가는 버스편을 이용 하기로 한다.
버스를 이용 해 피재(삼수령)에 내리니 제법 훈훈한 봄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히며 반겨주고 지난 2월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삼수령비와 빗물의 운명 詩碑" 그리고 팔각정은 그대로 있는데 나만은 혼자인지라 낙엽 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갈참나무의 모습과 동격이라......왠지 쓸쓸함을 느낀다.
그래도 봄이 오고
새순 돋 아나 녹음이 우거지고 열매 맺어 씨앗을 거두는 그 날을 기다리며 겸손한 마음으로 산 길에 녹아 들 것이다.
태백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06시10분행 버스를 이용 해 삼수령에 도착하여 곧 바로 산행을 시작하니 06시20분이다.
전란을 피해 태백으로 피난(避亂)가던 고개에서 유래 된 “피재”라는 명칭은
이제 삼수령으로 지명이 바뀌어 머지 않아 피재라는 지명은 우리에게서 잊혀 져 갈 것이다.
이 곳은 세 강의 물줄기가 분수하는 곳이라 삼수령이라 하지만 매봉산(천의봉)에서 분지하는 낙동정맥이 있어
산맥 체계 상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천의봉(매봉산)
산경표에는 "수다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천의봉 아래 1145봉에서 작은피재 (산경표에는 “파탄현“으로 표기되어 있다)을 넘어 남하하는 낙동정맥을 산경표에서는 “정간”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명칭부여(대간의 한 줄기로 볼것이냐 하는 문제)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지금은 낙동정맥으로 표기하고 있다.
06:50분 육백산에 떠 오르는 일출
백병산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의 마루금에 있는 아홉 봉우리의 구봉산 줄기를 따라 수 천평이나 되는 늪이 있는데 이 곳이 천하의 명당이라 풍수가들이 줄겨찾는 곳 이며 늪통(큰늪)이라 부른다.
늪통의 윗 쪽 산비탈 아래에는 절벽처럼 각이 져 이름조차도 부르기 힘든 된각리(한자는 돈자를 빌려와 敦角里로적는다) 적각리(赤角里)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고 산비탈에는 사슬밭(한자로 “沙瑟田” 또는 ‘沙室田“으로 쓴다)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다.
저 속에 적각리와 사슬밭리가 있다.
산비탈에 큰밭을 만들 수 없었기에 햇살이 드는 양지편 둔덕 평평한 곳을 골라 옹기종기한 밭들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던 곳이라 하여 사슬밭이라 했으니 곡예 하듯 비탈길을 오르며 농사를 짓던 화전민들의 질곡의 삶이 묻어 나오는 이러한 곳을 지나가며 한가로이 웃고 떠들며 지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예의는 아닌 것 같다.
07"03분
피재에서 노루메기까지 가는 길은 삼수령탑 옆에 있는 도로(이 도로는 노루메기에서 마구금과 만나게 된다)를 따라 갈수도 있으나 마루금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삼수령탑과 팔각정 사이의 능선으로 올라야 한다.
이곳을 올라 내림 길이 시작되면 곧이 어 피재와 연결되는 도로를 만나는데 도로에서 우회전 하여 100여 미터 진행하다 왼쪽의 능선으로 접어들어 up and down이 계속되는 지루한 구간을 2시간여 동안 진행하여 건의령에 닿을 수 있다(길은 외 길이므로 노루메기에서 임도길만 주의하면 되는 구간이다)
삼수령에서 진행하여 시멘트 임도를 만나 100미터 진행한 후 노루메기에서 좌측으로 진입.
★야간산행시 독도에 주의해야 함
노루메기
목루목~노루목이~노루메기로 변형되었다.
한자로는 노루장(獐) 목덜미항(項)으로 쓰며 풍수지리산 노루의 목 부분에 해당한다고 하여 노루메기
(노루가 지나다니는 길목 또는 산이 막히는 막다른 곳)라 한다.
이러한 지명을 전국에 걸쳐 어려 곳이 있으나 대부분의 표기는 “노루목”이나 “노루목이” 또는 장항(獐項)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노루메기(이 지방 사투리로 보임)로 표기하고 있다.
어원을 살펴보니 이렇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반포하기 전까지 우리는 한문에 의존해야 했다.
한자가 들어오기 전 까지 구전(口傳)으로 살아가던 시대가 있었다.
口傳(말로 전하여짐)으로 전하여지던 순수 우리말 땅 이름이 한자식으로 바뀌기 시작한 유래는
신라 문무왕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는 제30대 문무왕8년(668년)에 삼국을 통일하여 통일신라시대를 열었으나 고구려·백제의 잔존문화로 인하여 국력을 배양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그 때는 우리의 고유문자가 없어 곤란을 겪고 있다가 당나라에서 漢文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삼국통일 후 신라는 문무왕(678년) 9주5소경제의 근간을 마련하고 신문왕5년(685년)에 9주5소경제로
국가를 재정비하게 되고 35대 경덕왕16년(781년)에는 재정비 된 행정구역에 지명변경을 단행한다.
구전으로 전하여오던 순수 우리말 지명에 한자를 빌려와 그 소리(음)과 뜻(훈)으로 2자를 원칙으로 지명을
바꾸다 보니 본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한자의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시대 역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으나 땅이름은할미산=노고산(老姑山),모래내=사천(沙川),
애오개=아현(阿峴), 삼개=마포(麻浦) 등 한자로 표기하기에 바빴다.
이렇게 표기한 문자를 “이두문자(吏頭文字)”또는“향찰(鄕札)”이라 한다.
예: 밤나무골=慄谷. 양달말=陽地村, 노루목이=獐項 등이 이에 속하는 말들이다.
아쉬운 점은 한글이 창제 된 후에 이두문자화 된 한자지명이 그대로 사용되어
구전으로 전하여 오던 순수 우리말이 대 부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07:46분
다행이 노루목이(여기에 나오는 “노루메기”는 노루목이“의 변형으로 이 곳 지방의 사투리로 보인다)나 새목이(조항),큰말 등 순수 우리말이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삼국사기나 기타 고전 등이 더욱 연구되어 순수 우리말 지명이 되찾아 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이름 없는 산 꾼의 메아리를 전할 뿐이다.
건의령(07:57분)
동쪽 50여 미터 지점에 있던 “白人敎君子堂”이라고 하는 당집이 있었다.
건의령을 넘다들던 사람들에 의해 산신제를 지내는 당집으로 지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백인교군자당은
고려인들의 설화까지 추적할 수는 없지만 오래전부터 세워 져 있었다는 확신만 가질 뿐이다.
현재 白人敎君子堂는 철거되고 없지만 수백년의 세월을 간직한 듯 허물어져 가는 건물에 누군 가 촛불을 켜 놓고
술잔을 부어두었던 2006년 남진 때 기억이 새롭다.
구부시령에서 조망하는 상사미동은 수태극을 그리고 있다.
이곳에는 나에게 있어 또 다른 각별한 인연이 있다.
그 당시 저녁노을님을 이곳에서 처음으로 만나 지금까지 연이 이어지고 있으니 대간길이 맺어 준 귀중한 인연이라 할 것이다.
구부시령(九夫侍嶺)10:39분
팔자가 기구한 어떤 여인이 아홉 남편을 모시고 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 된 구부시령이다.
함께 살다가 죽어 간 남정네들도 그렇지만 밤 사이 죽어 간 아홉송장을 파 묻어야 했던 여인네의 한은 무엇일까.
에궁~
새목이
이두문으로 조항(鳥項)으로 풀어 쓴다.
다행이 우리말로 전해지고 있어 한결 마음이 좋다.
예전에 삼척사람들이 화전밭을 일구기 위해 태백(하사미)으로 넘어 오던 산이라 하여 "덕메기산"으로 불렸으나 이두문자 표기로 덕항산(메기=목덜미(項)으로 바뀌었다.(참고로 환선굴이 있는 방향에서 덕항산이나 환선봉 오름길은 직벽에 가까우나
백두대간의 마루금에 올라서면 서쪽(광동댐방향)으로 화전을 개간할 신천지가 펼쳐진다)
덕항산정상에서 북쪽방향100m지점에서 환선굴로 내려서는 등로가 있다.
석회암으로 되어 있는 덕항산은 환선봉과 나란히 하여 양쪽 사면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동쪽의 산자락은 화전을 일구어도 될만한 평펴짐한 지형이지만 동쪽의 대이리 방향을 직각을 이루는 산세를 되어 있으며 계곡의 초입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굴(환선굴,관음굴,사다리바위굴,양터목세굴,덕밭세굴,큰재세굴)등이 있다.
자암재 가는 길은 잔설이 남아 미끄러운 등로가 발걸음을 붙 잡는다.
자암재(12:35)
두 개의 지명을 가지고 있어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그러나 환선굴이 있는 대이리쪽에 "장암목이"라는 마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암재"의 표기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광동댐이주단지로 갈 수 있으며 마루금에 복귀할 수 있다.
환선봉(11:51)
환선굴에서 유래한다.
여기!
버려진 지극산이정표는 어디를 말하는지 정확한 위치가 없을 뿐 더러 이정표 역시 다른 곳에서 옮겨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나름대로 생각 해 보건데 광동댐이주단지 배추밭의 정상을 지극산(1058.7)으로 생각하지만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나의 판다이 흐리지 않다면 정확할 것이다.
(여기서 생각 해 볼건 대...농사철이면 밤낮 없이 일하는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등산복이나 입고 그 들의 소중한 삶터를 휘젖고 돌아다니는 것이 꼴 사나웠을 것이다.서로가 조금씩 양보하여 상부상조 했으면 좋겠다. 산님들은 벌목선 따라 진행하되 밭으로 진행하지 말고 이 곳의 주인들도 긴 안내 해 주어 서로가 줄거운 옷깃이 스쳐가는 인연이기를 바란다)
일부 사람들은 지각산과 지극산을 혼동하지만,
지각산은 일명(찌걱산)이라고 하는 Y자형태의 산으로 Y내경를 향해 돌진하는 산줄기 하나가 저돌적인 기세라 보는 이로 하여금 이상야릇한 감흥을 불러 이르키게 한다.
그래서 광동댐이 들어서기 전 까지 수려한 계곡을 자랑하던 이 곳의 안부에서 길 가던 남녀가 우연히 마주치게되면
그냥가지 못하고 꼭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한다.
(하였든 보기만 해도 얼굴빨개지게 하는 기묘하게 생긴 지형이다)
귀내미골
현재 광동댐 이주민의 거주지를 이름이다.
정감록에 이르기를 귀내미골이 이상향(무릉도원)으로 가는 길목이라 했다.
귀내미골은 우귀(소귀)의 이두표기인 牛耳嶺(토정 이지함은 牛耳間으로 보았음)으로 되었다가
"귀넘이" →"귀내미"로 변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큰재(14:04)
독도에 주의해야할 곳!
황장산 가는 길
황장산
임란으로 경복궁이 전소되었을 때 이 곳의 목재(소나무)인 "황장목"으로 중건 하였다고 하여 "황산산"이라 한다.
댓재 이정석보다 더 멋있어 보인다.
댓재휴게소와 노석사장님,
남해의 정병훈선배님과 인연이 있는 분으로 산꾼들을 위한 정성이 대단하신 분이다.
이 곳에서 모든 것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숙박도 포함하여,,
나 또한
밥 먹고(라면과 밥)
막걸리 마시고
한산님이 맏겨 놓고 간 랜턴도 찾고 하여..
두타산으로 갔었다.
.
청옥산에서 한산님 만나서 비박하기로 하였으니...
그러나
그 길은
처음으로 느껴 보는 공포와
고통의 연속이었다.
댓재
산경표에는 죽현으로 표기 되었다.
대나무나 많다고 하여 죽현.또는 죽치령으로 부르는 이 고개는 영동(강릉지방)과 영서(원주지방)을 연결하는
고개로 2차선 포장도로가 1984년도에 개통되어 많은 차량이 왕래하고 있다.
댓재에서 출발하여 연칠성령 비박장소까지 이어 지는 산행 글은 다음 날 원방재로 하산하는
29-2구간에 포함시켜 기록하기로 하고 29-1구간기록은 여기에서 정리한다.
22시36분산행종료
[스크랩] 백두대간의 꿈! 원방재에서 삽당령까지-북진30-1구간- (0) | 2008.04.23 |
---|---|
[스크랩] 백두대간의 꿈! 댓재에서~백복(봉)령까지 -북진 29-2구간- (0) | 2008.04.11 |
[스크랩] 백두대간의 꿈! 두문동재에서 피재까지 -북진28구간- (0) | 2008.01.29 |
[스크랩] 백두대간의 꿈!화방재에서 두문동재까지 -북진27구간- (0) | 2008.01.21 |
[스크랩] 백두대간의 꿈! 곰넘이재에서 화방재까지 -북진26구간- (0) | 2007.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