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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두대간의 꿈! 댓재에서~백복(봉)령까지 -북진 29-2구간-

㉥ 백두대간 記

by 운해 2008. 4. 11. 11:39

본문

 

일시:2008년 4월 06일(음력:03/01) 날씨:맑음

 

산행지: 백두대간 북진29-2구간(연칠성령~원방재)

 

산행자:한산님과 동행 


산행코스:댓재~햇댓등~두타산~박달령~청옥산~고적대~갈미봉~이기령~상월산~원방재~부수베리


도상거리:13.25km   어프로치:3.4km

 

산행거리:16.65km, 산행시간 :7시간31분


개요


이 번 구간은 해동삼봉으로 불리는 청옥산,두타산, 고적대를 포함한 댓재에서 백복령까지 이어가는 구간이다.


이 구간은 대간꾼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구간의 하나로 많은 체력소모와 인내심을 요구한다.


구간 별 지명에 대한 유래는 산행 글에서 풀어쓰기로 하며 여기서는 두타산에 은거한 고려후기 때 문인이자

정치가였던 동안거사 “이승휴“에 대해 열거 해 보기로 한다.


제왕운기를 집필한 이승휴는 고려 고종11년(1224년)에 태어나 76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日生의 대 부분을

두타산 아래 구동마을의 外家에서 보냈다.


이승휴는 고려왕조에서 파직당한 후 외가로 돌아와서 기거하면서 집이름을 도연명의 귀거래사 한 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짓고 제왕운기(帝王韻紀)와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하기 시작 하였다.


<삼국유사>와 함께 우리민족을 단군의 자손으로 규정한 사서(史書)로 유명한 제왕운기는 상하2권1책으로

상권에는 중국의 역사를 쓰고 하권에는 고려의 역사를 기록 하였다.


제왕운기의 위대한 점은 우리나라를 중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보았으며, "단군"을 우리민족의 시조로 내세워

단일민족임을 강조하였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최초로 사용하였다.


아울러 “발해사”를 "우리민족사"에 포함시켜 중국의 문화와 다른 독창적인 문화를 강조했는데,

사대주의를 표방하던 당시의 분위기속에서 중국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를 동등한 위치에서 보았던 것에 대해 

이승휴를 투철한 민족정신을 가진 선각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저술한 후 容安堂 남쪽에 보광정을 건립하고 표음정(飄飮亭)이란 샘을 만들고

지락당(知樂塘)이란 연못 위에 정자를 짓고 살다가 용안당의 편액을 간장사(看臧寺)로 바꾸어 달고

모든 재산을 불가에 희사하니 그의 나이 71세 때 이며 그로부터 5년 후 76세에 세상을 졸한다.

29-2구간 진행도

 

산행글

 

피재에서 댓재로 산행 중

환선봉을 지날 쯤 댓재~백복령구간 보충산행을 하기 위해 삼척에서 들머리로 이동하고 있다는 한산님의 전화를 받는다.고적대 근처에서 비박을 하겠다는 이야기에 랜턴이 없어도 될 것 같아  댓재휴게소에 맏겨주고 갔으면 좋겠다고 하니 선뜻 승락하여 나의 나머지 구간 이어가기는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끼지만 댓재(15:56분)에 도착하여 컨디션을 보아가며 민박이나 진행여부를 결정하기로 한다.

 

댓재휴게소에 들려 라면에 밥 한공기 넣어 때 늦은 요기를 하고 막걸리 한 병에 노식사장님과 한 시간여동안 대화를 나누면서켠디션 여부를 점검 해 보니 고적대까지 진행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어  여기에서 숙박하기로 결정 내리는 순간 한산님의 전화가 온다.

 

통골재를 지나고 있는데 고적대까지는 시간 상 늦을 것 같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청옥산 정상 아래 50여미터 지점에 물이 있으니 정상부근에 텐트를 치면 나 역시 그 곳으로 가겠다고 약속하면서 시간이 있으니 쉰음산을 다녀오라 말하고 17:23분 청옥산을 향해 산행을 시작하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청옥산까지 가는 것은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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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재(竹峙·810m)

 

큰 산줄기를 넘어가는 고개의 의미인 “대고개”가 변음 되었다.

고지도에는 “죽치(竹峙)“로 표기하였는데 이 것은 ”대“를 대나무를 뜻하는 ”竹“의 훈(訓)을 빌려 쓴 것으로 보인다.


대동여지도 등에 댓재의 서쪽에 죽현전, 죽령현이 표기되어 있고, 고구려 때는 죽현현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죽령현”으로 개칭 되었다.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 까지는 죽현~죽령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는 “죽치”로 불렸고

구전으로 전해 져 온 우리말은 "대고개→댓재"로 불려 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여관인 죽원(竹院)이 하장면 원통에 있었다)

산신각( 山地神)

 

 햇댓등 초입인 댓재에 있으며 두타영산지신(頭陀靈山地神)이라는 신위를 모시는 산신각으로 조선시대에는 쉰음산 정상부근에 있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온 것이다.

 

 제사터

 

산신각에 제사를 지낸 후 이 곳에다 사자밥 등을 놓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햇댓등 정상오르기 전 7부능선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 있고..
이들은 하나 같이 정상(東)방향 15도각으로 기울어 져 있는데  풍향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풀 잎도 동쪽을 향해 기울어 져 있다.

 

이러한 모습은 산행시 독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를 하는 것으로 야간산행자는 필히 숙지해야 될 것이다.

가을~겨울에는 편서풍이나 북풍이 불고 봄~여름에는 동남풍이 불기 때문에 풀잎이 바람결 따라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방향을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이끼는 바위의 북사면에 자라고 나무가지는 햇빗을 받는 동쪽방향으로 긴 가지가 뻗어 있다.

윗 사진은 겨울을 지난 흔적으로 풀잎이 동쪽으로 누워있으니 방향은  동쪽이 된다.

 

그 밖에 달이 떠 있는 모습이나 해의 위치 및 그림자의 위치로 방향을 가름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햇댓등
 
 괴상한 지명이다.
 마루금은 10시방향으로 휘여지므로 독도에 주의해야 하는 곳이다.
                                                               청옥산의 석양

 

햇댓등

 

햇댓등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산신각에 빗대어 나름대로 풀어 보는 내용은 이렇다.

산신각에서 산신제를 지낼 때  山神이 강신하기 가장 좋은 곳에 횟대를 세우고 山神을 맞이하는 의식을 치뤗는데 여기서 말하는 횟대란  대나무(生竹)를 말하며, 두 개의 대나무를 잘라서 통째로 세우고  꼭대기에 오색천을 걸었다.

 

횟대는 경상도와 이북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햇대"로 변음된 사투리로 "햇댓등"의 지명은  "댓재"와 합성하여 "햇댓"이라 한 것으로 보이며. 등(登)은 산줄기에서 전망하기 좋게 뛰어 나온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두타산과 청옥산은 물론이고 주변의 산군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이상적인 곳으로 보아  세 곳의 뜻을 합성하여 "햇댓등"이라 지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명주목이

 

명주목이는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에 속하는  여러 마을 중  하나이다.  

명주목이(고개)의 원래 이름은 "데바지령"이며, 그 뜻은  삼척지방을 넘나들던 고개로 협소한 계곡의 지류를 따라 오르기가 힘들었다는데서 유래하였다.

목통령(木通嶺)

 

19:07

번천으로 유입되는 통골재에서 구룡소로 넘어가는 고개로 통골재로 불리기도 한다.

어둠속에 묻혀가는 조릿대 구간 

동쪽에는 삼척시의 야경이 황홀하다.

 1243봉을 트래버스하는 우회구간은 잔설로 덮혀 있다.

 

두타산 가는 길에 mp3에서는 정선아리랑 무심편(미방)의 한 가락이 심금을 울려준다.

..........................................................................................................................

높은산 정상(頂上) 말랑에 단독이나 선나무
날과야 같이로만 외로이만 섰네.

바람이 불고 불어서 쓰러진 나무는
눈비가 오신다며는 일어날 수 있나.

명사십리(明沙十里) 해당화는 명년(明年)이면 피지만
한번가신 우리님은 언제나 오나.

나비없는 강산(江山)에 꽃은피어 무엇을 하며
님이 없는 이 강산에 돈 벌어 무엇허나.

명사십리(明沙十里)해당화야 꽃진다고 슬퍼말아라
공동묘지(共同墓地) 가신 낭군은 명년(明年)에도 못온다.

......................................................................

아리랑~아리랑~~아라리~~요~~~

 

두타산(頭陀山·1,352.7m)

 

“머리를 흔들어 번뇌를 떨쳐 버리고 수행 정진 한다“ (두타행)

두타산의 지명 유래이다.


두타산은 청옥산.고적대와 함께 "해동삼봉"으로 불리는 명산으로 부처의 와불을 연상시키는 산으로 고적대에서 Y계곡을 이루며 발원하는 물줄기는 쉰음산을 돌아 오십천으로 흐르는데 그 곳을 무릉계곡이라 일컫는다.


무릉계곡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무릉반석.용추폭포와 사람의 손길에 탄생한 두타산성과 천은사.삼화사.관음사.등이 있다.


두타산에서 쉰음산 줄기를 분지 시키는데 山頂에 50개의 우물이 있는 산이라 하여 “쉰우물산“ 또는 ”오십정상“이라 하여 신성시 했고 조선시대에는 정상부근에 두타산의 산사를 지어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지금도 무속인들이 치성을 드리는 산으로 유명하다.

 

20:24분

따뜻한 봄기운으로 녹아 내리는 잔설을 밟아가며 진행하는 산행길은 이 곳을 지나간 한산님의 발자국만 유일할 뿐!

어두운 길목에 장애로 등장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길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고약한 지대를 지나 두타산 정상에 이르니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결 따라 나무들끼리 부딪치며  휘리~릭 거리는 소리는 전설의 고향에서 귀신이 나올 때  깔리는 음악처럼 소름돋게 하지만 정상에 있는 이름모를 무덤이 이상하게도 안정감은 가져다 준다.

 

사실

2006년도 남진할 때 기억으로 다시 이곳을 찾을 때는 무덤에 술한 잔 따르올리기로 약속하였는데 오늘에야 그 약속을 지킨다.

어떤 이유 때문에 천미터가 넘는 산정에 홀로 누울 사후세계의 잠자리를 만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전에는 한적함에 쓸쓸 했을 것이고 요즘에는 수 많은 등산객들의 발자국과 떠 드는 소리에 잠 못이루리라...

 

무덤과 작별을 고하고 박달령으로 내려가는 직사면에 가까운 등로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에 등로를 놓치기를 수십 번 우왕좌왕하며 박닥령에 도착하니 신발속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 요란하여 벌써 경칩인가?

하고 홀웃음 지어 본다.

박달령(朴達嶺)

 

“밝달“에서 온 말로 ”밝”은 광명을 비추는 높고 큰 산을 의미하고 “달”은 산과 들을 뜻하는 말로 청옥산과 두타산을 합하여 광명을 주는 맑고 큰 산이라 하여 두 산을 연결하는 안부를 박달령으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밝달→박달)

 

21:22

박달령에 도착 했을 때는

길들려지지 않은 등산화 때문에 발 전체의 통증도 체력적 부담에 한 몫 했지만 여기까지 진행 해 오면서 크래바스 빠지며 소모한 체력때문에 한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다행히 청옥산까지 얼마 남지 않했기에 충분히 갈 수 있으리라 여유를 가져 보지만 한산님과 전화통화는 불통이고 댓재 휴게소에서 준비한 물까지 가져오지 않아 아스피린 먹을 때 소주로 대신하니 이렇게 황당할 수가 있을까?

 

청옥산 가는 길 트래버스하여 마지막 800여미터를 남겨놓은 산줄기 오름길을 바닥이 나 버린 체력으로 5m진행하다 쉬고..

한 시간이 넘는 사투끝에 운동장처럼 넓은 정상에 도착 큰 대(大)로 누워 버린다.

 

그리고  잠 들었나 보다.

                                                                                       청옥산    
            

22:36분

 

세상 사

그렇게 편할 수 없었고...

하늘에서 쏟아 지는 수 많은 별을 보노라니

 북두칠성이 눈 앞이라 하나 둘 세어 보다가

한 없는 나락으로 떨어 져 간다.

......

아빠!

"가지말아요"

 소리치며 따라오는 아이를 떼여 놓으려

허공속을 허우적 거리다 눈 떠 보니 꿈결이라...

 

깜짝놀라 일어 나려고 애 써 보지만

바지자락은 얼어 있고

젖어 있는 있는 상체는 움직여 지지 않더라..

 

있는 힘 다해 전화기 꺼 내어 한산님께 전화하니

눈 위에 텐트를 칠 수 없어서

 연칠성령까지 내려가 텐트를 쳤다고  하니

...........

더욱 더

 난감 해 진다.

 

그래도 살려면 어쩌랴...

베낭 속 수지침 꺼내서 허벅지 찌르고 ...

야단법석 끝에 청화산의 북사면을 굴러가다 싶이 하여 연칠성령에 이르니

 베이스캠프 불 빛이 보이고..

 ............

한산님의 도움 받아

 젖어 있는 옷 홀랑 벗어버린 몸으로 침냥속으로 들어 가니

곧 바로 꿈 나라다..

청옥산 (靑玉山·1,403,7m)

 

고지도에는 두타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지금의 두타산보다 50m 높다. 아미타경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보석 중 하나인 청옥에서 온 지명이라 하기도 하고 임란 때 유생들이 의병들의 정신이 죽지 안했다는 뜻으로 “청옥산”이라 했다고 하기도 하고 동해시 쪽에서 바라보는 산세가 “푸르다”:고 하여 청옥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청옥산 주봉에 있던 소나무는 임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 하기위한 대들보용 목재로 사용되었다.


산 아래 샘이 있고 정상부는 넓은 공터가 있어  고적대와 함께 야생화의 천국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바위솔이 군락을 이루는 곳이라 대간꾼들의 비박장소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베이스캠프
 
다음날
청옥산으로 물 뜨러 가는 한산님 왈!
 계곡으로 내려가 물을 뜬 적은 있지만 산으로 올라가서 물을 떠 온적이 없다는 말에 파안대소 하고
그가 오기까지 잠자리에 들었는데...
웅서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구리시에 온 대간팀이 댓재에서 출발하여 백복령으로 진행하고 있다.
 
우리 또한 베낭을 정리한 후 고적대를 향하여 출발을 서두르니 익일07:43분이다.

연칠성령(蓮七星嶺)

 

하장면과 삼화동을 넘나들던 고개로 험준한 산세여서 난출령(難出領)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정상부는 “망경대“라 하고 인조원년 명재상 택당 ”이식”이 중봉산 단교암으로 은퇴하였을 때 이곳에 올라 서울을 바라보며 망경 한 곳이라 한다.


다른 일설은 하늘에 계신 칠성님께 이어지는 고개로 보기도 하고, 사원터에서 하장면 방향으로 늘어선 일곱개의 봉우리에서 온 말로 보기도 한다.

 고적대 300여미터 남겨둔 암름구간 오르기

고적대 (高積臺·1,353.9m)

 

기암절벽이 대(臺)를 이루어 원효대사가 이름 짓고 수행한 곳이라 하고신선들이 노닐던 곳이라 한다.

 

08:28분

고적대에 오른다.

마루금은 1시방향 내리막길로 독도에 주의해야할 곳!

10시 방향은 중봉산 가는 길.

 기념사진 남기고...

 코브라 닮았나?

뒤 돌아 보는 고적대

 

청옥산.두타산과 함께 해동삼봉으로 불리며 무릉계곡의 시작을 알리는 명산으로이곳에 오르는 사람들을 무아의 경지에 빠지게 하는 곳으로 주변의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1142.8봉

 산수화 한폭

사원터 갈림길

 

09:08분

 독도에 주의해야할 곳!

마루금은 11시방향

                                                                              괭이눈
덕항산 오름길에 담은 것인데 ..
이 구간에서 야생화를 본 기억이 없어 빌려왔음.
야생화 없는 산행기 허전할 것 같기에...
 

갈미봉(味峰 1,260m)

 

전국적으로 같은 이름이 많이 있다.

모두 같은 어원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갈”은 나누다(分)와 “미”는 山을 뜻하니 두 개의 봉우리를 말한다.

(갈미봉은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 높은 봉우리에 이름 붙인다)


“갈비봉“ 역시 갈미봉에서 온 말로 “비”와 “봉”에 이끌려  “미”가 비“로 변형되어 ”갈비봉“이 된 것이다.

(여기의 갈미봉은 수병산과 함께 두 개의 봉우리를 이룬다)

 

09:57분

이 곳에서 수병산을 낳는다.

 

두타산에서 석병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경계로 하여 수병산.괘병산.자병산.석병산 등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이기령 가는 길 

 

늪지대를 연상시키는 곳으로 독도에 주의해야 할 곳이다.

돌길 따라서 진행.

 Y 松

이기령(耳基領)

 

“동기(銅基)“의 순수 우리말로 구리터가 있던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구리터”의 중간 자음인 ㄹ이 탈락되어 “구이터”가 되고 “구이”가 “귀”로 축약되어 “귀이(耳)로 표기 되었다.


구리터의 “구리”는 “동”이니 자연스럽게 동(銅)이고 터는 기(基)이니 銅基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재”를 뜻하는 “嶺‘을 넘어 가니 그 이름도 찬란한 이기령이 되었다.

 

12:12분

이 곳에서 500m 움직이면 식수를 구할 수 있다.

군대에서 원방재를 거쳐 이기령까지 이어오는 임도는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로라 한다.

상월산 가는 길은 소나무숲 길로 비교적 오르기 쉽다.

 

상월산(上月山)

 

12:35

상월산에 대한 유래는 찾을 길이 없었다.

다만 국어사전에서 "上月"은 지난 달의 옛말로 뜻하지만

여기서는 "떠 오르는 달을 맞이하는 산"으로 보고 싶다.

또 다른 상월산.

 

13:12

지난 남진 때는 이 곳을 상월산으로 알았다.

현재의 상월산에는 어떠한 표시도 없었으니....

 원방재 가는 길.
싱그러운 조릿대가 이 곳에도 봄 소식을 알릴 것이다.

원방재

 

원방재에 대한 유래가 없어 사전을 찾아보니

"원방"은"먼 지방". 또는 "먼 곳"을  뜻 하는 것으로 보아  먼 거리의 고개를 힘들게 넘나들던

사람들의 애환이 만들어 낸 지명이 구전으로 전해져온 순수 우리말로 보인다.

 

13:40분

여기서 더 이상의 진행을 접기로 하여 부수베리로 하산코스를 잡는다.

 

이 것은

체력적인 부담도 있었지만 종주팀을 앞서가는 것을 피하는 것도 예의라 생각 하였던 것이다.

(백두대간 꿈의 종주대는 현재 원방재까지 진행을 마쳤다)

 부수베리 가는 길

 

임도는 이기령까지 이어 지는데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임도를 개설 하였다 한다.

 부수베리계곡의 시작
 계곡1
갈미봉에서 발원한다

원방재는 동해시 관촌마을과 정선군 가목리를 넘나드는 고개로 가목리에는

 정선 땅 아우라지로 흘러가는 부수베리(부싯돌을 생산하던 곳이라 “부수베리”라 하였다)계곡(川)과 

삼척방향으로는  오십천으로 흘러드는 서학골 계곡(川)이 흐른다.

 

15:10분

부수베리 삼거리에서 산행을 종료하지만 집 찾아 가는 길이 걱정이다.

이 지방 출신인 한산님의 기지로  백복령휴게소에서 옹심이칼국수와 메밀전으로 유명한 9번음식점에 전화하니 10분이나 되었을까? 9번집 아드님이 데리려 온다.

 

백복령휴게소 9번집에서 메밀전에 막걸리 한 잔 ,

 칼국수에 늦은 점심 해결한 후 동해바다님이 알려준대로 임계터미널에 도착하나 강릉가는 버스는 17:50분이라 고민하고 있는데 서울에 가는 아내를 마중하러 온 지역주민이 우리와 같은 처지라 강릉으로 가야하니 동승시켜 주겠다고 한다

그저 고마울 뿐이다.

 

18:15분 강릉에 도착

17시 인천행 일반버스(강릉~인천간 고속버스는 없으며 일반버스가 직통으로 운행되고 있다 \15.400) 예매한 후

40여분 남은 시간을 이용 해 순대국집에서 순대에 소주한 잔 나누고 우리는 서울과 인천으로 굳바이 했다.

 자병산은 없었다.(계단형으로 절개된 부분이 자병산 정상이었다)

 

17:02분 백복령에 간 이유는

 연칠성령부터 함께 산행을 한 구리00산악회 차랑을 얻어 타 볼까?하는 심산이었지만

체면이 말이 아니어서 강릉에서 고속버스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백복령휴게소에서 백복령까지 약4km 이동거리는 지나가는 포터화물칸을 이용하였고

백복령에서 임계까지는 한산님 친구분의 승용차로 이동함.


 

참고문헌  

1.신동국여지승람. 2.이중한의 택리지 3.동해시지명지 4.청주시지명지 5.박성태의 산경표 6.척주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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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건강이 회복되지 않했나 보다.

 

청옥산 정상에 누워

하늘에서 쏟아 져 내리는 북두칠성의 뚜렷한 별자리와 수 많은 별들의 유영은

나를 황홀한 세계로 안내하였다.

 

그러나

아이의 외침에 놀라 깨어 났을 때는

살갖을 파고드는 추위와 고독, 그리고 무서움이 동반하였다.

 

5일이 지난 지금

 아직도 부어있는 양 쪽다리를 만져보면서  별들의 잔치로 황홀했던 그 시간을 회상하고

오늘밤 떠 나게 되는 대간길을 그려본다.

 

이 다리를 가지고 완주나 할 수 있을지?

못 가면 백복령까지만 가도 되는 것을...

오랫만에 만나는 대원들과 해후는?

 

보고 싶다.

정다운 얼굴들

........

2008-04-11일에 정리하다, 

 

 

 

 

출처 : 운해의산방
글쓴이 : 운 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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