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 역사
백화도량 종남산 송광사의 역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에서 깨달아 중도(中道)로 가르침의 핵심을 삼은 이래, 그것은 불교 전통의 주요 개념이었다. 불교가 역사적 전통에서 가꾸어온 모든 사상 · 문화· 제도는 모두 중도의 선양을 위한 것이었다. 송광사도 중도의 선양을 위한 곳이다.
백두대간이 남서쪽으로 기세를 떨치다 마친 이곳 전라북도 완주군에 종남산이 있다. 송광사는 그 산 동남쪽 끝자락에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종남산 남쪽에 영험있는 샘물이 솟아나 그 옆에 절을 짓고 백련사라고 했다고 한다.
송광사가 역사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통일신라 말이다. 보조 체징(普照體澄, 804~880) 선사가 설악산 억성사에서 수행하다 선법의 요체를 구하러 중국에 유학을 가던 길에 백련사가 영험도량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귀국해서도 가지산 보림사와 종남산 백련사에 번갈아 거주하면서 도의국사의 선법으로 널리 교화했다.
이때 체징선사는 백련사를 선종의 종취에 따라 송광사로 개칭했다. 이래로 송광사는 사세를 면면히 이어왔다.고려 중기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이 중국 송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천태종을 개창하자, 사명을 백련사로 다시 고치고 천태종에 귀속했다.
조선시대 임진 ·정유 양란 때 송광사는 전소되었는데, 광해군 때 벽암각성(碧巖覺性)의 문도인 덕림화상이 주맹이 되어 응호, 승명, 운정, 득순, 홍신 스님 등과 더불어 노력 끝에 중건하였다.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 1636년)에 따르면, 송광사는 인조의 척족(戚族)인 이취반(李就潘)이 폐허가 된 절터를 시주하였고, 보조국사 체징이 점지해 두었던 터에 1622년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이듬 해에 7칸 중층의 대웅전을 건립함으로써 초창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사액되었다고 했다.
그 후 명부전(1640년), 천왕전(1649년), 나한전(1656년), 일주문 등이 연이어 신축됨으로써 세 번째 중건됐다. 그 후에도 1707년에 네 번째 중건이, 1857년에 다섯 번째 중건이 있었다.
<송광사대웅전중수상량문(1857년)>에 따르면, 다섯 번째 중건은 전라도 순찰사 김병교, 전라도 관찰사 심경택, 전주부윤 홍종화 등이 백만전을 지원하여 2층 구조로 지어진 대웅전을 49일만에 허물고 53명의 장인이 7개월만에 단층 대웅전으로 다시 건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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