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와 풍수술에 능통하여 땅의 길흉을 점지하는 사람을 풍수사, 지사, 지관이라고 부른다. 지관(地官)이라는 명칭은 처음에는 왕의 능을 만들 때 지리를 살피기 위해서 땅 보는 일을 맡게 된 자를 가르킨데서 유래한다.
왕릉을 선정할 때 나라 전체의 풍수사 가운데서 우수한 몇 명만을 선정하여 상지관(相地官)으로 임명하였는데 일단 지관에 임명되면 실력이 인정되었고 풍수사 중에서 첫째라는 권위가 주어졌다. 다른 벼슬도 마찬가지이지만 한번 지관에 임명되면 퇴임 후에도 지관이라는 호칭은 계속 쓰여졌다. 그러나 실제 지관에 임명된 일이 없는 풍수하는 사람도 경칭으로 지관이라고 불렀으며, 특별히 나라의 일에 관여하기 위해서 뽑은 풍수를 국풍(國風)이라고 불렀다.
풍수는 한문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공부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승려나 상류계층이 아니면 풍수사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풍수사의 지위는 다른 점복술(占卜術)을 하는 사람과는 달리 사회에서 대우와 존경을 받았다. 풍수사에 대한 보수는 일정하지가 않았다. 학문하는 사람은 누구나 풍수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리를 잡아주는데 일정액의 보수를 정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부모가 안주할 좋은 묘지를 선정해 주었기 때문에 부모에게 효도를 했다는 기쁨과 그 묘지의 발복으로 자손들이 부귀번창 할거라는 기대에서 될 수 있는 한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그러나 풍수설화의 대부분은 명당(明堂)은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기고 있다가 효자나 효부(孝婦) 등 착한 심성을 가지고 남에게 공덕을 많이 베푼 사람에게는 풍수에 통달한 승려나 풍수사가 우연히 나타나 좋은 자리를 점지해주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풍수사들은 대부분 지관으로서 꼿꼿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富)보다는 명예를 존중하였다.
<참고서적: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 조선의 풍수, 민음사>
다음의 설화(說話)는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어느 날 숙종 임금이 평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려고 밀행을 다니는데 가난하게 생긴 한 부부가 슬프게 울면서 냇가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장사 지내려는 것을 보았다. 풍수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던 임금이 깜짝 놀라 가까이 가서 보니 광중(壙中)에는 어느새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가난한 부부는 물이 차 오른 광중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더욱 슬프게 울고만 있었다. 숙종 임금은 아무리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이라고는 하지만 묘를 쓰려면 산에 써야지 어찌 냇가에 쓰는지 의아하고 기가 막혔다. 임금은 두 부부에게 물었다. "여보게! 물이 금방 이렇게 솟아나는 곳에 어찌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희들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 밤에 오랜 병환 끝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아침에 저기 저 높은 언덕에 사시는 지관 어른이 찾아와서 저희들의 평소 효심에 감동했다 하면서 오늘 이 시간에 이 자리에다 장사를 지내야 발복한다고 자리를 잡아 주었습니다. 그 분은 이 지방에서는 아주 유명한 분인데 이런 자리일 줄은 몰랐습니다." 임금은 수행한 신하에게 쌀 백 가마를 효성이 지극한 이 부부에게 주라 명령하고, 또 상지관을 불러 좋은 자리를 잡아주라고 하였다. 화가 난 임금은 자리를 잡아 준 지관이 살고 있는 언덕 위의 집으로 갔다. 지관은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 아주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임금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크게 꾸짖었다.
"나는 한양 사는 이 서방이라고 하는데 듣자니 당신이 지리를 좀 안다하던데 어찌 착하고 가난한 사람을 골탕 먹이려고 냇가에다 자리를 잡아 주었는가?" 그러자 지관은 껄껄껄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저 자리는 시신이 광중에 들어가기도 전에 쌀 백 가마가 생기는 금시발복 할 자리며, 나라의 국풍이 나서서 다시 좋은 자리로 옮겨줄 자리란 말이오. 내 저들 부부의 효성에 감동하여 자리를 잡아 준 것인데 무엇이 잘못되었소." 임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금방 자신이 조치한 내용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임금은 다시 물었다. "영감님은 그렇게 잘 알면서 호의호식하지 않고 어찌하여 이런 오막살이에서 살고 있오?" 그러자 지관은 다시 한번 크게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내가 잘 살려면 남을 속이고 도둑질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요. 여기는 비록 오막살이 이기는 하지만 나라의 임금이 찾아올 자리요. 이 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단 말이요" 임금은 대경 실색을 하고 말았다.
6) 여의도(汝矣島)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 형국
국회의사당과 KBS, MBC, SBS 등 방송국을 비롯해서 대한생명 63빌딩과 각 증권 회사 건물,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는 여의도는 한강에 있는 섬이다. 조선시대 도성인 경복궁에서 보았을 때 여의도는 한강 물이 서울을 감싸고 흘러 마지막으로 빠져나가는 외수구(外水口)로서 율도인 밤섬과 함께 나란히 있다. 크고 작은 두 섬이 한강 물 가운데 있으므로 유속을 조절하고, 서울을 형성하는 보국의 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즉, 서울을 만들기 위해서 백두산에서부터 출발하여 천리를 넘게 달려온 음(陰)인 용(산맥)과 역시 천리 이상을 흘러온 양(陽)인 한강수가 음양교배를 하여 서울이라는 큰 보국(保局)을 만든다. 이때 한강수가 빠르게 흘러 나간다면 용과 물의 충분한 음양교배가 어렵고 서울을 둘러싼 보국 안의 생기(生氣) 역시 흩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여의도와 밤섬이 있으므로 한강의 유속을 느리게 하여 양인 물의 기운을 충분하게 공급해주고 있는 것이다. 서울이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1968년 여의도 개발을 착수하여 밤섬을 폭파하고 그 흙과 모래를 모두 파다가 여의도 섬을 돋았는데 이로 인해 한강의 자연 환경과 생태계가 심하게 파괴되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의도 개발로 얻은 득보다는 실이 더 크게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여의도와 밤섬의 생태계가 복원되어가고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처럼 여의도는 서울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자체적으로는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어 수세국(水勢局)의 명당을 이룬다. 혈의 생기는 물이 보호하는데 사방에 물이 있기 때문에 기가 하나도 흩어지지 않는 명당이다. 여의도 전체적인 모습은 마치 배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주형(行舟形)의 모습을 하고 있다. 풍수지리에서 행주형 명당은 부(富)를 상징한다. 배에는 승객뿐만 아니고 값나가는 곡식과 금은 보화를 가득 싣고 가기 때문이다. 배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더욱 힘을 쓰고 발전이 있는 것이지 물 따라 흘러가면 힘과 발전이 없다. 우연인지 일부러 그렇게 배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의도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주형에 맞게 건물이 배치되었다. 63빌딩은 마치 배 머리에 있는 돛대와 같고, 국회의사당은 배 뒤편에 있는 기관실이며, 가운데에 있는 아파트 단지는 선실이고, 금융가와 상가가 있는 곳은 금은 보화로 가득 찬 화물실에 해당된다. 배가 순조롭게 항해하기 위해서는 기관실이 건재해야 한다. 나라가 편안하고 발전을 하려면 기관실인 국회가 제대로 역할을 해야 한다. 항상 시끄럽고 요란한 국회와 여의도에 초고층 건물을 짖는다는 뉴스를 보면서 혹시나 배가 균형이 맞지 않아 침몰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7) 이여송 이야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을 구원하러 와 보니 조선 조정에는 인재들이 매우 많았다. 이여송은 그 까닭이 조선 산수가 수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가는 곳마다 산천의 혈맥을 끊었다. 왜군이 물러간 후 그는 귀국하면서 백두산 근처에 있는 한 묘를 보았는데 왕후지지(王侯之地)로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다스릴 자손이 나올 자리였다. 이여송은 곧 묘의 혈을 자르도록 하였다. 그러자 묘에서는 피가 흘러 나와 병사들이 혼비백산하였다. 이여송이 귀국해서 부친께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부친이 깜짝 놀라면서 그 묘가 바로 이여송의 조부 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로부터 얼마 후 이여송은 조정에서 물러났으며, 후손들은 모두 절단이 났다.
8) 방안 풍수와 작대기 풍수
우리 속담에 `방안 풍수 집안 망친다`는 말이 있다. 방안 풍수란 집안에서는 큰소리치지만 밖에 나가서는 제대로 일을 못하는 사람을 가르친다. 방안에서 배운 이론이 아무리 논리 정연하다 할지라도 실제 현장의 상황과 맞지 않으면 일을 망친다는 말이다. 세상살이 모든 일이 그렇듯이 풍수에서도 마찬가지다. 책에서 배운 이론만 가지고 실제 산에 가보면 아무 것도 안 보인다. 방안 풍수에 비교되는 말이 작대기 풍수인데 아무런 이론도 논리도 없이 오직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일을 하는 사람을 가르친다. 오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홀로 주어진 일은 잘 할지 모르지만 설득력이 부족하여 남을 이해시킬 수 없으며,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풍수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대기를 들고 산을 많이 다녀 보아서 자리는 잘 잡는다 할지라도 그곳이 왜 명당이 되는지를 모른다면 신뢰성은 떨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풍수지리를 공부하려는 사람은 이론적인 공부와 현장 답사를 병행하여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사물을 분간 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하겠다.
9) 금시발복지지(今時發福之地)
묘를 쓰고 발복이 빠르게 나타나는 것을 속발(速發) 또는 금시발복(今時發福) 한다고 한다. 흔히 인시하관(寅時下棺)에 묘시발복(卯時發福), 사시하관(巳時下棺)에 오시발복(午時發福)한다는 말이 있는데 장사를 지내고 집에 돌아오면 이미 발복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옛 설화나 전설에 자주 등장한다. 그 설화 중 하나를 소개한다. 깊은 산골에 대대로 머슴살이를 해온 총각이 병든 홀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주인집은 천석지기 부자였으나 몇 해전 돌림병이 돌아 모두 죽고 젊은 며느리만 홀로 되어 있었다. 착하고 성실한 총각이 어느 날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배고픔에 지쳐 쓰러져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자신이 갖고 있던 점심을 대접해 드렸다. 지관인 노인은 그 근처의 명당을 찾으러 왔다가 길을 잃고 산 속을 헤매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이틀을 쓰러져 있었다. 총각이 노인의 다친 다리를 치료 해주자 이를 고맙게 여긴 지관은 자신이 찾은 명당을 가르쳐 주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여기다 묻으라고 일러주고 떠나갔다. 총각의 지극한 효성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죽자 총각은 노인이 말한 그 자리에다 장사를 지냈다. 마을의 머슴들이 무덤을 만드는 사이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서 집에 오자 종들은 아무도 없고 며느리 혼자 있었다. 밥할 쌀을 꺼내려 광에 들어갔을 때 그 들은 곧 눈이 맞아 인연을 맺고 말았다. 총각과 젊은 과부는 그 날로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멀리 떠나 신분을 감추고 부자로 행복하게 살았으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후에 정승이 되었다고 한다.
10) 서울은 설(雪)울에서 유래되었다.
나는 두 아들에게 틈틈이 한문을 가르친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종원이와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종환이에게 한문의 원리와 뜻을 설명해 주면 매우 흥미 있어 한다. 하루는 한문으로 집 주소 쓰는 법을 가르치는데 `서울`만 한글로 쓰자 왜 서울은 한문이 없냐고 질문을 한다. 아이들에게 서울의 역사와 유래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새로운 궁궐(경복궁)을 짓고 도성을 쌓으려 할 때 어디서 어디까지 쌓아야 할지 난감했다. 어는 날 큰 눈이 내려 살펴보니 눈이 하나의 선을 따라 선 밖에는 눈이 쌓여 있고, 선 안쪽에는 눈이 없었다. 이 태조는 이러한 현상은 우연이 아니고 필시 하늘에서 내린 뜻이라 생각하고 그 선을 따라 도성을 쌓도록 하였다. 도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북악산, 인왕산, 남산, 동대문에 있는 낙산을 연결하는 것으로 둘레가 40리(약17Km)에 이른다. 사람들은 눈이 한양의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도성을 눈설(雪)자를 써서 `설(雪)울`이라고 불렀고 설울이 서울로 발음되면서 오늘날 서울이 유래 된 것이다.
11) 붉은 바위에 얽힌 전설
필자의 고향은 전북 순창의 복흥면으로 내장산에서 백양사 가는 중간지점에 있다. 해발 400m가 넘는 분지에 있는 복흥은 내장산 입구에서 좌회전하여 갈재라고 불리는 추령을 올라가 산 정상에 이르면 평평한 곳에 일개 면이 소재하고 있다. 옛날부터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로 전란, 흉년, 전염병이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산이 높고 험하여 마을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다. 때문에 외적이 침입하더라도 다른 곳으로 지나쳐 가버렸고, 산 위에는 수량이 풍부한 넓은 평지와 전답이 있어 밖으로부터 식량을 들여오지 않더라도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며, 외부와 접촉이 없다보니 돌림병인 전염병이 들어 올 리가 없었다. 가까운 예로 6.25 당시 인접한 쌍치면과 회문산 일대는 빨치산 본부가 있을 만큼 치열한 격전지로 양민의 피해가 컸는데 복흥면은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당시 필자의 조부님도 전남 장성에 사시다가 난을 피해 복흥으로 피난하러 들어오시었는데 전쟁이 끝나고도 복흥의 산수에 반해 그대로 자리를 잡고 사신 것이 우리 집안이 일문을 이룬 계기가 되었다. 험한 노령산맥(호남정맥)의 줄기에 있으면서도 복흥은 산세가 순하고 야트막하여 도선국사 유산록과 각종 결록에 수많은 명당이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산세 때문인지 작은 산골 마을에 불과하지만 인물도 많이 나왔다. 최근의 인물로는 우리 나라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면서 청렴결백으로 유명한 가인 김병로 선생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홍영기씨가 이 고장 출신이다. 이처럼 산세가 뛰어나다 보니 전해오는 전설도 수없이 많다. 그 중 필자 고향마을에 있는 붉은 바위에 얽힌 전설을 소개하려고 한다. 복흥면에는 세 개의 장군대좌형 혈이 있는데 갈재(추령)에 있는 갈재 장군, 대각산 아래에 있는 대각 장군, 내장산 최고봉인 신선봉 아래에 있는 대가 장군이다.
이 세 장군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나 백성들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나타나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했다고 한다. 일제가 강제적으로 조선을 합방하고 그들의 식민지 통치를 위해 전국에 걸쳐 토지 조사를 했는데 이때 이곳에 와서 산세를 보니 큰 인물이 나와 자신들을 쫓아낼 것 같았다. 그들은 석유 탐사를 한다는 구실을 붙여 혈맥이 있을만한 곳은 모두 자른다고 잘랐는데 쉽게 혈맥은 잘라지지 않았다. 대가 장군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아무래도 하천 가에 있는 바위로 된 큰산이 마음에 걸렸다.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바위산은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듯 위협을 주고 있었다. 일본인은 날카로운 칼로 바위의 복부에 해당하는 곳을 깊이 찔렀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요란하면서 바위 중간에서 피가 흘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그 자리에 붉은 색이 있는데 사람들은 붉은 바위라고 불렀으며 대가 장군이 칼을 맞아 죽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아마 일본의 풍수 침략으로 조선 민중들로 하여금 독립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들에게 복종하라는 뜻에서 교묘하게 꾸며낸 이야기로 추측된다. 즉 마을 사람을 지켜주는 대가 장군이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조선을 이끌어갈 인물은 나오지 않을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일본을 섬겨야 한다는 식민지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조선 민중들이 희망을 저버릴 민족이 아니다. 비록 대가 장군은 죽었다고 하나 갈재 장군과 대각 장군이 있기 때문에 마을을 지켜 주리라 믿고 있다. 지금은 그 일대가 온천이 난다고 개발 중인데 구암 온천이 바로 그곳이다. 또 명당을 찾는 사람들이 갈재 장군혈과 대각 장군 혈을 찾기 위해 수없이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12) 눈 먼 손자가 나온 노사 기정진의 할머니 묘 황앵탁목혈
(내용 중에 김두규 저 <한국 풍수의 허와 실, 동학사>를 일부분 인용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고향 이야기가 나온 김에 순창군 복흥면에 있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선생 조모 묘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노사 기정진 선생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중 한사람이며 이 고장 복흥 출신으로, 인근의 장성에서 경학을 공부하려고 전국에서 모여드는 선비들을 가르쳤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년),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년),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년), 녹문(鹿門) 임성주(壬聖周, 1711-1788년),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년),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년) 선생을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6대가로 일컬어 말한다. 눈 하나가 먼 노사 선생은 8,9세에 이미 경서와 사기에 통달했고, 유학에 전심하여 진사에 합격한 후 참봉에서 호조참판까지 여러 번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고향 사람들은 흔히 기참판(奇參判)으로 노사 선생을 부르고 있다. 노사 선생은 다음 일화로 유명하다. 중국에서 조선에 인물이 있는지를 실험하기 위해서 조선 조정에 시 한편을 보내 뜻을 물었다. 인물이 없으면 자신들이 조선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전부터 해오던 조선 조정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용단호장 오경루하 석양홍(龍短虎長 五更樓下夕陽紅)"
직역을 하자면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오경루 아래 석양은 붉네"
조선 조정에서는 무슨 뜻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애를 태웠다. 그렇다고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 않으면 중국으로부터 무시당할 일이었다. 할 수 없어 사람을 보내 장성에 있는 노사에게 뜻을 물었다. 노사는 글을 읽고 다음과 같은 답을 써 보냈다.
"동해유어 무두무미무척(東海有魚 無頭無尾無脊)
화원서방 구월산중 춘초록(畵圓書方 九月山中 春草綠)"
직역을 하자면 "동해에 고기가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등도 없다. 그림으로 그리면 원으로 둥글고, 글씨로 쓰자면 각이 졌다. 구월산중에 봄 풀이 푸르다."
글 모두 직역만 가지고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글은 모두 해(日)를 주제로 표현 한 것이다. 겨울철에는 해가 용을 상징하는 진시(오전 7시정도)에 떠오르므로 해의 길이(낮의 길이)가 짧고, 여름철에는 해가 호랑이를 상징하는 인시(오전 5시정도)에 떠오르므로 해의 길이(낮의 길이)가 길어 용단호장(龍短虎長)이라고 표현 한 것이며 오경루는 중국에 있는 누각으로 석양의 경치를 노래한 것이다. 이에 대한 노사의 시도 마찬가지다. 동해에 떠오르는 해는 고기와 같은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등지느러미도 없다. 그림으로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자면 각이 졌다(日자를 암시) 중국은 오경루에 지는 석양이지만 조선은 구월산에 새로 돋아나는 봄 풀이다라고 비교 표현하였다. 시를 보고 중국 사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조선 임금은 서울의 수많은 사람들이 장성 고을의 눈 하나 없는 사람 보다 못하다 하여 `장안만목 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 不如長城一目)이라고 하였다.
노사 기정진 선생은 할머니 묘 발복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순창 복흥면 소재지에서 담양 가는 도로로 가다보면 대방리 용지 마을 건너편으로 금방동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한참을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을이 나타난다. 금방동은 산이 나선형으로 돌아 감아준 곳이다. 마치 고동(다슬기) 안에 있는 곳과 같다하여 영라하수형(靈螺下水形)이라고 하는데 깊은 산골로 논하나 없지만 옛날부터 부자가 많이 나온 동네다. 마을 뒤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큰 나무 한 그루가 고갯마루에 서있다. 여기서 왼쪽 길로 조금만 가다보면 산 중턱에 석물 하나 없는 봉분이 나타난다. 이곳이 노사 기정진 조모 묘인 황앵탁목혈(黃鶯啄木穴)이다. 황앵탁목혈이란 노란 꾀꼬리가 나무를 쪼는 명당이다
내용출처 : [기타] http://www.poongsoojiri.org/bbs/view.php?id=story&page=9&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