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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두대간의 꿈! 진부령에서~향로봉까지 -終-

㉥ 백두대간 記

by 운해 2008. 7. 3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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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7월26일(음력6/24)날씨:비

 

산행지:향로봉(마가리산)

 

산행자:백두대간 꿈의종주대와 함께

 

산행코스:진부령~칠절봉~동굴봉~고성재갈림길~향로봉~진부령(원점회기)

 

산행거리:편도(12.9km),왕복(25.8km)=산행시간 8시간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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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이번에 가야할 산은 백두대간북진(남한구간)의 끝 부분이다.

 

미시령을 경계로 금강산권인 이 번간의 특징은 분단의 현실을 말해주 듯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 진행해야 하는 구간이며

 마구금을 따르는 산행보다는 9부 능선을 따라 개설된 군사작전도로를 따라 진행하고 그 길을 따라 되 돌아오는

 지루한 구간이다.

 

백두대간 남한 구간에서 가장 난해하고 헷갈리게 하는 지명들은 산간오지의 특성상 역사기록에

혼란이 일어난 부분이 많아 대 부분 문헌이 틀리게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산경표와 고지도를 통해 마루금에 대해서만 설명하기로 한다.

 

1.진부령은 고구려시대부터 흘(屹)리였다.

흘(屹)은 성읍이나 고을은 나타내는 접미사이며 간성의 옛 이름인 달홀(達忽)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고국려에서는 산(山)을 달(達)로 표기하였고 읍치(현재의 간성읍 하리 일대를 읍치라 하였다)를 홀(忽)로 보아

 달홀(達忽)이라 하였으며 마산봉 아래 넓은 고원에 자리잡은 고을을 흘(屹)로 보아 屹里하 하였다.

-강길부의 “지명의소재”에서 인용-

 

이 때의 지명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진부령은 “조장이(조쟁이)”하였다.

조쟁이는 진부령의 다른 이름으로 간성의 소금과 어패류와 인제의 곡물들이 물물교환형태로 아침장이 선다고 하여

아침(朝)자와 마당(場)자를 써 “朝張”이라 하였으나 이것이 변음되어  “조쟁이”이라 되었다.

 

2.칠절봉(七節峯)은 다른 말로 “일곱마디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풀어 쓰자면 일곱 개의 봉이 있다는 뜻인데 주변은 밋밋하여 일곱마디를 이루는 능선의 봉우리들을 찾을 수 없다.

아마도 향로봉을 시작으로 소머리곡산. 동굴봉. 칠정봉.매화봉.명당산.봉화봉으로 이어지는 산군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발음은 “칠쩔봉”으로 된소리이다)

 

3.동굴봉을 지나 금강산으로 이어가는 마루금은 고성재 갈림길에서 하나의 산줄기를 낳는데 이 줄기가

향로봉을 넘어서 건봉산과 까지봉을 거느리고 고성의 적벽산으로 뿌리 내리는 향로지맥이다.

 

덕유산의 향적봉처럼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2km정도 벗어나 있는 향로봉의 옛 이름은 마기라산(麻耆羅山)이었으며

다른 이름으로 가리라봉(迦里羅峰)이었다.

 

麻耆羅山은 麻耆羅縣의 진산이었으며 산경표에 杆城西三十里 , 分二岐로 표기하였는데 향로지맥과 백두대간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마기라산을 진산으로 하는 간성읍은 고구려시대에 마기라현(麻耆羅縣) 또는 소물달현(所物達縣)이었으나

후에 승산현(僧山縣)으로 고쳤다.

 

삼국통일 후 757년에 동산현으로 고쳐 간성군 영현이 되었다가 . 高麗 940년(태조 1)에

열산현(熱山縣)으로 개칭하고 1018년에 高城郡 屬縣이 되었다.(마기라현은 현재 간성읍 하리일대를 말한다)

 -엠파스백과사전에서 인용-

 

麻耆羅山과 麻耆羅縣 중 어느 곳이 먼저 지명되어 졌는지에 대해 알 수 없지만 麻耆羅縣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麻耆羅山을 진산으로 하여 祭祀를 지내고 했던 歷史的인 곳이 지금은 향로봉(香爐峰)으로 이름이 바뀌어 國土를 守護하다

 장렬하게 전사한 兵史들의 넋을 기리는 祭壇을 만들어 성역시 하는 곳이 되었으니 역사의 한 페이지가 스크린을

 스쳐가듯 大韓國民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찾아가서 전몰장병들에게 묵념을 올리는 것도 애국하는 것이리라.

 

 대동여지도와 산경도

 

대동여지도와 산경표에 나타난 마기라산의 위치가 틀리게 표시되어 있는데 ..

아래지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산경표의 오기로 보인다.

 

지도상에 표시된 마기라산의 위치는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우측으로 벗어난 지점에 하얀색

점으로 마기라산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청구도제14층9판과 청구요람제14층9판

 

청구요람14층9

지도 위의 지역은 위쪽은 현재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강원도 고성군, 아래쪽은 남한 행정구역으로 강원도 고성군에 해당된다.

이 지도가 제작될 당시에는 군현 경계선을 기준으로 지도의 위쪽은 강원도 高城郡에 해당하고 아래쪽 우측은 杆城郡에, 좌측은 獜蹄縣에 해당하며

고성군과 간성군의 경계선이 현재의 휴전선과 거의 일치한다.

 

 杆城郡의 邑治는 간성읍 하리 일대에 있었으며, 고을의 鎭山은 읍치 서남 방향에 표시되어 있는 麻耆羅山이다.

 여지도강원도편과 해동지도 강원도편

 

 동여도1열

 위 지도에서 살펴본 결과  모든지도는 마기라산을 서쪽250도방향을 향하고 있다.

산경표에서 말하는 서30리에 해당하는 것과 일치한데 산경표의 기록은 진부령~마기라산~흘리령으로 표기하고 있다.

 

★위 고지도는 서울대규장각의 승인을 받아 편집한 것임.

 

 백두대간과 향로지맥을 구분하기 위해 박성태님의 신산경표에서 인용하였다.

 

 향로봉 원점회기도

 

마루금의 9부능선에 해당하는 등고선을 따라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향로봉 가는 길은 이 도로를 따라 진행하나 우측으로 능선으로 작전투입로가 향로봉으로 이어 져 있다.

진부령 산림목장에서 시작하여 봉화봉~명당산~매봉산~칠절봉~향로부대초소~진부령으로 내려오는 등산을

즐길 수 있다.

 

★위 코스는 위험한 요소가 많으므로 산행에 주의해야할 곳이다★

 

 산행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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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13일 진부령에서 백두대간 북진을 마치고 향로봉은 뽀너스산행으로 다음날 다녀오기로 하고 진부령에서

일박을 하면서 다음날 보무도 당당하게 향로봉을 향해 출발 했으나 불과 3km를 남기고 군부대의 제지를 받아 되 돌아오면서

정식으로 허가를 맏아 다시 찾아올 것을 다짐 했었다.

 

사실적으로 백두대간 북진은 고성재 갈림길에서 향로산(향로산은 마루금에서640m벗어나 있음))을 보내기 때문에 군부대 초소에서 2.4km 남짓한 고성재갈림길을

다시 찾아 간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라는 我田引水로 위안을 했지만 마음 한 구석 차지하고 있는 답답한 무엇인가 가  있었다.

 

그러던 차 바위솔님의 도움으로 향로보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한달 전 육본에 향로봉 방문신청을 한다고 하여 주민번호 알려줬는데 의뢰 쉽게 방문허가가 나왔다.

 

  향로봉에 다녀 올 바에야 보다 의미있는 일은 없을까?

생각하니 각종 문헌이나 고지도에 혼동을 이르키고 있는 마기라산의 존재와 위치확인이 중요할 것이란 생각에서

 보름여 가까이 규강작을 들락 거리며 기록찾기에 골몰 하였다.

 

나름대로 느끼고 확인하였던 기록을 여기에 남기로자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남북이 분단되면서 산천의 많은 지명이 바뀌었지만 여기에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고구려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아 있는 지명들을 나열 해 볼 것이다.

 05:00 출입절차를 받아 산행길 시작한다.

 

당일산행으로도 충분할 일이지만 새벽에 출발하는 산행이고 꿈의종주대 쫑파티가 서울에서 계획되어 있어 무박산행으로

진행한다고 하여 송내에서 출발하는데 초롱초롱 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 몰여오기 시작하드니 용대삼거리를

지나면서 빗망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후로

출발부터 종료되는 8시간여를 비를 맞으며 군사도로를 따라 걷는 지루한 여정이었다.

 속단

 칠정봉까지 오르는 길은 약간의 언덕길로 피로를 가중 시키지만 나머지 길은 향로봉까지 평탄한 길을 유지한다.

 

칠절봉 지나면서 소대병력 투입로의 표지판이 있고 육군병장 정0구 추모비가 있는 뒷 쪽으로 마루금에 복귀할 수 있으나

우천으로 도로를 따르기로 한다.

 가는 길 내내 야생화 지천으로 반겨주고 키를 넘기는 어수리의 도열을 받는다.

 산객의 망중한.

우산을 받쳐들고 8시간을 벌 받았는데 일생에 있어서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세 분 모두 백두대간 완주자들이다.

 물레나물

 비를 맞아도 좋다.

      대간 끝나는 날이이까...

 노루오줌 삼형제

 기념사진 남기기

금강초롱은 유일하게 발견하였는데 촬영미숙으로 흰초롱으로 보이네~~

 산과스키님이 뭘? 잘못했나부다.

혼나고 있네~~ㅋㅋ

 여러 種의 야생화를 나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 장으로 뽀샾 했다.

 진부령에서 여기까지는 칠섭로.

향로봉까지는 향로로.

 

칠섭로는

훈련 중 고압선에 감전된 2명의 부하를 살리고 산화한 故김칠섭 소령을 기리기 위해 명명한 도로이다.

을지부대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향로로는 향로부대에서 관리하고 있다.

 왜솜다리.

 

고성재갈림길(백두대간과 향로지맥 분지점)에서 통일 전까지는 갈 수 없는 고성재로 백두대간마루금을 보내고 우리는

향로지맥의 시작점을 따라 향로봉으로 진행한다.

 

고성재 갈림길에서 향로봉까지는 2km남짓하다.

 전역3개월을 남겨 준 병장의 안내를 받아 향로봉에 오른다.

 분홍바늘꼴.

 

지금 쯤 대관령목장 소황병산 둔덕에 오르면 드넓은 초지위에 지천으로 피어있을 테지만 여기서는 딱 한 송이 만나본다.

꽃 잎이 지고 맺는 씨방이 바늘을 닮았다고 하여 분홍바늘꽃이라 한다.

 향로봉정상

 정상부의 부속물

 

오른 쪽 하단 향로봉의 유래에 적혀있는 글에 향로봉은 구름이 덮힌 날이면 향로에 향불을 피어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향로봉이라 한다고 적혀 있다.

 

지금은 향로봉으로 지명이 바뀌었지만 예전에 전해 져 오는 이름은 마기라산(麻耆羅山) 또는 가리라봉(迦里羅山) 이었다.

향로봉에서 이어지는 향로지맥은 건봉산 안부에서 노인산과 봉화봉을 분지시킨 후 까치봉으로 달려 남강이 동해로 합수되는 지점인 적벽산에서 그 줄기를 마감한다.

 

향로지맥이 지나는 향로산과 건봉산 아래 드 넓은 평지에는 고을이 있었고 고을 이름을 마기라현(麻耆羅縣)또는

소물달현(所物達縣) 이라 하였다

 

마기라현(麻耆羅縣)또는소물달현(所物達縣) 은 麻耆羅山을  鎭山(제사를 지내는 산을 일컬음)으로 했고

오음산을 南山으로 하였다.(현재 간성읍 하리 부근이다)

 

마기라산은 삼(麻)자와 늙은이(耆) 그물(羅)자를 쓰는 괴상한 이름을 가지고 있어 뜻 풀이를 해 놓은 문헌을

찾을 수 없었다.(굳이 해석한다면 원시림(麻=耆)이 그물(羅)을 처 놓은 듯 수림이 우거진 산이 아닐까?)

 

옛 날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향로봉과 건봉산을 빼곡이 서 있었던 것 같다.

(건봉사의 유래에서 찾아볼 수 있었음) 

 잔대

 처음에 금강 초롱으로 았았는데...

끝 부분이 나팔모양으로 펴져 있어 잔대로 보인다.

 향로봉에 서 있는 비석들을 모아 보았다.

그런데 장군님들 글씨가 엉망이네~~

그래도 내 보다는 잘 쓰는 것 같다.. 헤~헤

 솔나리

 

내 생애에 두 번째 만나보는 놈이다.

참고로 나리는 8種이 있다고 함.

 13시30분

진부령으로 회귀한다.

 

진부령의 또 다른 이름은 조장(朝場)이라 하며 "조장이"가 변음되어 조쟁이라 부른다.

행정구역으로 간성읍 흘3리에 속하며 북쪽의 추가령,남쪽의 대관령과 함께 3대(영)嶺으로 불린다.

 

관동지방과 영서지방을 연결 해 주는 중요한 교통로 였으며 1981년 국도로 승격되었고

 1984년 10월에 2차선으로 확장 및 포장공사가 완료되었다.

 

이제 미시령에서 향로봉까지 영(嶺)에 대해 현재와 과거에 대해 정리하고자 한다.

 

1.미시령은 미시파령~연수파령으로 불려오다 현재의 "미시령"이 되었으며 용대리와 속초를 이어 주던 길이었으나

터널이 개통되었다.

 

2.화암재는 금강산 화암사에서 유래한 지명이며 화암사 옆에 원암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미시령이 통용되기 전에

용대리와 속초를 이어주던 고갯길로 중요한 구실을 하엿던 것으로 보이며. 신선봉과 상봉의 너덜지대를

넘다들던 고개로 보아 석파령은 현재의 화암재가 아니었던가 추측한다.

 

3.큰 대간령은 순수 우리말로 "순수 우리말로 "새이령"이며 "샛령"으로 부르고 고지도에 등에는 석파령 또는 흘리령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구전으로 전해 져 오던 "새이령"이 현재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지도상에 표기된 대간령은

새이령을 "사이"로 보아 間嶺으로 쓰고 창암과 마장터 사이에 있는 작은 새이령과 구분하기 위해 大.小자를 붙여 큰대간령.소간령으로 쓰므로

일제에 의해 바뀌어 진 지명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인제와 간서을 이어주는 가장 왕래가 빈번한 대로였다)

 

4.흘리령은 마산과 진부령 사이에 있는 고개로 밝흘리에서 중흘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여 이 길을 통해 남천을 따라

간성으로 오가던 중로(새이령을 대로로 본다)였으며 축약되어 "흘령"으로 부른다.

 

★ 산경표에 오기된 마기라산은 마산봉을 일컫는 것으로 오기이며 문헌과 고지도를 살펴볼 때 지금의 향로봉이

옳바른 위치로 보인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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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봉에 가기 위해 두 번을 시도했다.

 

첫 번째 오를 때도 비와 함께 했고

두번 째 역시 피할 수 없어 아직도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국토의 현실에 하늘이 울고 있나보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독도문제와 맞 물려  서럽게 느껴지는 두동강 난 우리의 국토가

쏟아지는 빛줄기와 함께 눈물나게 만든다.

 

어서빨리 통일이 되어 한 마음 되는 나라.

그래서 외침에 흔들림이 없는 나라

그런 나라 되었으면 좋겠다.

 

    미국에 의지하지 않는 자주독립국가로서.....

국가의 품위를 지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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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꿈의종주대와 이별의 순간이다.

개인의 이기를 위해 사욕을 부리는 행위와 과오를 부리는 일이 없기를 바램을 안고

꿈의 종주대와 함께 했던 감사한 마음의 글을 아래에 남긴다.

 종주자들의 가정에 행운이 함께 하기 바라며...

 

會者定離(만나면 언젠가는 헤여지게 마련이고)

 去者必返(떠 나간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게 마련이며)

 生者必滅(때가 되면 가야하는 것이 인생이다)

 

人間之事 世擁之馬 라

 

 

 

출처 : 운해의산방
글쓴이 : 운 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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