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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태조대왕태실 -이성계-

㉢ 문화유적을 찾아서

by 운해 2008. 9. 1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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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대왕태실 (太祖大王胎室)

 

지정별 : 유형문화재 제131호
지정연월일 : 1989년 4월 20일
위치 :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1-108
수량 : 1괄
소유 : 금산군
규모 :
재료 : 석재
시대 : 조선초기

 

- 태조의 태실이 만인산에 안치된 까닭

인삼고을의 관문이라 할 태봉재는 말 그대로 금산과 대전을 잇는 탯줄같은 존재이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그 역할이 좀 무뎌지기는 했어도, 지난 한 세기 동안 태봉재는 금산의 유일한 관문 노릇을 톡톡히 했다.


태봉에 길이 열힌 것은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가 난 이후이다. 이때부터 금단의 영역이었던 태봉은 자동차와 뭇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고개로 변모했다. 널리 알려진대로 만인산 태봉은 태조 이성계의 태가 안치된 곳이다.

 

따라서 개국이래 줄곧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남아있었고, 나라의 봉산(封山)으로 지정되어 수호를 받아왔다. 때문에 아무리 연료가 귀해도 그 주변에서는 화목을 채취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이었다. 그런 태봉에 언감생심 신작로라니?


그렇다면 예전에는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금산과 대전을 왕래했을까? 이제는 촌로들의 기억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마달(머들)령이 그것이다. 정훈의 시로 더 유명한 마달령은 추부면 요광리를 지나 삼괴동 마달촌을 이어주는 소롯길이 된다.

 

조선시대 제원역에 딸린 요광원(要光院)이 마달령 아래에 자리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시인은 그 예스러운 정취를 이렇게 노래했다.

요광원을 지나
머들령
옛날 이 길로 원님이 나리고
등짐장사 쉬어넘고
도적이 목 지키던 곳
분홍 두루막에 남빛 돌띠 두르고
할아버지와 이 재를 넘었다
뻐꾸기 자꾸 우던 날
흘러간 서른 해
유월 하늘에 슬픔이 어린다.

백제시대에 군사들이 말을 달려 나라를 지켰다는 곳, 마달령. 어찌 당대에만 말을 달렸을까마는, 신라와의 접경이 멀지 않음을 상기하면 그 이름만으로도 능히 삼국항쟁의 피어린 역사가 짙게 배어있음을 짐작케 한다.


마달령 중턱, 해묵은 버드나무 아래에는 고색창연한 돌무더기 서낭당이 자리하여 길손들의 여로에 든든한 지킴이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지세가 험하다보니 이따금 산적들이 출몰하여 민초들을 괴롭혔던 모양이다.

 

그래서 재를 지나는 사람들은 주막거리에 삼삼오오 모여 있다가 말동무 삼아 마달령을 넘었다는 애환어린 이야기가 전한다.

- 태실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태봉 또는 태실이라 함은 왕실에서 아이를 출산하면 그 태를 묻어두었던 장소를 지칭하는 말이다.

 물론 안태(安胎)의 풍습은 비단 왕실뿐아니라 예로부터 민간에 전하는 보편적인 의식이엇다.

 

태는 곧 생명의 근원이 까닭에 그 처리를 함부로 하지 않고 손액(損厄)이 없는 방위와 장소를 가려 묻거나 태웠던 것이다. 『성종실록』에 ‘범인들은 반드시 가산(家山)에다 태를 묻는다.’는 기록은 이를 잘 말해준다.

 

 또 드물기는 하지만 강변이나 해안가의 마을에서는 이밖에 민간 약효설에 따라 태를 말려두었다가 아이가 병이 나면 건태를 잘게 썰어 먹이기도 했다.

조선왕조는 전국의 태실지를 1등지에서 3등지까지 분류하고, 왕손이 태어나면 원손(元孫)은 1등지, 대군(大君)은 2등지, 옹주(翁主)는 3등지로 구분하여 태를 묻었다. 그 장소를 물색할 때에는 지관이 풍수설에 따라 세곳의 후보지를 선정하되 왕으로부터 최종 낙점을 받았다.

 

 또한 태를 묻은뒤 태실의 주인공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 가봉(加封)이란 절차를 거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석물과 외양을 갖추어 다시 손질하게 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태를 안치하는 절차는 이러하다.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그 즉시 배항아리에 태를 깨끗이 씻는 세태(洗胎) 의식을 거행하는데, 미리 길어놓은 월덕방(月德方 : 달의 길한 방행을 따질 때 쓰는 술법의 하나)의 물을 부어 백 번을 씻는다. 이를 다시 향온주(香?酒)로 씻은 뒤 백항아리에 담는데 그 절차가 어찌나 까다롭고 정결한지 경외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태를 봉안하는 시기는 대체로 생후 5개월째 되는 달이다. 지관을 파견하여 태봉이 선전되면 내전 남쪽 뜰에 차일을 치고 태봉 출정을 알리는 의식이 베풀어진다. 제의를 마치면 안태사(安胎使)이하 주시관(奏時官), 상토관(相土官), 내시, 호위군, 심부름꾼 등 제인원이 군악대를 앞세우고 태봉을 행해 출발한다.

 

태실 행령이 지나는 길에는 안태사를 영접하는 광대들의 퍼레이드도 한 몫 거들었던 모양이다. 해서 『세종실록』에는 잡인들로 하여금 안태사를 맞지 말라는 기록이 보인다. 태실지에 도착하면 고후토제(告后土祭), 태신안위제(胎神安慰祭), 사후토제(謝后土祭)의 의식을 거쳐 태를 안치하게 된다.

왕실에서 태를 안치하는 것은 나라의 대사일 뿐 아니라 그 행렬을 맞이하는 지방에서도 큰 영예가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왕의 태실지가 안치된 현이나 군을 승격시킨 예도 종종 볼 수 있는데, 태조의 태를 봉안한 진산군도 주(州)로 승격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많은 물자와 인력이 소요되었던 만큼 그 폐해도 없지 않았다.

 

특히 임금에 등극한 태실을 가봉할때에는 더욱 많은 석물과 물자가 소요되었고, 이를 수호하는 데에도 적잖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성종은 태실의 폐해를 없애기 위하여 하삼도에 안치하던 태를 경기지방에 안치하라는 유지를 내린다. 하지만 이후에 잘 시행되지는 않았다.


또한 영조는 사치풍조를 금할 목적으로 세손 외의 왕손 및 왕손녀는 안태사를 파견하지 말고, 석함이나 석물을 사용하지 말라는지시를 내렸지만 역시 그대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 문헌에 나타난 태조의 태실

이성계의 태를 만인산에 안치한 것은 태조가 즉위한지 2년째 되는 1393년이다. 태조는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고향인 함흥땅에 비장된 태를 만인산에 이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가봉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천리길이 넘는 변방으로 태를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필시 어떠한 곡절이 숨겨져 있거나 왕실 차원의 비결이 없다면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 의문을 해소하기에 앞서 실마리가 되는 문헌 기록에 주목해보자.


이태조의 태실에 관한 초기의 기록은 『태실실록』과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편찬되는 각종 지리지와 읍지에는 만인산 성봉(지금의 정기봉)에 대한 기록이 추가로 등장는데 전문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태조 2년(1393) 계유년에 태조의 태실을 안치하고 진산군을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승격했다. 태종13년(1415)에 다시 군으로 개칭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

“만인산: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성봉(星峯)이 있는데 땅이 후박하고 물이 깊으 며, 봉우리가 기이하고 수려한 것이 연꽃과 같다. 태조의 태를 묻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81~1530)

“만인산:차령에서 뻗어내렸는데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태조대왕 어태(御胎)를 봉안했다.” 『여지도서』(1759~1765)
18세기 유일한 군현지도인 『해동지도』(1747~1750)에도 동일한 기록이 보이는데 진산군 지도와 함께 연꽃에 비유되는 태실의 지세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또 정조년간의『여지도서』를 비롯, 조선 후기에 편찬되는 『진산군읍지』(정조년간), 『호남읍지』(1871)등에는 만인산을 태실지로 점복한 내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용담답산기에 이르기를, (태실지에) 천마기(天馬旗)가 창을 세워 놓은 형태로 안석되어 있었다. 옛날에 담양 세성인(世性人) 전추 (田秋)라는 사람이 그 지총(地塚) 위에 집을 짓고 밭 아래 동네에서 풍족하게 살았다.

 

 태조 등극2년 호우 계유년(393)에 군사람 진순도(陳舜道)가 그 위(태봉)를 점복했다. 태조가 처음에 소문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 재신(宰臣)과 더불어 지관(地官)을 파견하여 그것을 보고 오도록 했는데, 지관이 산 위에 이르러 점 지하여 말하기를, ‘아름답도다(佳哉). 이는 만세의 터로구나!’ (此萬世之基也)하고 탄복하여 태를 봉하도록 했다. (중략) 이에 태조가 상을 내려 진순도를 임주사(林州使)로 삼고, 전추 역시 회인현감에 봉하여 전택(田宅)을 하사했다.(중략)

위의 기록에 의하면 태봉의 본래 주인은 전추라는 인물이고, 그위를 다시 점복한 사람은 진순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왕사 무학이 최초로 태실지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재신과 지관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무학이 직접 내려와 태봉을 살핀 위에 태조에게 조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오얏나무를 심어 한양의 성한 기운을 자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에서 전래된 풍수설은 통일신라 말기 도선국사에 이르러 완연한 자생 풍수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후 풍수설이 절정기를 맞이하는 고려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수용되어 왕도의 천택을 비롯한 나라의 온갖 중대사를 결정적이 영향을 끼쳤다. 왕건은 누구보다도 풍수설을 맹신한 사람으로서 건국 가정에서도 이를 적절히 활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심지어 「훈요십조」에도 이에 근거한 유교를 내릴 정도로 국도(國道)의 지력(地力) 여하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고, 묘청의 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반란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는 『산천비보도감』을 두고 나라의 지력에 영향을 미치는 지역, 다시 말해 산천에 문제가 있는 곳은 풍수설의 논리에 따라 비보(裨補)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산천 비보의 흥미있는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도선비기’ 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다.

왕씨를 이을 자는 이씨인데 한양에 도읍할 것이다.

이 비기로 인하여 고려 중엽에 윤관을 시켜 백악산 남쪽에 지리를 택해 이씨를 상징하는 오얏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면 곧바로 잘라버려 오얏의 성한 기운을 억누르게 했다는 것이다. 비기의 내용대로 과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무학대사로 하여금 도읍지를 정하도록 했다.

 

이에 무학이 백운대에서 맥을 찾아 만경대에 이르렀다가 다시 서남쪽의 비봉(碑峯)에 당도하여 비석 하나를 발견했다. 그 비에는 이렇게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無學誤 到此 : 무학이 (맥을) 잘못 찾아 여기까지 온다.

이 비문은 앞날을 예견한 도선대사가 무학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새겨놓은 것이었다. 이를 본 무학이 길을 고쳐 잡아 만경대에서 정남쪽의 맥을 따라 바로 백악산 밑에 이르렀고, 세 곳의 지맥이 한 지점에 모인 것을 보고서야 드디어 궁성의 터를 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무학이 잡은 궁성지는 그옛날 윤관을 시켜 오얏나무를 심었다가 무성해지면 그 기운을 잘랐던 자리였던 것이다. 왕도의 안위가 걸려 있는 산천을 국가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비보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 왕도를 향해 활시위를 겨누는 반궁수

태실이란 지기가 좋은 곳에 태를 안치하여 왕조의 번영을 이어가려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지관이 만세를 이어갈 터로 지목한 곳에 태조의 태를 안치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처럼 피상적인 논리만으로 태조 태실에 관한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단지 발복을 위한 명혈을 찾고자 했다면 도성과 가까운 지역에도 얼마든지 좋은 터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만인산을 고집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의 핵심에는 풍수설의 형국론과 그에 대응하는 비보론이 자리하고 있다. 즉 풍수설을 차용하여 지기(地氣)에 결함이 있는 산천을 비보함으로써 왕조의 항복무강을 기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형국론에 따르면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밖에 위치한 지역은 산의 형상이나 물의 흐름이 나란히 왕도에 반기를 들 지세로 알려져 있다. 왕건이「훈요십조」에서 “차령이남 공주강 외곽은 배역할 땅이니 그 곳의 인재는 등용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긴 것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수 있다.

 

이러한 지세를 일러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반궁수(反弓水)’로 풀이했다. 즉 왕도가 있는 한양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공주강이란 금강을 말함이다. 호남의 덕유산으로부터 흘러내려 역류하 여 공주의 북방으로 나와 금강으로 들어간다. 신도(新都) 계룡산 또한 덕유산의 지맥으로 임실의 마이산을 거쳐 회룡고조(回龍顧祖)의 형국 과 같이 공(公)자 모양을 이룬다. 그런즉 풍수기들은 이른바 반궁수 (反弓水)라 이르는데 송도뿐만 아니라 한양까지를 배역할 형국이며, 계룡산의 신도에도 역시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

 

조선조 초기에 왕 사 무학을 보내 순시하도록 했는데 조운이 불편하다하여 신도를 버렸 다. 허나 실상은 판국이 좁고 역량이 원대하지 못하며, 이 곳으로부터 아래의 호남 산수가 이어지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 옹호해 주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반궁수의 중심에 마이산이 자리한다. 금강의 한 발원지로 지목되는 마이산은 바로 반궁수의 화살촉에 비정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이산은 이씨 왕조를 압박하는 산으로 알려져 있어 주목을 받았다. 태조의 태실이 만인산에 조영된 것은 이와 깊은 연관이 있다.

- 마이산의 금기운이 오얏리(李)를 압박한다

오행설에 따르면 암석산이 마이산으로 木 · 火 · 土 · 金 · 水로 구성되는 오원기(五元氣) 가운데 金에 해당한다. 따라서 오행의 상생 ? 상극원리에 의해 금극목(金剋木), 즉 마이산의 금기운이 목기운을 제압하는 격이 된다. 여기서 목기운이란 의심의 여지 없이 이씨 왕조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오얏나무를 뜻하는 이(李) 성의 나무목(木) 변은 곧 목기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건국될 무렵 이성계와 그 측근들은 반궁수의 핵심이요 이씨를 제압하는 마이산에 대한 비책을 깊숙이 논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성계가 마이산의 지명을 속금산(束金山)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에서도 여실히 입증된다. 여기서 속금이란 ‘금기운을 묶어둔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조선 후기 진안의 문인 담락당(湛樂堂) 하립(1769~1823)이 지은 싯구에는 ‘속금산 내에 답이 여럿 있다(束金山裡塔重重)’는 표현이 보인다. 따라서 지난날 마이산은 속금산으로 명명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미 당시에도 여러 기의 탑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일설에 의하면 마이산의 탑 역시 금기운을 제압하기 위한 산천 비보 차원에서 태조의 조탑설이 대두되고 있다.


아무튼 개국 초기에 이성계는 장차 왕도의 안위에 영향을 끼칠지도 모를 마이산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때문에 풍수설에 의거한 좀더 적극적이 비보처(裨補處)가 강구되었을 터인데, 그 장소에 취택된 곳이 바로 만인산 태실이다. 태조는 무학의 조언을 받아들여 마이산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는 성봉 아래에 태를 안치, 이씨 왕조를 위협하는 금기운과 반궁수를 동시에 제압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오행의 원리와도 절묘하게 부합되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바와 같이 마이산은 금극목의 원리에 따라 목기운을 압박하는 격이 되지만, 반대로 금기운은 화극금(火剋金)의 원리에 의해 상극인 화기(火氣)에 제압을 당한다. 그런데 바로 태실이 안치된 성봉은 오행에서 화(火)에 해당한다. 그 비빌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바로 연꽃이다. 다시 말해 옛 문헌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연꽃같다는 성봉의 지세는 곧 금기운을 차단하는 화기에 비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연꽃의 한복판인 연심에 태실을 안치한 까닭은 이씨 왕조를 압박하는 마이산을 제압하기 위한 고도의 비결에 의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반궁수의 지세를 염두에 두고 좌향을 보면 이 태조의 태실지는 자좌오향(子坐午向:북쪽을 등지고 점남방을 향한 좌향)으로 배치되어 화살촉인 마이산을 정면에서 막아서는 형국이 된다.

 

이쯤 되면 태봉에 올라간 지관이 지세를 둘러보고 쾌재를 부른 까닭도, 태실의 주인과 이를 점지한 사람에게 파격적으로 벼슬을 내린 이유도, 나아가 불원천리하고 태실을 옮긴 속사정도 쉽게 수긍이 간다.


문헌 기록을 통해서도 이를 방증해 볼 여지가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성계는 태실지에 관한 소문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 재신과 지관을 파견하여 살피도록 했다. 문헌에 의하면 당시 재신 가운데 책임을 맡은 사람은 권중화(1322~1408)로 확인된다. 그는 고려말에서 조선초의 학자로서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용된 인물이다.

 

 이 태조가 즉위하자 판문하부사(判門下部事)가 되고 예천백(醴泉伯)에 피봉되었다. 지리와 의학, 복서에 능통하였으며 고사(古事)에도 밝아 정사(政事)에 고문 노릇을 했다. 그런 그가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몸소 만인산에 내려온 까닭은, 이성계가 태실을 옮기는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하 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이것은 역설적으로왕실을 수호하는 차원의 긴요한 비결처가 아니었다면 상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 태봉에 신작로가 뚫린 사연

태실은 조선왕조 초기부터 지방관의 책임하에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태봉에 불이 나서 군수를 좌천시키거나(『중종실록』), 태봉 관리를 소홀히 한 지방관을 잡아들인 일(『선조실록』)이 있는 것을 보면, 왕실에서는 태를 안치한 이후에도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이성계의 태실 역시 옥계부사를 두어 수호케 하고 3년마다 안위제(安慰祭)를 지내는 것이 관례였다.


일제가 풍수설을 역이용하여 명산마다 쇠말뚝을 박고 지맥을 끊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그 만행이 조선왕조의 태봉에 미쳤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태실지가 왕조의 발복과 번영을 위한 목적에서 조영된 것이라면, 이를 간과할리 없는 일제가 태조의 태봉을 겨냥한 의도는 분명하다.

 

 신작로를 낸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가까운 노선을 지척에 두고 굳이 먼 길을 굽이굽이 돌아 험로를 택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일제의 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28년 조선총독부는 전국 수십 개소의 태실을 파헤쳐 태항아리를 창경궁으로 이관한 뒤, 경기도 고양군에 합장을 하고 서감릉이라 이름했다. 이때 태조의 태실도 파괴되어 이장되었음은 물론이다.

 

더욱 한심한 작태는 그 이후에 지역에 사는 모 가문에서 석물을 치우고 태봉 위에 조상의 묘를 안치한 사실이다. 이로 인해 남아있던 석물은 크게 훼손되고 본래의 태실지마저 빼앗기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받기 어려운 매국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근래(1993)에 복원된 이태조의 태실의 본래의 위치는 중부대학교 본관 뒤편의 봉우리이다.

- 공원 및 자생식물원으로 조성

금산군에서 역점을 두고 추진한 <1000개의 자연공원 가꾸기>사업에 태실공원이 포함되어 2001년에 아름다운 주민의 쉼터로 조성되었으며 예쁘게 가꾸어 조성한 현 부지는 마전리 송영근(宋英根)씨가 금산군에 기탁한 임야로 자활근로사업과 공공근로사업으로 조성하였으며 1억5천만원의 예산절용 효과를 보았으며 지금은 매일 많은 주민들의 산책과 휴식처로 각광을 받으며 아름다운 자생식물원으로 거듭나고 있다.

※ 참고문헌
금산군지편찬위원회 1987 금산군지
충청남도 1993 문화유적총람
충청남도 1996 문화재대관

출처 : 운해의산방
글쓴이 : 운 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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