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대전의 산줄기(식장산과 계족산)
산행자:홀로산행
산행코스: 추부터널~
어프로치:2.5km(추부터널~정기봉안부=1km , 계족산~용화사육교=1.5km)
산행거리=32km,산행시간=14시간(휴식2시간 제외)
개요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분지하는 금남호남정맥은 주줄(화)산에서 호남정맥을 보내고 대둔산을 지나 계룡산으로 금남정맥을 이어 가면서
인대산에서 가지줄기를 내려 대전의 동부권 산줄기를 형성 시키니 식장지맥이라 하고 계룡산에서 가지내린 산줄기는 서부권 산줄기를 수 놓으니
이름하여 “관암지맥”이라 부른다.
관암지맥은 갑천과 금강이 합수되는 오봉산 아래 불무산에서 금강과 만나고 식장지맥은 금강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계족산에서 달려 온 산줄기가
불무산을 바라보는 반대쪽에서 그 맥을 다한다.
그 원형속에
우리나라 제2의 행정도시이자 150만의 시민의 안식처인 대전광역시가 있다.
先史時代부터 農耕文化로 시작된 大田의 순수 우리말은 “한밭“이었다.
“크다”를 뜻하는 “한”은 대(大)로, 밭은 전(田)으로 이두문자화 되어 지금의 대전(大田)이 되었는데 클태(太)자를 써서 태전(太)田이라 하는 것은
한일합방 전 후로 7년여 동안에 나타나는 지명으로 뚜렷한 文獻이 없는 한 동국여지승람에 최초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大田"이란 지명으로
표기해야 할 것이다. (순수 우리말인 한밭으로 표기함이 더 좋을 것이지만 현행법상 지명변경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三南의 交通要衝地로서 구한말에 와서야 철도의 개설에 때 맞추어 현대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대전은 엑스포를 신호탄으로
제2의 행정도시로 또는 첨단과학의 도시로 150만 시민을 거느린 거대한 도시로 탈바꿈 되었다.
市花는 “목련“이고 市木은“소나무”를 市鳥는“까치”를 상징으로 하고 있다.
대전의 산줄기는
대둔산을 조산으로 하여 54개의 山이 있으며 대둔산에서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산태극(山太極)을 만들고 산줄기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수태극(水太極)을 만들어 놓으니 사방이 명당이요,
기름진 땅이라 살기 좋은 고장이다.
동쪽에는 식장지맥에서 뿌리내린 식장산(597.5m), 고봉산(300m), 응봉산(320m), 성재산(398.7m), 계족산(423m)등이 이어져 대청호에 닿는다.
서쪽에는 관암지맥에서 뿌리내린 산장산(302m), 빈계산(415m), 도덕봉(532m), 갑하산(469m), 우산봉(573.8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있다.
남쪽에는 구봉산(264m), 보문산(457.3m)이 연결되어 있으며, 북쪽에는 수양산(315m), 금병산(345m), 보덕봉(263.6m), 오봉산(240m)으로
이어지는 비교적 낮은 산줄기가 발달되어 있다.
강줄기는
북쪽에는 금강이 흐르며 동남쪽 산자락에서 발원하는 대전천과 유동천은 대둔산에서 발원하여 구봉산 따라 내려오는 물줄기인 갑천과
도룡동 엑스포 과학공원 근처에서 합류되어 관암지맥의 끝자락인 불무산에서 금강에 합수된다.
산행코스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전의 동부권으로 흐르는 대전천, 유등천과 함께 나란히 달리는 산줄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보문산, 만인산, 식장산,
계족산 등 네 개의 산을 이어가는 산행코스를 일컬어 “보만식계”라 부른다.
이 코스는
보문오거리에서 출발하여 보문산,만인산,식장산,계족산을 거쳐 신탄진역까지 연결되는 58km구간으로 강산에님과 보만식계님
(다음 날 광덕산 J3클럽 산행에서 만났다)에 의해 최초로 개발 되어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장거리산행을 즐기는
전국의 등산 애호가들에게 사랑받는 코스가 되었다.
산행은 계족산 정상의 봉황정에서 회덕육교로 하산하는 코스를 선택하여 단축된 산행을 하는데 식장산에서 신탄진역까지
이어지는 나머지 구간은 도심권의 파괴로 인하여 산줄기가 주택단지를 통과하기 때문에 산행은 계족산에서 수자원공사쪽이나
회덕육교 방향으로 하고 있다.
2008년 3월 29일 다음카페 "청계산의 산방"회원님들과 함께 하였던 대전 동부권 산줄기 잇기(일명:보만식계"로 불리며 대전에 거주하시는
강산에님과 보만식계님에 의해 최초로 개척 되었다)에 참여 하였으나 체력적인 문제로 중도에(추부터널에서 종료)하차하고 나머지 구간은
다음기회로 미루고 있었으나 대간길에 �겨 차일피일 세월만 보내다 우연한 기회에 나머지 구간을 답사할 기회가 찾아와
만사제쳐두고 그 길을 가기로 하였다.
올해 초 5월2일에 출발하여 백두대간북진.낙동정맥.금남호남정맥.한북정맥을 끝내고 금남정맥을 끝내기 위해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향적산으로 향하는
이거종님의 차량편을 이용 해 19일 23시에 인천에서 출발하여 서해안 고속도로와 경부호남선을 달려 금남정맥 들머리에서 이거종님 배웅하고
부인께서 운전하는 차량편으로 대전의 남부순환도로를 달려 들머리인 추부터널 옆 만인산 자연학습장에 도착하니 익일 새벽 04시를 넘어서고 있다.
1년간의 예정으로 1대간 9정맥 완주를 목표로 하고 있는 부군의 장도에 함께 하며 차량운전과 손수발을 다하고 계시는 부인께서는
처음엔 힘들어 하시더니만 이제는 어느 산꾼 못지않은 곳곳의 들머리는 물론이고 산꾼의 산꾼들의 애환까지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비록 대간.정맥길 함께 걷지는 안해도 남편과 함께 한 마음인것을 읽을 수 있어 여간 부럽지 않는데 오늘 두 분의 도움을 받아 접근하기 어려운
들머리에 쉽게 올 수 있었으니 이 또한 두 분의 공덕이리라...
04:10 학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굳게 닫혀 있으므로 여기서 사모님과 인사 나누고 학습장도로를 따라 터벅~터벅 걸어서
만인산에서 이어 져 오는 마루금에 도달하니 시계는 04:47분을 가리키고 있다.
05:04(정기봉)
정기봉 오르는 200여미터의 산비탈은 여간 가파르지 않아 초반부터 땀 께나 쏟으나 지구가 정지하듯 멈춰버린 고요함은 바람마저 없는
한증막이라 이마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 훔쳐내기에 바쁘다.
정기봉에서 한 참을 쉬어 머들령 가는 길은 비교적 순탄한 길로 식목의 상태는 소나무와 갈참나무의 연속이나 등로는 정기봉 오름만큼
비탈길로 미끄러움에 주의해야 할 구간이다.(등로에 박혀있는 돌에 주의)
★ 정기봉에 얽힌 역사 ★
정기봉(580m) 봉화대터(正起峰 烽火臺址)는 봉화대가 있었던 곳으로 대전의 동부권 산악 중 식장산(598m)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이 봉화대는 절구통 양식의 봉화대와 봉화대 주변을 둥글레 단(壇)을 쌓아 봉화가 인근 산으로 번지는 것은 막는 역활을 하게 하였다.
이 봉화대는 한성(漢城)에서 보내오는 봉신(烽信)을 받아 서쪽으로 2km지점에 있는 만인산으로 보냈으며 만인산에서 영남과
호남으로 봉신을 보내는 삼각점 구실을 하게 하는 중요한 역활을 하였던 곳이다.
그러므로 정기봉(正起峰)은 지리적으로 역사적을 중요한 구실을 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산의 형세는 꼬깔의 모습이다)
05:59 곰넘이재
아직도 어둠이네~~
해가 많이 짧아졌나 보다..
06:14(510봉에 있는 묘지)
이 구간에는 유난히도 묘지가 많은 구간이다.
묘지를 지나 저수지를 바라보며 잠시 쉬어 간다.
06:33 삼각점
장산저수지
서대산이 웅장하다.
514봉인가?
성터의 흔적인지 알수는 없으나 정상부에 이렇게 많은 돌이 모여 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06:49
식장산은 오른 쪽으로 흐르고...
일출사진인데 해는 어디로 갓나~
06:55머들령(지도상에는 마달령으로 표시되어 있다)
마달령의 유래
영남과 한양을 이어주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옛길이며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였다
백제가 이 산 북동쪽 능선상의 마달령(馬達嶺·일명 탄현〔炭峴〕)에서 신라군을 막지 못 해 멸망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마달령은 6.25 때에도 중요한 방어선 역할을 했다.
이 때 미군 제24사단장 딘 장군이 격전 중 후퇴하다가 이 고갯길을 찾지 못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마달령은 길이 험하여 말이 이 곳을 넘어가다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처음에는 산사태로 생겨 난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근처에 이르니 토석 채취장이란 것을 알고...
저렇게까지 해야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추풍령의 금산과 육십령의 규석채취장 현장에 이은 또 하나의 자연파괴현장이다.
쑥부쟁이
07:59 국사봉(정상)
국사봉 봉화터
복원이 시급하다.
모싯대와 잔대
항상 헷갈리게 하는 놈이다.
무덤가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초롱하게 피어 있는 이 놈은?
08:31
닭재 100이터 전에 있는 돌탑.
양 쪽으로 쌓았는데 아마도 성황당 역할을 하던 곳으로 보인다.
08:37 닭재(鷄縣)
08:47성터
국사봉
지나오는 길 뒤 돌아 보면서 여운을 남기고자 한다.
곤룡터널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도로(낭월동)
식장산 남서쪽 낭월동(朗月洞)은 옛날 이곳 지형이 옥토끼가 달을 바라본다는 옥토망월(玉兎望月), 아름다운 달이 강에 잠긴다는
미월침강(美月沈江) 형국이 겹친 명당자리라는 뜻에서 생긴 마을이름이다(알파인뉴스에서 옮겨 적음)
09:35 망덕봉
목재로 만들어진 벤취에 누웠는데 잠깐동안 잠들었나 보다.
식장산
식장산은 대전의 역사와 함께 하는 산이다.
식장산의 유래
식장산의 유래는 백제가 신라의 침략을 방어하던 중요한 요새로 성곽을 쌓고 그 안에 군량미를 저장 해 두었다는 설에서 유래 하기도 하고
산에서 먹을 것이 쏟아지는 밥그릇이 묻혀 잇다는 전설에서 유해하기도 한다.
아랫글은 '창작과 비평사' 간 < 남북어린이가 함께보는 전래동화 >에 실린 글의 일 부분을 옮겨 본다.
아주 먼 옛날 식장산에는 가난하고 착한 농부가 두 아들과 살고 있었는데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근근이 살았더랍니다.
어느 날 먹을 것을 구하러 산속을 헤매던 농부는 옹기로 만든 솥 하나를 발견하고 그 솥을 등에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솥이 도깨비 방망이였습니다. 쌀 한 줌만 넣으면 솥에 밥이 가득 차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두 아들이 결혼할 때가 되자 두 아들이 옹기솥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웠습니다.
농부는 두 아들에게 솥을 먼저 찾는 사람이 임자라고 말한 다음 솥을 처음 주웠던 자리에 다시 갖다 놓았습니다.
두 아들은 하루종일 산속을 뒤졌지만 그 솥을 찾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농부 자신이 솥을 감추었던 자리로 가 보았지만 그 역시 찾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지요.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밥솥이 있는 산이라고 해서 식정산(食鼎山)이라고 부르다가 차차 식장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식기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09:54곤룡재를 지나다
서대산은 가는 길 내내 함께 한다.
10:43(낭월재)
낭월동에서 이어지는 임도는 여기에서 끊기고 산길로 이어져 동오리고개를 지나 식장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식장산은 동~서 방향으로 길게 누어 있어 오른 쪽 독수리봉(586.6봉)한다.
참고: 이정표에는 상봉으로 쓰여 있음)
식장장 중봉에 있는 시설물
하봉에 있는 시설물
마루금은 하봉과 중봉 사이에서 북쪽으로 이어진다.
참고: 여기에 적고 있는 중봉과 하봉은 시설물의 위치를 표시하고자 하는 인의적인 것으로 실제 지명하고 관계 없는 개인의 견해임을 밝혀둔다.
장중 저수지(동오리)
11:01동오리고개를 지나서
11:10분 식장산 주능선에 접어든다.
여기에서 주능선이라 함은 식장산을 말하는 것으로 오른 쪽으로 식장산의 주봉인 독수리봉이 있고 진행방향인 좌측으로 통신시설이
두 군데 되어 있는데 안보 상 설명은 피하기로 한다.
12:02 해돋이 전망대
마루금은 중봉과 하봉사이 안부에서 북쪽으로 내려서지만 식장산의 정상석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서쪽사면 9부능선을 따르니
해돋이 전망대 나온다.
안부에서 이 곳까지 400미터로 왕복하여 800미터의 발품을 팔아 이 사진 하나 건졌다.
참고: 전망대에서 조망하는 대청호에 피어 오르는 물안개와 일출이 압권이라 하고...
식장산의 정상은 북동쪽에 있는 독수리봉으로 정상석은 없으며 이정목에 식장산이라 표기되어 있다고 지나는 산님이 설명 해 주신다.
12:18
해돋이 전망대를 운무속에 조망하고 되 돌아서 마루금따라 내려오니 세천공원까지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와 함께 한다.
4km에 달하는 거리는 오락가락 내리는 이슬비에 지루하게 하더라.
고마리 지천으로 피어 있고 산챈 나온 대전의 산님들 요란한 웃음 소리에 홀로 걷는 내 발걸음은
팔자라거니 했다...
방태골의 아카시아 나무는 수명이 다한 듯 고사목으로 서 있다.
아카시아나무는 수명이 40년으로 자연적으로 죽는다는 것을 어느 서적에서 읽어본 것 같다.
13:03
보만식계 구간 중 독도가 가장 난해하다는 세천공원에 도착한다.
15:24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산천골에 들려 동동주(6.000)에 청국장(5.000)시키고 신발은 벗으니 비에 젖는 발에서 나는 냄새 고약하고...
목구멍을 타고 벌컥~벌컥 넘어가는 동동주 마시는 소리는 그 동안의 갈증을 한방에 날려버리지만 억세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나머지 구간이 걱정되어 진다.
둘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청국장에 밥 말아 먹으며 주인장에게 이 곳의 기후에 대해 물으니 이렇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그칠 비가 아니라 하니
남감하여 산행길 포기 하기로 하고 유종선 선배님 만나서 소주나 한 잔할까? 하여 핸폰 넣어 보니 "가는 날 장날"이라
서울에 친구따님 결혼식에 갔다고 하니 이마저 여의치 않더이다.
화장실 한켠 빌려서 사워하고 옷 바꾸입고 마지막 잔 비우면서 남아 있던 비상식 주인댁 아드님(중1)에데 나누어 주고 대전역 가는 버스 있느냐?고 물으니
동신고등학교 앞에까지 테워다 주겟다고 하는 주인장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밖으로 나서는데 거짓말 같이 빗줄기 그치고....
10여키로 남아 있는 산줄기 언제오랴 ? 싶어 다시 산행길로 접어 드는데 이 때부더 본격적인 고생길 시작 되더이다.
비 그치고 식장산에는 운무가 자욱하다
줄골마을에서 갈고개까지 이어지는 마루금 난해하여 나름대로 정리하여 올려 보기로 한다.
위로 두 번째 사진 경부고속국도를 통과하면 오른 쪽 그림 나오고 더 진행하면 4번도로 나오는데 마루금은 왼쪽의 능선으로 이어지지만 고속도로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도로를 따라 줄골마을로 우회 해야 한다.
15:35 동신고등학교 앞 횡단보도(a)를 건너서 왼쪽도로를 따라 300여미터 진행하면
15:50 동장승 나오고 왼쪽으로 쌍계당공지사(b)가는 나타나면서 마을로 접어든다.
15:59 쌍계당공지사(c)우측 마을길을 따라서
15:44세천에서 이어오는 마루금이 지나는 고개(d)에 이르러 좌측의 언덕으로 오르면 마루금 따를 수 있다.
그러나 길이 험하므로 비포장 임도를 따라 갈고개까지
이동한 후 마루금에 접근하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이 마을에는 괴상하게 생긴 꽃이 많은데 이름은 모르겠고...
땅으로 향하는 꽃망울 이쁘기도 하여 한 컷 올려본다.
하늘이 벗어지자 식장산이 자태를 뽐 내는데 산정의 괴물은 흉측스럽기만 하다.
16:37
철탑 세운답시고 임도내고 산 허리 자르고..
우리집근처 한남정맥에도 재건축 한답시고 멀쩔한 철탑을 옮기다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어 흉칙한 괴물로 서 있는데
인천시는 철거할 생각 꿈에도 안 가지더라..
개인의 재산권에 해당된다고 하여서리...
16:43
나머지 구간 얼마나 남았는지 체크 해 보고..
가는 길은 거미줄처럼 엉켜 있지만 큰 길만 따라 북쪽으로 진행만 하면 되니께 길 잃을 염려 없어 방심 했다가
길치고개 지나 능선(9시방향으로 오르지 못하고 고봉산으로 가는 사고를 저지르고 말더라.
되 돌아 오는 길까지 20여분 알바함
비 맞은 초롬한 코스모스
가을의 전령인가?
16:52 능선산성(기념물 제11호)
가양산 뒷 산 비름들 뒷 들에 있으며 돌로 쌓은 산성이다.
성내에서 백제시대의 토기파편이 발견 되었고 신라를 감시하던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터에 있는 안내문의 일부를 옮겨 적다)
산성터에 있는 괴석.
마치 다정한 두꺼비부부 마주보고 사랑을 속삭이는 듯 하다.
15:13
갈치고개를 지난다(현 갈치고개는 이 곳에서 200여미터 지나 차량이 소통할 수 있는 도로로 개설되어 있다)
혼자 걸어도 외롭지 않는 멋진 길..
18:29
절고개를 지나 10여분 후 무덤이 있는 성재산과 계족산 갈림 능선에 도착하나 잠시 혼동하여 성재산 방향으로 알바를 한다.
16;41성재산
알바 후 되 돌아 오는 길에 붙잡아 보는 절고개 방향의 능선은 운무로 가득하다.
진행해야할 계족산 방향으로"다 왔다" 했는데 수 없이 반복되는 봉우리 넘기는 닭발의 마디처럼 많기도 하더라.
19:24 용화사 갈림길을 지나 계족산 정상에 오르다(하산은 봉황정을 경유 해 되 돌와 옴)
계족산의 유래
계족산(鷄足山·423.6m)은 백달산, 봉황산, 계산, 백계산이라고도 부르던 산으로, 대전의 진산이다.
<회덕현고지도> <회덕읍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문헌비고> <세종실록지리지> <고려사> <산경표>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조선전도> 등에
모두 이 산을 계족산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오래 전부터 계족산이라고 부른 것 같다. 따라서 이 산의 대표적인 산 이름은 계족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회덕현 산천조와 <세종실록지리지>에 ‘계족산은 회덕현(지금의 대전시 대덕구 회덕동 일대) 동쪽 3리에 있는 회덕 고을의 진산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날이 가물 때 이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했고, 고적조에 ‘계족산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969척이고, 높이는 16척이다.
성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봉수조에 ‘계족산 봉수는 동쪽으로는 옥천군에 있는 환산(環山)과 응하고,
북쪽으로는 문의현에 있는 소이산(所伊山) 봉수와 서로 응한다’고 기록했다. (대전의 변천사에서 옮겨적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대전시내의 야경이 현란하다.
보만시계의 산줄기 이어지는 신탄진방향으로 진행하다 수자원공사로 하산하려고 하였으나 어둠속에 빗길이라 용화사방향의 최단거리로 하산을
하기로 한다.
계족산에서 봉황정으로 내려서 정각을 둘러보고 대전의 야경을 감상하면서 현판의 내용문 어둠이라 읽어 보지 못하고 사진에 담은 후
용화사 내여오는 길은 목계단의 설치라 어려움 없지만 장거리 산행에서 오는 무릎의 심도는 강해 져 고심하지는 마찬 가지인데...
묘령의 여인 홀로 조용히 계족산에 오른지라 ...
먼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 건네니
짧게"네"라는 답변 뿐이라...
이 시간에 평상복 차림으로 어둠과 빗속을 가르며 산에 오르는 여심을 가름할길 없더라...
봉황정(鳳凰亭)
봉황정은 1991년11월에 준공되었으며
봉황정 입구에는 정향 조병호(靜香 趙柄鎬)선생의 글인 '봉황정(鳳凰亭)' 현판이 있고,
내부에는 장암 이곤순(長巖 李坤淳)선생의 글인 ‘봉황정기(鳳凰亭記)’ 현판이 있다.
봉황정 입구에는 정향 조병호(靜香 趙柄鎬)선생의 글인 '봉황정(鳳凰亭)' 현판이 있고,
내부에는 장암 이곤순(長巖 李坤淳)선생의 글인 ‘봉황정기(鳳凰亭記)’ 현판이 있다.
봉황정기(鳳凰亭記)
옛부터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하였듯이 대덕구는 산천(山川)이 수려(秀麗)하고 풍광(風光)이 명미(明媚)하여 삼국(三國)이래
장원(長遠)한 역사 위에서 수다(數多)한 충신열사(忠臣烈士)와 진신명공(縉紳名公)을 배출한 호서(湖西)의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뿌리를 내렸으니
이는 이 고장의 배산주령(背山主嶺)으로 의연히 솟아오른 계족영산(鷄足靈山)의 정기(精氣)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계족산은 천년(千年)을 유유히 흐르는 금강(錦江)을 옆에 끼고 한반도의 중악 계룡영봉(中嶽 鷄龍靈峯)과 조응(照應)하여
금병산 식장산 보문산(金屛山 食藏山 寶文山)과 손을 잡아 한밭을 옹위하는 주인(主人)이 되었다.
멀리서 우러르면 흡사 봉황(鳳凰)이 단좌(端坐)한 모습이어서 고인(古人)은 봉황산(鳳凰山)이라 불렀다지만 어떤 현인(賢人)이 그 보배로움을
감추기 위(爲)하여 불교(佛敎)의 성산 계족(聖山 鷄足)으로 개칭하였다던가?
신라와 상계(相界)하여 기름진 호서(湖西)를 수호하는 백제의 국방요충지로서 한 몫을 다하여 상기도 그날의 성곽과 봉수대가 빛바랜 모습으로
지난날의 갖가지 사연을 전(傳)해 준다.
가까이 그 산마루에 올라 활원하게 펼쳐진 삼남(三南)의 웅도(雄都) 한밭을 굽어보면 일망대해를 바라보듯이 우리의 세간생활을 초연히 살필 수 있어
호연지기(浩然之氣)와 함께 별세계에 자리한 장쾌감을 느끼게 한다.
대전(大田)의 중앙(中央)을 응시하며 식장산과 금병산을 좌우 산맥으로 삼고 보문산(寶文山)을 안산(案山)으로 눌러 이 산마루에 천하명당(天下名堂)을
찾아 구민의 정성으로 팔각(八角)의 정자를 세워 앉히니 이를 봉황정(鳳凰亭)이라 이름하였다.
이 산의 고명(古名)을 따오기 보다는 이 정자의 자리한 모습은 진정 봉황이 나래를 펴 내려앉을 듯 날아오를 듯한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현인(賢人)이 계족(鷄足)으로 개칭한 것은 오늘날 이 산마루에 봉황정(鳳凰亭)이 우뚝히 앉아 있으리라는 지혜로운 예견에서 그러했던가?
이 정자가 비록 현대의 건축물이나 고전적 전통미(古典的 傳統美)를 그대로 살리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자태를 보이니
태평성대에 성인(聖人)이 출현(出現)해야 그 모습을 보인다는 봉황이 부활한 듯 하다.
뭇 닭 속에 한 마리 봉황같은 이 산(山)의 정자 위에 속진(俗塵)을 털고 애써 오르면 봉황을 타고 선계(仙界)에 내리는 듯 멀리
사바세계를 내려보며 구만리 고해를 건너는 듯 황홀한 장쾌감에 휩싸이고만다.
고요히 인적이 끊어지면 산신(山神)이며 선녀들이 온갖 새 짐승들과 어울려 놀만하고 다시 여명이 트면서 우리 구민들이 올라가
이 고장의 전통(傳統)과 윤리(倫理)를 되새기고 시민정신(市民精神)을 새롭게 다짐하는 광장이 되리라.
길 잃은 사람들에게 표지가 되고 오욕에 눈 먼 사람들을 멀리 보게하며 세파(世波)에 시다린 사람들에게는 안락(安樂)한 휴식처가 될 것이다.
이 정자가 세워진 후로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를 면하여 이 산(山)과 함께 영원(永遠)하고 우리와 함께 빛나기를 빌며 이 글로 써
그 창건(創建) 연유를 밝혀 길이 후세(後世)에 알리고자 한다.
서기 1991년辛未11월 일
대덕구청장 (大德區廳長)송일영(宋日永) 짓고 장암 이곤순( 李坤淳)쓰다
19:54
용화사이정석와 남근석이 대조를 이룬다.
20:10
그 후
용화사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길 따라 걸으니 산중골방죽(저수지) 물위에 떠 있는 야광찌 반딧불처럼 빛나고
숨 죽이며 일전을 불사르는 낚시꾼들의 긴장감이 전해 져 오는 느낌은 안고 즉석순두부가 유혹하는 거리를 지나 경부고속국도 지하차도를 지나서
회덕육교 오르고 724번 시내버스 타고 대전역에 도착 21시46분 KTX이용 해 서울역에서 인천행 지하철로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후기
이로서 보만식계를 끝 냈나 보다
계족산에서 금강과 갑천이 합수되는 두물머리까지 이어 가지는 못했지만 8~9km정도 남아 있는 그 길은 짬을 내어 유종선 선배님과 함께
걸어 보기로 약속 하였는데 그렇게 이어 진다면 금남정맥 육백고지에서 분지하는 식장지맥이 될 것이다.
청계산님과 함께 이 길을 시작 했던 3월의 처음길은 회복되자 않은 건강으로 추부고개에서 접으면서 한 번에 끝내 버리는 건각들을
바라보며 부러움으로 가득 했지만 나 자신 2회차로 완주한 것에 대해 만족함을 느낀다.
갑천과 유동천을 따라서 끊어질듯 이어지는 산줄기의 매력은 식장산의 전설과 계족산의 유래와 맞물려
이어져 오는 전설이 재미 있었고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로서 영남에서 대전으로 진입하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마달령(머등령)을
넘나들던 과객들의 숨소리 들리는 듯 하였고 육이오 때는 이 곳을 사수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던 아군과 인민군의 사생결단의
아품이 고스란히 전해 져 오는 느낌을 받았다.
한밭에서 대전으로 지명의 변천을 거듭해 온 거대한 행정도시의 동부권 산줄기 이어가기를 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가질 수 있어
행복하고 대전에 거주하면서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선답을 해 주신 강산에님.재넘이님.리베라박님.유동훈님. 보만식계님등의 노고를 대전을
떠나 오면서 회상 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도 줄거움이다.
다만
세천에서 산행을 접을 생각으로 샤워하고 옷 갈아 있고 다시 산행길 나섰다가 새앙쥐되었으나 갈아 입을 옷 없어 땀에 절고 비에 젖은 옷과
신발로 차에 올라 옆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에 대한 미안함 남기며 보만식계 마지막 구간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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