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08년8월30일 음력8월1일 날씨:맑음
산행자: 이거종님과 나
산행지: 견두산 (견두지맥)
산행코스: 정령치~요강바위~다름재~영제봉~밤재~견두산~내호곡리
접근거리:1.9km,도상거리:10.5km,하산거리:2.6km=산행거리:15km
산행시간:10시간37분
개요
이 산줄기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나누어 지는 구례군의 산줄기 중 북부권인 지리산의 변방에 속하는 지맥으로 만복대에서 분기되어
병방산으로 이어지는 서남줄기를 말한다.
백두대간의 만복대를 시작으로 하여 견두산을 지나 병방산으로 이어가는 서남줄기와 지리산의 주능선을 따르다
화개재에서 가지 내리는 불무장등.통꼭봉. 황장산 줄기의 내경에 속하는 산지를 북부권이라 하고 섬진강 남쪽에 위치한
문전면과 간전면은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분기하는 호남정맥을 따라서 조계산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 아래에
속하여 남부권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기술하는 산줄기는 서남방향으로 흐르는 산줄기로 북쪽으로는 요천이 흐르는 남원시와 경계(전라남북도경계선)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섬진강이 흐르는 곡성군과 경계를 이룬다.
지리산의 유명세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산줄기이지만 이 줄기를 따라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살아온 이 고장 사람들이
살아 온 과정은 너무나 치열해 지나간 우리 역사의 한페이지로 살아 움직인다.
임진왜란 때는 왜적의 침입에 항거한 의병들이 의로운 죽음이 있었고 개화기 때는 관군에 의해 학살당한 동학혁명군의 죽음.
전란 때는 빨치산의 활동무대로 시대마다 남겨놓은 아픈 역사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가지줄기 따르는 계곡마다 절경이라 수많은 기인들과 도인들의 기도터이고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봄직한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곳이기에 혹자들은 어머니품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한다.
섬진강을 중심으로 북부권과 남부권으로 나누어지는 구례는 백제시대에는 구차례(求次禮)현이라 부르다가 신라경덕왕 때
“구례현”으로 이두문화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구례”의 뜻은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으며 기름진 땅을 뜻하는 “고래실”이 전라도의 사투리로 표현되어
(구레실~구레논~구렛들~구례)로 되었다.
“택리지”에서도 구례 땅은 비록 “들은 좁지만 농산물의 수확은 많고 골짜기 물이 마르지 않으니 가뭄 타는 일이 적은 곳이다”
라고 하였다.
★ 이 줄기에 대한 뚜렷한 지명은 정해지지 않은 듯하다.
이미 답사를 마친 분들에 의해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나 이 줄기에서는 견두산이 맏이노릇을 하고 있으므로
"견두지맥"이라 함이 어떨까?" 하는 것은 나의 견해일 뿐이다 ★
산행글
이 번 산행은 오래 전 부터 계획하였던 산줄기로 8월6일 시도하였으나 실패 하였던 곳이다.
이 번에는 금남호남정맥을 마치는 이거종님과 동행하기로 하고 인천에서 29일23시 출발하여 산행일 05시30분 정령치에 도착!
차 안에서 잠시 눈 붙이고 산행을 나선다.
06:23
산행준비 완료.
이거종님 사모님은 구례로 가시고 우리는 산길로 출발...
요강바위까지는 산행글 생략하기로 한다.
이슬을 머금은 산오이풀의 도열을 받으며 가는 새벽길은 상쾌함만이 가득하다.
07:04
엉컹퀴(?)
요강바위
07:43
월계재.
다름재로 착각하게 만드는 곳이다.
이 곳은 주천면 고기리 선유폭포와 산동면 위안리 월계를 이어주는 엔골이라 부르는 계곡으로
산동에 거주하는 원주민에게 들어 지명을 알 수 있었다.
솔봉능선 분지봉(1044m)
왼쪽의 가지능선은 지리온천방향임.
8월6일 첫 번째 산행 때 이 곳으로 진행!
지나온 방향
엔골과 차일봉능선
서시천이 발원한다.
서시천(西施川)
진시황의 사신으로 동방의 나라에 가 불로초를 캐 오라는 명을 받은 西施가 불로초를 찾아서 200여명의 무리를 데리고 지나간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전설이 있는 서시천은 월기천.둔기천.무은천.백련천 등을 거느리고 구례의 동부권의 경작지를 만들어 놓은 젓줄로서
병방리에서 섬진강에 합수 된다.
섬진강(蟾津江)
금남호남정맥 천상데미 아래 데미샘에서 발원한다.
삼국시대에는 “모래가 곱다”고하여두치강(豆恥江,豆直江)·모래가람·모래내·다사강(多沙江)·대사강(帶沙江)·사천(沙川)·기문하 등으로 불렸으나
고려 우왕11년 섬진강 하구에 왜구가 침입하자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 쪽으로 피해 갔다고 하는 전설이 있어
이때부터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이라 했다고 한다.
섬진강은 전라좌도와 우도를 나누며 문화권까지 변화시키는데 대표적으로 판소리의 동편제와 서편제가 그 것이다.
만복대와 차일봉능선
이정도면 신선이 된 기분~
솔봉능선(솔봉)
다름재1044봉에서 분지하여 구례군 산동면 효동리에서 서시천을 만난다.
노고단과 종석대
08:17
월계재의 키를 넘기는 잡풀과 가시덤불을 피해 잣나무숲으로 우회하여 1112봉 정상에 도착
물 한모금 마시며 갈증를 달랜다.
다름재 가는 길에 잠시동안 걸어보는 습지대
08:40
다름재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와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를 이어주는 재넘이로
남원시 운봉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동학군의 이동로였고 운봉전투에서 관군에 패한 후 산동으로 퇴각하던 고개이다.
다름재와 숙성치 사이에 있는 영제봉에서 발원하는 계류에는 수락폭포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다름재에서 엔골로 이어지는 용추천계곡
08:48
솔봉능선 갈림길.
여기에서 왼쪽으로 솔봉능선(지리온천방향)이 분지한다.
하늘을 가리는 잡목지대이므로 독도에 주의해야할 구간임.
8월6일 산행 때 0우는 소리에 놀라 표지기(대부분 솔봉능선방향으로 메달려있음)믿고 따르다 지리온천으로
내려갔었다.
능선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진행.
일명:1050봉
영재봉(오른쪽 끝 부분이 정상)
산동은 구름이불 덮고 코 자는 중.
오른쪽부터
877.9봉.솔봉.밤재.견두산
어라! 백운산이 보였는디....
어데로 갔나....
어데로 가???
길 찾기
남원시
(1050봉에서 분기하는 가지줄기는 주천의 육모정을 지나 덕음봉으로 이어져 광한루원 앞 요천으로 뿌리내린다)
장수군 수분리에서 발원하는 요천은 남원시를 관통하여 섬진강으로 합수된다.
60여전만 하여도 섬진강을 따라 남원까지 소금배가 들어오는 뱃길이 있었고 강 건너기를 해 주는 교통수단으로
남원과 함께 전라좌도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젓줄이었다.
차마고도가 전해주는 느낌과 함께...
(참고사진)
나룻배를 이용 해 요천을 건너고 있다.
09:13
영제봉(靈帝峰)
이 봉은 지도상에 표기된 877.9봉 아닌 1050봉으로 헷갈리게 하는데 지역주민들은 영제봉이라 부르고 있다.
(주천면사무소 산림담당자(1049봉이라함)와 용궁리 이장님께 알아본 결과임)
영제봉의 유래를 살펴보기 전 산자락 서쪽방향 골짜기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용궁리마을부터 알아 보는 것이
영제봉을 이해하는데 있어 도움이 될 것 같다.
영재봉 북서쪽 골짜기에 신라 진덕여왕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부흥사"라고 하는 절이 창건되고
고승과 선사들이 드나들고 신도들이 찾아들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지상의 용궁"이라 칭하여
산신제 및 당산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는데 산신제를 지내던 산이름은 "산의 형세가 신령스러운 제왕 같다" 하여
영제봉(靈帝峰)이라 하였다.
신령스러운 제왕의 봉우리라 하여 신성시 한 것은 산악신앙의 하나인 토테니즘에서 볼 수 있는
성기숭배 사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 부흥사는 불 타 없어지고 그 자리에 "파근사"가 들어섰지만 정유재란 때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사찰의 흔적만을 전해 주는 주초석과 기와 파견만이 옛날의 영화만 전해 줄 뿐이다.
1.용궁리주민들은 기우제를 이 곳에서 지냈다고 전해 진다.
2.여인들이 이 곳에다 소변을 보면 아기를 점지 해 주고 ...
가뭄때는 비가 온다고 하여 한 때는 성시를 이루었는데...
찌른 내 진동하였다고...
3. 부흥사 스님들도 이 곳을 신성시 했다고 하는데 훗 날 몇 몇의 스님들이 불공드리는 것은 뒷 전이고 젯밥에 눈이 어두어
중생들 하는 짓! 서슴치 않으니 고승들이 분노하여 사찰을 불태워 버렸다는 설화를 듣고..
........................
에이~ 설마 그랬을리가...
라고~했다..
수락재
며느리씻개.복분자.칡.이름모를 가시덤불이 뒤엉켜 있어 정상등로 통과하기가 불가능하다.
수락재 방향으로 내려서 길 없는 사면을 치고 오르니 옷 들이 엉망이다.
이거종님 셔츠 찢어진지 오래이고.
7.000원 주고 산 피에르가르뎅 쿨~맥스 내 것도 너덜거리기는 마찬가지네~~
대간길에도 입고 하여 정 들었는데...
정들자 이별이라..
임무수행 하느라 고싱혔~다.
영제봉에서 급경사 등로를 내려서 만나는 수락재에서는 9시방향으로 수락폭포 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영제봉과 솔봉능선으로 산행하는 분들이 많다.
10:37
지도상에 표시된 영재봉(877.9)의 정상이다.
1050봉의 정상부가 여성의 음부를 나타낸다면 이곳은 교접하고 있는 상태이다.
스님들이 신령스럽다고 한 곳이 여기가 아닐까?
사고는 자유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곳을 영재봉으로 보고 싶다.
지도상에도 이 곳을 영제봉으로 표시 해 놨으니..
참고로 1050봉은 "지사봉"으로 표시한 지도도 있음(지리산관광안내지도)
솔봉
수락골(수락폭포가 있는 곳)
무성한 잡초에 덮혀버린 墓
후손들이 이 곳에 올라 벌초하려면 고생깨나 허것다~~
솔재(길주의)
여기서 직진으로 10여분 눈뜨고 하는 알바를 하게 된다.
솔봉의 7부능선을 돌와 오는 것은 생각도 안하고 직선길로 내려섰으니...
나무로 막아놓아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넓다란 사면길 의심하지 말고 진행하면(표지기있음) 임도처럼 넓은 길 나타나
용궁리 능선 내려서는 삼거리까지 오솔길 걸어가듯, 구름에 달 가듯이 걸을 수 있다..
※ 진직은 원동리마을로 내려가는 540봉능선길.
참취
영지도 만나고
숙성치로 착각했던 곳.
편의상 작은 숙성치로 부른다.
11:37 길주의
삼거리 쉼터
오른쪽은 용궁리로 가는 가지줄기로 반드시 왼쪽으로 진행하여야 함.
여기서도 전라남북도경계선으로 착각하여 잠시동안 알바함.
12:16
숙성치(518m)
남원시 주천면 용궁리와 구례군 산동면 계천리를 이어주는 옛 길로 구한말 밤재를 통과하는 신작로가 개설되기 전 까지
구례군과 남원군을 연결 해 주는 중요한 구실을 하던 고개로 밤재에 그 명성을 넘겨줬으나. 임란 때는 이 고개를
지키기 위한 의병들의 치열한 전투와 동란 때 빨치산으로 활동무대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12:23
밤재의 구도로와 만나는 숙성치의 옛길.
묘한 기분은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수 백년을 사용해 오던 숙성치의 옛길이 일제 강점기에 개설된 밤재의 신작로에 그명성 넘겨 주었으나
밤재는 신밤재의 2차선 터널로 바톤을 넘겨주고 숙성치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
우리는 오늘 수 백년을 이어 온 도로와 100여년의 짧은 역사을 가진 밤재의 도로를 모두 걸어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신밤재 터널위를 걷고 있으니 어찌 묘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도로를 따라 밤재까는 시간은 20여분 남짓하다.
12:38
밤재(495m)
남원시 주천면 배덕리와 구례군 산동면 계척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밤나무가 많다고 하여 지명되어진 이름이다.
.
남원시에는 두 곳의 밤재가 있으며 앞밤재와 뒷밤재로 부른다.
남원과 산동을 넘나드는 고개를 “앞밤재”라 부르고 남원에서 전주를 이어주는 고개(춘향이고개)를 “뒷밤재”라 부른다
밤재를 지나던 2차선 도로는 1998년 편도2차선의 2개의 터널이 뚫리면서 숙성치와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져
등산객과 약초나 나물꾼들만이 찾아오는 쓸쓸한 곳이 되었다.
우리는 신작로에 앉자서 맨발의 청춘이 되어 간식도 먹고...
그랬다.
13;07
오랫동안 쉬었다 견두산을 향해 출발...
14:02
산동면 산님들의 호의에 잠시동안 쉬어 가기로 하였다.
주변에 나무로 만든 벤취가 있음.
견두산 가는 길은 이러한 형태의 소나무가 많다.
02:33
삼각점(개척봉 정상으로 보임)
산수유로 유명한 현천리로 내려가는 등로있음
견두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시덤불이 성화를 부리는 안부를 지난다.
수지면 고평리마을 넘어 개동지맥의 끝 부분에 해당하는 남원의 고리봉과 문덕봉이 아련하게 조망된다.
고리봉 아래 남원시 대강면 하도리에서 요천은 섬진강과 합수된다.
저수지 왼쪽마을이 몽심재가 있는 내호곡이다.
토끼들의 배설물.
이렇게 많은 것은 처음으로 본다.
견두산은 토끼배설물로 등로밟아가기가 지뢰밭 피해 가듯이...
냄새또 한 지독하여서리..
중얼거려 본다.
.................
범머리산이 호두산으로 되었다가 개머리산으로 바뀌어 견두산이 되었듯이
이제는 토끼산으로 불렀다가 묘산으로 바꾸어야겟네~~
지금은 토끼떼가 주인이니....
이 형상을 보고 견두산이라 지명하였다.
(잠자는 개의 모습)
오늘 구간에서 유일한 사다리 오르기.
견두산 마애여래입상 (犬頭山 磨崖如來立像)
수지면 고평리 견두산 정상부근 거대한 바위에 새겨져 있는 이 불상은 무릎이하부분이 결실되어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우나 연꽃을 새긴 좌대를 포함한 전체의 높이는 3.2m 에 이른다.
반원모양의 눈썹과 약간 치켜 올라간 듯한 눈, 두툼한 코, 꽉 다문 입이 전체적으로 딱딱한 느낌을 주지만 신체는
크고 우람하다.
특히 코와 입이 붙어있는 듯한 매우 짧은 인중, 이마에 뚜렷한 백호, 그리고 육계를 모자를 쓴 것처럼
두툼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깊이가 얕고 가느다란 선에 가까운 조각기법과 커다란 신체, 손모양, 꽉다문입, 살이 찐 얼굴 등 남원지역
마애여래불상의 특징을 담고 있으며 제작연대는 고려시대 전반~중반경으로 추정된다.(옮겨적음)
15:42
견두산(犬頭山)
원래는 범머리산(호두산)이었으나 후에 개머리산(견두산)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전설에 의하면 들개들이 떼지어 살면서 한 마리가 짖으면 수 백마리가 한거번에 짖어대 산이 울리고 땅이 뒤집힐 지경에 이르고
그럴 때 마다 호환(虎患)이 있어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가거나 화재가 있어 많은 인명피해와 집이 불타는 괴변이 일어 났나고 한다.
이러한 호환은 막기위해 고심하던 중 전라도과찰사 이서구가 부임 해 오면서 남원부사에게 명하여 호석을 설치하도록 지시한다.
호두산(虎頭山)을 견두산(犬頭山)으로 바꾸고 개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은 호랑이인지라 광한루원 완월정에서 서쪽방향에 설치하고
수지면 고평리에도 호석을 세워 견두산을 바라보게 하였는데 이 때부터 호환과 재난이 없어졌다고 한다.
(참고사진)
호석(광한루원 완월정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광한루원이 확장되기 이전에 시장터였던 곳에 호석을 설치하였던 관계로 광한루원이 확장 되기 전 까지는 호석거리로 불렀다.
서.남으로 흐르는 견두산줄기의 동쪽으로는 산수유마을로 유명한 현천이 있고 서쪽에는 고평리와 호곡리(내호곡(홈실),
외호곡("곡"은 "실"에서 왔다)이 있다)가 자리 잡고 있는데 내호곡리에 호(號)를 연당(蓮堂)이라 하는 竹山朴氏(1753~1830)가
세웠다고 하는 몽심재(夢心齋)가 있는데 옆에는고려충신 정몽주.이색과 더불어 삼로(三老)로 불리던 두분동72현 중
한분이신 박문수의 후손인 竹山朴氏 宗家이다.
개머리를 닮은 암봉이 있는 봉
이꼬들빼기?
淑夫人南原尹氏之廟(구례군에서 세운 정상석 옆 자연석에 새겨놓은 비문)
사연이 있을 것 같아 수소문 하여 아래와 같은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
묘지의 주인은
조선조 정3품 통정대부 벼슬을 지낸 竹山朴氏 在鉉의 부인으로 숙부인의 칭호를 받았으며
남원윤씨집안의 여식이다.
남편과 합장하지 못하고 산정에 모신 사연을 아래와 같이 전해 져 온다.
견두산과 천마산 줄기는 금장지지(禁葬之地=매장을 금지하는 땅)으로 누구라도 묘를 쓸 수 없었으며 더군다나
견두산은 石山이었다.
그러나 돌들로 가득 채워진 견두산 산정에 5척단신의 한 사람만 누일 수 있는 명당의
묘지터가 있는지라 죽산박씨 집안에서 고을 사람들에게 告하기를 묘지를 쓴 후 100일 안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묘를 이장하겠다는 확약을 하고 묘지를 쓰게 되었다.
묘지를 쓰고 돌아오는 길에 곧바로 빗줄기가 내리니 그 당시가 가뭄이라 고을 사람들이 하늘이 우리를 돕는다고
여간 기뻐하지 않아 오늘날까지 묘가 정상에 있게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농사와 관련한 비가 오는 것이 가장 중요하여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라
이 지방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 가뭄을 걱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죽산박씨 종손이신 박인기님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글임)
견두지맥줄기
천마산~천왕봉~형제봉~갈미봉~병방산으로 이어간다.
우리는 이 줄기를 이어가야 하나 이튼 날 금남호남정맥을 끝내야 하는 이거종님의 산행거리가 만만치 않아 호곡리로 하산하여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고평리 마을로 이어지는 임도길(극랙이골)
빈대 때문에 없어진 극락사(極樂寺)
견두산 북쪽 자락인 고평리 골짜기에 있었던 극락사는 백제시대에 창건한 사찰로 규묘가 큰 절이었으나
,빈대 때문에 페허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찰에 빈대가 어찌나 많은지 스님들이 배겨 날 재간이 없자 어느 스님이 사찰을 불태워 벼렸다는 이야기인데...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지금도 고평리 사람들은 “극락이골 또는 극랙이골“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극락사에서 유래되었다.
17:00
견두산 정상부(하산후 신덕리마을에서 차 오시 기다리며 찰칵)
견두산에서 내호곡마을까지 내려오는 2.6km숲길은 한적하였고 ...
이 길은 수지초등학교 학생들이 견두산으로 봄소풍 다니는 길이기도 하다.
17:50
몽심재(夢心齋) 중요민속자료149호
고려충신인 정몽주.이색과 더불어 "三老"로 불리다 고려가 패망하자 두문동에 은신하면서 남원군 수지면 초리가 고향인 그의 부인 김씨를
자손들과 함께 초리방에 내려보내면서 代를 잇게 한 송암(松庵)박문수의 후손이 건립한 것이다.
초리방에 거주하던 그의 12세 후손인 박시채집안에 재화가 끊이지 않자 아들 4형제와 당질을 데리고 호곡리로 이사를 와
거주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이 집안은 만석군이 되어 죽산박씨 연당(蓮堂)이란 분이 몽심재(사랑채)를 세우고 이 곳을 통 해
남원골로 넘나들던 과객들에서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라 한다.
이러한 선심 덕택인지 풍수지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죽산박씨 가문은 도인의 배출로도 인연이 깊어
원불교 敎務(원불교에선 출가한 성직자를 “교무”라 부른다) 40여명과 박사26명, 기술사6명.법조인2명 등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몽심재 옆 죽산박씨 종가집에는 후손인 박인기씨가 거주하면서 관리하고 있다.
(견두산과 연관되는 내용이기에 기록하였음)
후기
네발도 부족 해 스틱까지 동원한 여섯발로 헤쳐도 끝 없이 나타나는 가시덤불과의 싸움은 고통스럽기까지
했지만 오랫동안 계획했고 마음 껏 휘젖고 다닐 수 있었던 산행이라 기쁜마음 충만하다.
함께 한 이거종님 준족이라 걱정하지 않아 좋았고 오지산행이 전해주는 강렬한 느낌에 동반되어 영재봉의 신비스러운
암릉과 구름바다는 오늘 산행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이러한 행운의 순간은 연속으로 이어 져 몽심재를 둘러보는 보너스와 함께 광한루에서의 남원추어탕!
진안으로 이동하여 만사태평님과 한산님이 차려주는 광어회와 기상천외한 잠자리...
다음날
마이산에서 이거종님 정맥길 보내드리고 두타행님 합류하여 대덕산 계곡에서 이어지는
끝 없는 산이야기 있어 좋았고....
전주로 이동하여 백두대간 끝내신 장영옥 선배님 만나서 좋았고...
이어지는 회식자리까지에 만수후배까지 참석하여 좋았는데...
20시30분 전주를 출발하여 다음날 새벽 03시에 인천에 도착하는 시간은
지루하더라....
운전하시느라 고생하신 이거종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스크랩] 천마산 가는 길-견두지맥 2회차- (0) | 2008.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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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만식계] 대전의 동부권 산줄기를 찾아서 - 2회차-(終) (0) | 2008.09.22 |
강남9산 (시계)종주 -1구간- (0) | 2007.12.20 |
[스크랩] 호남정맥7구간(천치재~방축재) (0) | 2006.12.12 |
주줄산(주화산)에서~마치재까지 8일간의 기록! (전북의 산수) (0) | 2006.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