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운문산의 고찰!

㉡ 지명과 유래

by 운해 2009. 5. 14. 20:26

본문

운문산! 위치에 대한 고찰


문헌과 고지도에 나타나 있는 운문산과 현재의 운문산을 비교 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을 쓰기까지 운문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고민하다 상이한 점이 발견되어 아래와 같이 정리 해 보기로 한다. 

이 부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함께 연구하여 운문산이 제 위치를 찾기 바랄 뿐이다.


 1 문헌에 나타나는 운문산.

☞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청도군편과 읍지류 청도군편을 참고 하였다

 

1)동국여지승람 산천편에서

운문산(雲門山)은 군(청도)의 동쪽 96리에 있다. 오혜산(烏惠山) 군의 동남쪽 31리에 있다.하였다.

  

2)읍지류 청도군편에서

買田部曲卽買田驛地 北谷部曲東二十五 釜谷部曲北十五(山水)鰲山南二里東有高沙洞南有磧川寺雲門山東九十六里

慶州界古稱鵲岬山勢高峻(매전부곡은 바로 매전역마을이다.북곡부곡은 동쪽 이십오리에 있고 부곡부곡은 북쪽 십오리에 있다.

 오산은 남쪽 이리에 있으며 청도의 진산이다. 동쪽에 고사동이 있으며 남쪽에는 적천사가 있다. 운문산은 동쪽96리에 있고

경주와 경계이다. 옛 지명은“작갑산(鵲岬山)라 하였고 산세는 높고 험하다

...........................

雲門川東九十里源出雲門山及彦陽下北面界北流爲若耶溪(운문천은 동쪽으로 90리에 있고 발원지는 운문산이며

언양군하북면과 경계로 북류하고 윗 쪽은 약아계이다)

-이하생략-


2.운문사의 연혁

 

☞삼국유사 제4권 보양이목(寶壤梨木)를 참고하였다(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운문사에서 수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557년(신라진흥왕18년)한 고승이 도우(道友)10여 인의 도움으로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 남쪽에 천문갑사.북쪽에 소보갑사,중앙에 대작갑사를 지었으나 현재  대작갑사(운문사)와 대비갑사(대비사)가 남아있다.

 

600년(신라진평왕22년)에 원광국사가 중창하고 법회를 열면서 화랑도의 "세속오계"를 내려줌으로서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이 일대를 평정한 "보양"에게 왕건(고려태조)는 후한 상을 내리고 "보양"이 머물고 있던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내렸다. 937년 태조20년이었다.

 

이 때부터 "운문사"로 개칭되었고,1105년(고려숙종10) 운응국사 합일이 3차 중창하고 국사가 되었으며 1277년 일연스님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물면서 저 유명한 삼국유사를 집필하였다.

 

그 후 비구니스님들이 머무는 사찰(1958년으로 추정)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아래글은 삼국유사 보양이목에서 일부 발췌하여 옮긴다.


보양(寶壤)이 중국에서 불경을 받아들고 귀국하는 길에 서해에 이르니 용왕이 그를 맞이하여 용궁에서 불경을 외우게 하더니

금빛 비단의 가사(袈裟) 한 벌과 아들 이목(璃目)에게 보필하게 하며 보양에게 이르기를 “지금 삼국(三國)이 시끄러워서

 아직은 불법에 귀의(歸依)하는 군주(君主)가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本國)으로 돌아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짓고 살면 능히 적병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또한 몇 해가 안 되어서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오."하였다.

 

고국에 돌아 온 보양은 추화군(밀양) 봉성사에 머물렀으나 용왕과 나누던 대화에서 작갑(鵲岬)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그 곳을 찾으니 신라진흥왕 때 한 고승이 북대암(현지룡산자락)을 짓고 수도하였고 진평왕 때 원광국사가 중창하고

법회를 열면서 대작갑(大鵲岬)·소작갑(小鵲岬)·소보갑(所寶岬)·천문갑(天門岬)·가서갑(嘉西岬)등 다섯 갑사(岬寺)가

세워져 있는 오갑사는 , 후삼한(後三韓)의 난리에 모두 없어져 다섯 갑사(岬寺)의 기둥만 대작갑사(大鵲岬寺)에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곳에 절을 세워 작갑사(鵲岬寺)라고 하고 수도했다.

 

후삼국을 통일한 후 "고려“로 국호를 정한 왕건(太祖)은 나라가 안정되자 이 일대를 평정하는데

 많은 공을 세운 "보양"에게 다섯 갑(岬)의 밭과 500결(結)의 상을 내리고 치하했다.

 

정유(丁酉; 937)에는 보양이 수도하던 대작갑사에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을 내리고,

가사(袈裟)의 신령스러운 음덕(蔭德)을 받들게 했다. 이때 이목(璃目)은 항상 절 곁에 있는 작은 못에 살면서

법화(法化)를 음으로 돕고 있었다.

 

그로부터 현재까지 “운문사”라 불리고 있으며 일주문에는“호거산 운문사”로 쓰여 있다.

 

※ 여기에서 말하는 호거산은 현재의 지룡산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3.현재의 운문산

 

 ☞문헌이나 고지도에서는 이 산에 대한 지명이 없으나,현재는 "운문산"으로 되어 있다.

    밀주승람(밀양읍지)와 석골사의 연혁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찾을 수 있었다 .

 

1)밀주승람에( 석골사에서 상운암에 이르자면 험한 길이라 오르기 힘들다...  함화산((含花山)이라고 한다.

 =含花는 추위 때문에 꽃망울이 개화하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을 뜻 하며  화망(花亡)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2)석골사 부도에는 보양과 절친한 사이였던 비허선사(석골사조사)의 업적을 흠모하던 함화당 의청(含花堂 儀淸)스님이

조선조(영조11년)에 석골사를  중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당시에 상운암도 함께 중창하여 "함화암"이라 개칭하여

수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석골사를 창건한 "비허조사"는 운문사의 보양과 절친한 사이로 보양의 도움을 받아

암자에 불과하던 석골사를 9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로 융성시킨 것으로 전한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석골”과 “함화”이다.

 

석골(石骨)은 바위의 골격(뼈)을 뜻하는 것으로 경상도에서는 개골(皆骨)이라 한다

 

⑵함화(含花) 는 꽃 망울을 맺어도 기온이 차가워 개화 해 보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다는 것을 뜻하며 "화망(花亡)"과 같은 말이다.

 (이 것에 대한 설명은 결론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현재 상운암의 정상부에는 "운문산"이라 새겨진 정상석이 세워져 있고  100여미터 아래에 있는 봉우리에는

울산의 00산악회에서 세운 "함화산"이란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지적고시는 "운문산"이다)

 

이 산은 낙남정맥 가지산에서 나온 산줄기로 청도군과 밀양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비학산까지 이어지는데

일명"운문지맥"이라 한다.

 

정상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가지줄기는 운문호에 잠기며 물위에 섬처럼 보이는 봉우리 하나 남겨 놓는데

이를 호거산 또는 호산이라 부른다.(호거산은 건너 편 개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보양이 기지를 발휘하여 소탕했다는 것은 견훤군으로 보여진다)

 

4.고지도에 나타나는 운문산.

 

☞ 서울대규장각 소유 고지도 중 운문산과 산줄기의 표현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지도의 지도를 사용 하였으며 대동여지도를

 근본으로 하여 운문산의 위치를 고찰 해 보았다.

 

 팔도분도 경상도편

대 부분 현재의 산줄기와 비슷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낙동정맥의 고헌산은 산줄기에서 벗어나 있다.

 

관동지도경상도편

고헌산에서 이어지는 낙동정맥이 잘 표현되어 있으나 대 부분 고을과 중요한 산을 위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1872년 지방도 청도편

이 지도에는 운문산 옆에 지룡산성이 표시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조선지도 경상도청도군도

 

 조선지도 경상도밀양군도

 

조선지도합본(임의조합) 

청도편과 밀양편을 합본(빨간색점)비교하여 보았다.

청도편에 나타나는 운문산은 뚜렷하지만 밀양편에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

 

※ 나의 생각은 빨간색점이 합쳐지는 부분선이 현재의 운문산 줄기로 보여지며 석골사 위 빨간점 부분이 운문산이다.

대동여지도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지도로 위에 열거한 지도와 비교하여 보면 보다 상세하게 기록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운문산의 양 쪽에 호거산이 두 곳으로 표기되어 있고 고헌산은 가지산 우측의 가지줄기에 표기하였고 가슬현 오른 쪽

세 개의 봉우리가 표시된 부분이 낙동정맥과 운문산(고지도상)분기점으로 보인다..

 

※옛 지명과 현재 지명을 아래와 같이 비교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

 

1.운문산의 옛 지명은 작갑산(鵲岬山)이었으나, 대작갑사가 "운문선사"로 사액된 937년경 부터 운문산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2.운문령의 옛 지명은 가슬현(嘉瑟峴)이었으나. 운문산의 경우와 같아 보인다.

3.약아계(若耶溪)는 중국 소흥에 있는 계곡으로 서시가 빨래하며 연꽃을 땃다고 하는데서 비유되어 생긴지명이다.

4..호거산은 현재 운문천댐이 있는 부근에 위치한 산으로 신원천과 운문천이 합수되는 지점 반대 편에 있는 개산(소산)을

노려보고 있 는 지세이다.

 

5.운문사의 옛 지명은 "대작갑사"였으나 왕건의 사액하여 "운문사"로 바뀌었다.

(일주문에는 "호거산운문사"로 쓰고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참고:운문사의 원찰이라 할 수 있는 북대암은(보양이목에 의하면 신라진흥왕 때 지어진 사찰로 추정)지룡산을 현무로 하여 

지어졌다. 이 산은 견훤의 탄생설화인 지렁이가 살았던 동굴이 있다고 하여 지렁이산(地龍山)이 되었다.

(1872년 지방도 청도편 고지도(운문산)에 지룡산성이 표기된 것을 근거로 한다)


※지룡산은  견훤의 조상인 지렁이에 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 져 온다.

삼국사기 후백제 견훤조에 나오는 글을 잠시 살펴보면. 지룡산 근처 마을에 혼기가 찬 아리따운 처녀가  지아비 없는 임신을 했는데 ~~

 이를 알아차린 부모가 "어느 놈이냐?"고  다그치자 딸~아이  대답하기를 "남정네는 자정에 찾아 들어 새벽에 가는데 "이름도 몰라요~성도 몰라" 란다. 딸 년의 야그를 듣던 부모는 억장이 무너지고~~애비가 꾀를 내어 딸년을 달래고~이르기를 "명주실꾸러미에 꿴 바늘을 남자의 바지가랑이에 묵어 놓으라" 이른다.

 

다음 날 아침! 풀어헤친 실타래 따라가보니 동굴이고 그 곳에 커다란 지렁이 한 마리가 죽어 있더랜다.

세월이 흐르고~~~임신 하였던 처녀는 건장한 사내아이를 낳은데 이 아이가 훗 날 천하를 놓고 왕건과

건곤일척의 한판승부를  벌이는 견훤이고 지렁이는 그의 아버지렷다.

 

그 후 지룡산이라 하는데 이러한 설화는 어려 곳에 전해 져 내려오는 설화일 뿐!

믿을 것은 못 되나 고지도에 나타나는 지룡산성은 어떻게 풀어야할까?


 고지도 형식으로 표현해 본 현대지도.

 

 랜덤하우스 50.000분의1 지도

 

 구글위성지도.

 

위와 같이 고문헌과 고지도. 현대지도와 위성지도를 통하여 현재의 운문산과 고지도상의 운문산 위치를 비교해 보았다.

 

1)문헌과 고지도에 나타나는 운문산은 ㉠옹강산과 문복산 일대와 ㉡ 귀바위와 낙동정맥분기봉 일대이거나 ㉠과㉡를 포함하여

문명초등학교 일대 전체를 포함한 것으로 추측된다.

 

2) ㉠과㉡은 고지도를 근거로 한 것이며 문명초등학교 일대를 포함한 것은 운문산은 하나의 산군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은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호거산으로 추측된다.

 

3)문헌과 고지도. 현지도와 구글지도를 통하여 살펴 본 운문산의 위치는 옹강산.문복산.운문령. 상운산을 포함하여 지룡산까지를

포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은 나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 이므로 여러분의 의견이 모아져 확실한 위치가 확인되기를

바랄 뿐이다.

 

결론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현재 운문산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餘談으로 정해 해 보기로 한다.

 

1)석골(石骨)은 듣기에 따라 써늘한 느낌이다.

소.돼지 잡아서 살코기 발라먹는 것도 모자라 감자탕과 설농탕까지 해 먹은 다음에 앙상하게 남아있는 뼈다귀를 상상 해 보시라..

영화에서 보는 킬링필드의 해골들....

바위도 그렇게 보인다면 좀 삭막해 질 것이다.

 

그래서 "함화"를 생각 해 보았다.

 

2)"함화"란 단어 역시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든다는  뜻으로 삭막 해 지는 것은 같지만 , 그래도 잎이 피고 꽃 망울 열리니

아련하게 감싸 안아주고 싶은 표현하기 안스러움이 있다..

 

그래서 "두~울" 을 저울질 해 본다.

"석골산" 보다는 "함화산"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상운암이 맨 위에 있으니 "상운산"이 되던가/ 한 덩어리의 바위처럼 보인다고 하여 원주민들이 부르는 한바위산이 되던가?

이것은 누가 뭐래도 지역민들이 풀어야 할 과제이므로....

이하 생략~~


 횡~ 하고~~설~ 하고~

 .....................................

현재 상운암 정상에는 "운문산"으로 쓴  정상석이 세워 져 있고 그 아래 100m지점에는 " 함화산"이라 쓴 정상석이 세워 져 있다.

울산의 모 산악회서 세웠다는 함화산의 정상석이 제 자리로 찾아가기 바란다.

 

아울러

운문산은 고지도에 나타나는 위치로 환원되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잘못 된 역사를 바로 잡아주는 것은 지역민들의 양해와  

영남알프스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바램일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위정자가 바뀌니 지명도 바뀌는 현실을 이해한다 해도 원지명이 시집가 버리는 해괴한 짓거리는 없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청도군(위정자)역시 소 싸움이나 붙여 관광객들 끌어 모으려는 무식한 발상 버리고 운문사와 운문산을 연결시키는 문화적 콘텐츠개발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가난을 물리친 새마을운동의 발상지 답게...


~喪~

...............

...............

...............

굴 하지도 굽히지도 않으며 불 같이 살다가 목숨으로 자기의 책임을 다 하는 志士처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바보같은 사람!

노무현 대통령를 추모하면서 이 글을 남긴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