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54 길 127
삼천사는 서기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 대사가 개산(開山)하였다. 1481년(조선 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승병들의 집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고, 임란 중에 소실 되었으나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마애여래 길상터에 진영 화상이 삼천사라 하여 다시 복원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현재의 주지 평산 성운 화상이 부임하여 경내에 위치한 마애여래입상이 천년 고불(古佛)임을 입증하여 보물로 지정받고 30여 년의 중흥 불사를 통해 대웅보전, 산령각, 천태각, 연수원, 요사채 등의 건물과 세존진신사리탑, 지장보살입상, 종형사리탑, 관음보살상, 5층 석탑, 중창비 등을 조성하여 현재의 문화재 전통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수많은 참배객들의 기도도량, 참회도량, 수행도량으로서 확고히 자리하게 되었다.
그 밖에 사찰에서 2km 위쪽에 위치한 옛 삼천사 터에는 대형 석조(石槽)와 동종(銅鐘), 연화대좌(蓮花臺座), 석탑기단석(石塔基壇石),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의 비명(碑銘)이 남아 있는데, 그 중 동종은 보물로 지정받아 현재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마애여래입상|보물 제657호|
마애여래입상은 삼천사 경내 대웅전의 위쪽으로 30m 지점 계곡의 병풍바위에 각인되어 있다. 불상의 어깨 좌우에 큰 사각형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애불 앞에 목조가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되었으며, 전체 높이는 3.02m, 불상 높이는 2.6m에 달한다. 고려시대 불상 중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된다.
얼굴과 윗몸은 돋을 새김을 하였으나 하반신과 광배 그리고 대좌는 볼록한 선새김으로 마치 강한 선묘화(線描畵) 같은 느낌을 준다. 머리광배[頭光]는 겹둥근 무늬로 소발(素髮)한 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살짝 뜬 눈은 눈꼬리가 귀 가까이 닿았으며, 두툼한 코와 연속된 양 눈썹 사이에는 작은 백호공(白毫孔)이 뚫려 있다. 신광(身光)은 한 줄로 새겼다. 신체는 비교적 장신이지만 비례가 자연스러우며, 옷차림을 보면 양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의이나 넓게 'U'자 모양으로 트인가슴에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비스듬히 걸친 내의와 띠대들이 보인다. 법의는 다소 두껍게 나타내어 새로운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수인을 살펴보면 오른손은 내려뜨려 옷자락을 살며시 잡고 있으며, 왼손은 배 앞쪽으로 무엇을 가볍게 받들어 쥐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발 밑의 대좌는 연꽃잎이 위쪽으로 피어난 앙련의 연화좌이며, 꽃잎은 단판 중엽이고, 꽃잎 사이에는 간엽이 표현되어 있다.
조성된 바위 위에는 또 다른 커다란 바위가 얹혀 있어 마치 불상의 보개(寶蓋)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 상호가 원만하고 신체도 균형을 이루었으며, 옷자락도 부드럽게 표현되었고, 양각과 음각의 조화를 잘 살린 매우 우수한 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존진신불탑
우리들의 세존 부처님은 성도 이후 45년 간의 중생교화 여정을 마치고 쿠시나가라(Kusinagara)의 사라쌍수(沙羅雙樹) 밑에서 열반에 드셨다. 이때 천둥소리가 대지를 진동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열반에 드신 후 불제자들은 세존의 유언에 따라 불신(佛身)을 다비(茶毘) 화장(火葬)하였다. 다비후 부처님의 유골사리는 8등분 되어 동서남북 여덟 나라에서 모셔가 각기대탑을 세우니, 이를‘분사리(分舍利)’또는‘사리팔분(舍利八分) 대탑’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사리신앙의 수행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더불어 불탑신앙도 시작되었다.
부처님 열반 후 100년이 지나 대인도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아(Maurya) 왕조의 제3대 왕인 아쇼까는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하고, 불사리를 안치한 8대성지인 불탑을 몸소 친견하여 부처님 사리를 안치한 8대탑의 불사리를 다시 8만4천으로 나누어 전국에 널리 사리탑을 세웠다.
아쇼까 왕 당시 불교신앙의 중심지였던 산치(Sanchi)에는 지금도‘산치대탑’이라 하여 거대한불탑이 남아 있어 아쇼까의 불심을 가늠할 수 있다. 이‘산치탑’은 거대할 뿐만 아니라 4대 탑문(塔門)과 주위 난간 조각들이 아름답고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불탑으로도 널리 알려져 전 세계 불자들의 참배가 이어지는 세계 제일의 탑파이다.
그러한 아쇼까의 지극한 불심과 발원이 남북방불교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와 드디어 한국최초로 삼각산 삼천사에 아쇼까 4자상 세존진신불탑 4대 보살(관음·지장·보현·문수)로 나투셨다. 이것으로 삼천사는 만 중생이 소원을 이루는 기도도량, 만 중생이 수행 정진하는 선불장(選佛場), 만 중생이 귀의하고 소원을 성취해가는 4대 보살이 상주하는 대도량(大道場)이 되었다.
《묘법연화경》에 이르시기를, “내가 멸도한 후에 나의 전신에 공양하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하나의 큰 탑을 세우라.”고 하여 탑이 곧 부처님의 진신(眞身) 그 자체임을 설하였다. 또한《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는 탑불사의 공덕을“불탑을 중수하거나 내지 조성하면 수명이 오래갈 것이며, 목숨을 마치면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백천 겁 동안 복락을 받을 것이다. 그 뒤에는 도솔천궁에 태어나서 백천 겁 동안 복락이 계속될 것이다.
태어나는 곳마다 지난 세상의 일을 관장하며, 모든 장애를 제멸하고 모든 죄업이 소멸되어서 온갖 지옥의 고통을 여의고 항상 부처님을 뵈옵고 부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라고 전한다. 이렇듯 탑은 온전히 부처님의 진신(眞身)이며, 불자들의 신심과 원력이 함께 결집된 진신보탑도량이다.
한편 부처님의 사리는 양이 제한되어져 있어 사리탑을 조성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신사리라 여겨 경전을 탑에 봉안하게 되는데 이때 봉안되는 경전은 불자들의 신심과 청정으로 1자1배의 사경에 의해 이루어진다. 사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베껴쓰는 것이다.
사경은 신앙적 가치를 부여하는 공덕경(功德經)으로 공덕을 쌓기위해 조성된 경전이다. 초기 불교 부처님의 가르침은 구전경전이기때문에 필사는 행하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경전의수지(受持), 독송과 함께 필사의 공덕 또한 수승하며, 이 무렵부터 경전사경이 행해지고 있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사경하고 외워 그 뜻을 일러 주는 사람은 가장 높고 제일 가는 복덕과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요, 이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 계신 곳과 같고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는 것과 같다.”하여 사경의 공덕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대승경전의 꽃이라 일컬어지는《금강반야바라밀경》은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여 그 어떤 고통과 번뇌일지라도 빛나는 깨달음의 지혜로 소멸하여 해탈의 경지에 오르게 하는 뗏목과도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금강경을 한 자 한 자 일념으로 사경하여 자신의손을 통해 부처님의 법신을 세상에 드러내고, 자기 안에 무명을 밝혀종래에는 금강같은 지혜를 완성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법신을 친견하는 공덕으로 나투는 것이다.
따라서 삼각산 삼천사 청정도량에 부처님의 진신인 탑에 오색 영롱한 진신사리 7과와 손수 한 자 한 자 사경한 금강경 법신사리600과를 봉안하여 세존진신사리 9층 불탑을 봉찬하였으니, 삼천사는 삼계(三界)의 사표(師表)가 되었으며, 법계(法界) 가운데 영부로 만중생의 귀의처가 되었다.
삼천사 세존진신사리 불탑은 한국 석탑의 새로운 양식으로, 오대산 월정사 8각9층탑(국보 제48호)과 초전법륜지인 인도 사르나트아쇼까 석주 4두 사자상을 원형 그대로 접목한 탑신 15m로서 우리 삼천사 사부대중의 염원과 아쇼까 왕의 지극한 발원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상륜부의 아쇼까 4사자상은 8정도의 가르침이 담긴 법륜에 안치되었고, 9류 중생의 안녕과보살이 화엄 10지에 이른 후 정토세계의 9품 연대에 오르기를 발원하는 보리심이 불탑에 그대로 묘사되었다. 기단과 탑신부에는 석굴암 8부 신장과 사천왕상, 8보살상과 8여래불이 양각으로 조각됐다.
불탑 복장에는 오색 영롱한 세존사리 7과와 높이 16.5㎝의 작은 순금동 석가모니불·지장보살·관세음보살상, 대장경 1질, 금강경 사경 600부, 순금 108염주와 거북이, 열쇠, 은, 호박, 칠보, 수정, 다이아몬드 결혼반지 등 불자들이 소지한 금은칠보로 염원과 정성이 담긴공양물이 봉안되었다.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가람의 중심이 되는 전당으로서 '도력(道力)과 법력(法力)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 즉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통 건축양식인 맞배지붕으로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내부 중심 수미단(須彌壇)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의 좌우에는 협시불(脇侍佛)로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왼 쪽에, 부처님의 덕(德)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부처님의 오른쪽에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화는 목각으로 새긴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으며, 십육나한상과 오백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오른쪽에는 중단을 마련하고 우리나라 전통 신을 의미하는 104위의 호법신(護法神)을 모두 묘사한 신중탱화를 모셨으며, 왼쪽 벽에는 지장보살상과 조상영가 영구위패를 봉안하였다.
종형사리탑
종형사리탑은 가로 3.1m, 세로 3.1m의 4각대석 위에 놓여 있다. 무진년 4월, 평산 성운 화상이 미얀마를 성지순례할 때 마하시사사나 사원에서 아판디타 대승정(大僧正)으로부터 전수받은 부처님 사리 3과를 88올림픽의 성공 기원을 담아 종 모양의 돌탑[石鐘塔] 속에 봉안하였다. 대웅보전 위쪽 계단을 오르면 마애불전 앞에 위치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쿠시나가라 사라쌍수 밑에서 입멸하자 제자들이 유해를 다비하였는데 8곡 4두나 되는 사리가 나왔다. 사리란 참된 불도 수행의 결과로 생기는 구슬 모양의 유골을 말한다. 범어 사리
라(Sarira)의 음역으로서 산골(散骨), 유신(遺身), 영골(靈骨)이라고 번역하고, 사리를 세는 단위로는 '과(果)'를 사용한다. 사리는 크게 전신사리(全身舍利)와 쇄신사리(碎身舍利) 두 가지 종류로 나눈다. 전신사리는 다시 법신사리(法身舍利)와 색신사리(色身舍利)로 분류한다.
첫째 법신사리는 여래의 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상주하며, 구경에도 무너지지 않으므로 견고자(堅固子)라고 한다. 둘째 색신사리는 형태가 색신으로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을 닦아 도행(道行)을 이룬 것을 말한다. 이것은 형태가 있는 색신이지만 금강불괴(金剛不壞)의 고체로 변한 것이다. 이 사리는 부처님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한편 쇄신사리에는 적색 육사리(赤色肉舍利), 백색골사리(白色骨舍利), 흑색발사리(黑色髮舍利) 또는 황색, 자색 등 오색 찬란한 것이 동일하지 않다. 그 까닭은 사리를 보는 자의 과거 선근 공덕과 지극한 정성에 따라 다른 색으로 보이는데 사리가 백색으로 보이면 상근기, 흑색으로 보이면 하근기라고 한다. 근대 중화민국의 법학자 화결 선생이 아육왕사(阿育王寺)의 사리를 친견했는데, 처음에는 흑색으로 보였 으나 스스로 업이 무거움을 알고 1주일간 밤낮으로 예배한 후 다시 사리를 친견하니 백색이었다고 한다.
산령각
산령각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전통 건축양식인 맞배지붕으로 을해년에 개축하였다. 내부 중앙에는 산신과 호랑이를 그린 산신탱화를 봉안하였는데 산신은 산의 영(靈)으로 산을 지키며 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장하는 신으로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산의 주인으로서 늘 가람의 뒤쪽에 자리하며 불법을 수호(守護)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좌우에 각각 독성탱화와 칠성탱화를 봉안하고 있는데 다른 사찰과는 달리 나무에 새긴 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삼각산의 산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볼 수 있으며, 이런 이유에서 삼천사를 '산신이 보좌를 튼 절'로 부르기도 한다. 영험한 곳으로 소문이 나 많은 기도객의 참배가 끊이지 않고 있다.
불교는 인도에서 나타나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만, 어느 종교보다도 우리 민족의 감성과 심성을 잘 이해했다. 그래서 산신신앙은 비록 그 자체로 불교와 직접적 연관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불교의 테두리 안에 넣어 한데 어울리는 대승의 정신을 실천했던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절은 대개 깊은 산속에 있었으므로 우리 민족의 조상신으로 간주되어 온 산신은 불교에 융해되어 자연 스레 불교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불교와 확실하게 차이나는 우리 불교 만의 특징이다.
대개는 산신각이라 했지만, 산령각(山靈閣) · 산왕각(山王閣) · 성산각(星山閣) · 단하각(丹霞閣) 등의 이름도 있었다. 때로는 산신각 외에 삼성각이나 칠성각에도 산신이 봉안되기도 하니, 산신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대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도 대웅전 같은 금당을 참배한 다음에는 꼭 산신각을 찾는 것도 우리 불교에 녹아든 산신의 위상을 말해준다.
천태각
천태각은 중앙에 나반존자를 모셨고, 협시불로 좌우에 16나한님을 봉안하였으며, 108개의 인등이 모셔진 전각이다. 인등에는 기름을 담고 심지를 넣어 24시간 365일 꺼지지 않게 정성껏 불을 켜고 등 하나하나마다 간절한 소원을 담아 불전을 밝히고 있다.
나반존자상은 삼각산에서 채취한 자연석으로 조성되었고, 16나한상은 전국 각지에서 채취한 자연석으로 조성되었다. 한 분 한 분 16나한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 익살스럽기까지 한 16가지의 천진난만한 표정과 오래된 고불의 은은한 미소로 참배객을 반기고 있다.
나반존자는 재가수행자로서 남인도 천태산(天台山)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것, 잎이 피고 지는 것, 봄에 꽃이 피는 것, 가을에 열매가 맺는 것 등 변함없이 운행되는 우주의 법칙을 보고 혼자 깨달음을 성취하여 독성(獨聖)이라고도 일컬어지며, 머리카락이 희고 긴 눈썹과 머리를 삭발한 모습이지만 승복과는 다른 편의복을 입고 있어 재가수행자임을 나타낸다.
나반존자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의 경지에 이르러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능력을 지녔다. 삼명은 전생을 꿰뚫어 보는 숙명명(宿明明), 미래를 보는 천안명(天眼明), 현세의 번뇌를 끊을 수 있는 누진명(漏盡明)을 말한다. 이러한 능력으로 자리이타, 곧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므로 중생의 공양을 받게 되었다.
말법시대에 나타나 미륵불이 오기 전까지 중생들에게 복을 주고 재앙을 없애며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하였다.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말에 나반존자 신앙이 더욱 성행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험이 큰 성인이나 성격이 매우 엄하고 무서워 공양을 드릴 때는 목욕재계는 물론이고 공양물도 제대로 갖춰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사찰 전각에는 대개 그림으로 모셔진다.
지장보살입상
지장보살입상은 삼천사 경내 초입의 오른쪽 위쪽에 위치하여 가람을 두루 굽어보고 있다. 황동석(화강암) 통돌로 조성되었고, 팔각형상(上) 좌대에는 도명존자, 무덕귀왕, 시왕 등 10분이 새겨져 있고, 원형 하(下) 좌대에는 심우도를 배치하였으며, 높이는 6.0m이다. 계유년 칠월 백중, 평산 성운 화상의 발원으로 고려 불화를 초안으로 하면서 이 시대 불교미술의 시대성을 고려하여 7등신으로 조성되었고, 지장보살의 지혜와 자비를 표현하였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부촉을 받아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無佛) 시대에 중생의 갖가지 근기를 관찰하고, 고통받는 육도(六道) 중생을 제도하려는 큰 서원을 세운 분이다. 설사 부모를 죽인 대역 죄인이라도 그 업을 소멸하고자 진심으로 참회 발원하는 중생까지도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대비보살이다. 성불을 미루고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중생의 구제활동을 하는 보살로 범어로는 크시티가르바라고 한다. 대지를 모태로 한다는 뜻으로 생명을 낳고 기르는 대지와 같은 능력을 가진 보살을 상징한다. 일체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보는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에서 비롯된 보살로서 대승불교의 후기에 나타났다.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에 지장보살의 비원(悲願)과 간구(懇求)가 나온다. "지옥이 텅빌 때까지 결코 성불하지 않겠습니다." 부처님께 한 약속이다. 지장보살은 그래서 '지옥의 부처님'이라 불린다. 불교는 업보주의다. 그러나 지장보살은 바로 그 업보조차도 소멸시킬 위신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4대보살의 하나로 열렬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명부전이나 지장전, 시왕전 등에 봉안되며, 지장삼존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거느리고 있다. 원래는 천관(天冠)을 쓰고 왼손에 연꽃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삭발에 석장(錫杖)을 짚고 여의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대지의 신은 어느 나라나 포용과 사랑의 화신으로 나툰다. 각별한 지장신앙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지옥이 텅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대자비, 대희생이야말로 지장의 마력이다.
5층석탑
삼천사 경내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초입에 위치한 5층 석탑은 무진년 4월, 평산 성운 화상이 미얀마를 성지순례할 때 마하시사사나 사원에서 아판디타 대승정(大僧正)으로부터 전수받은 나한사리를 봉안하였다.
불교에서는 탑이 중요한 신앙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그것은 탑 안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다는 점 때문이다. 탑의 발생은 인도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는 반구형(半球形)의 분묘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표적인 탑은 아쇼카왕 때 세워진 산치의 거대한 불탑을 들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입멸 (入滅)하자 그의 제자들은 유해를 다비(茶毘:火葬)하였다. 이때 인도의 여덟 나라에서 사리를 차지하기 위해 분쟁이 일어났다. 그때 도로나(徒盧那)의 의견을 따라 불타의 사리를 사리를 똑같이 분배하여 각기의 나라에서 탑을 세우고 사리를 보관하였다.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고 한다.
탑은 탑파(塔婆) ·솔도파(率堵婆)라고도 한다. 솔도파는 산스크리트인 스투파를 한자로 음역(音譯)한 말이다. 그러나 스투파의 원래의 뜻은 '신골(身骨)을 담고 토석(土石)을 쌓아올린, 불신골(佛身骨:眞身舍利)을 봉안하는 묘(墓)'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탑파란 당초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평화대범종
백두영악(白頭靈岳)의 정기(精氣)가 모여 백운(白雲), 인수(仁壽), 만경(萬景)으로 치솟는 해동(海東)의 영산(靈山) 삼각산 영지(嶺地)에 자리한 삼천사는 당초 원효 대사가 개산(開山)하고 고려 시대에는 삼천 대중이 수도하던 큰 사찰로서 조선대 임란(壬亂)으로 소실되었으나 수십 년 동안 부단한 원력(願力)과 단월(檀越)들의 신심(信心), 불타의 가피로 오늘의 대가람을 중창 복원하였다.
이렇듯 중흥불사를 일차 마무리하면서, 평화와 번영이 온누리에 가득한 불국토(福祉佛國土)를 염원하는 평화의 대종을 조성(造成)하고자 발원(發源)하였고, 마침내 2년이 넘는 긴 시간 끝에
3,693명의 간절한 발원이 2005년 7월 보름, 삼각산하에 울려 퍼졌다.
범종의 신앙적인 의미는 종소리를 듣는 순간만이라도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데있다. 대종, 경종이라고도 하며 절에서 시각을 알리거나 대중을 모을 때 또는 불교의식, 행사 시에 치는 큰 종으로 우주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기 위하여 이 종을 치는 것이며, 이 종소리를 듣고 법문을 듣는 자는 오래도록 이어온 생사의 고해를 넘어 불과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평상시 사찰에서는 아침 예불에는 28번을 치고 저녁 예불에는 33번을 친다.
願此鐘聲遍法界 鐵圍出暗悉皆明 三途離苦破刀山 一切衆生成正覺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철위산의 그 어둠에서 벗어나 모두 다 밝아지소서. 삼악도의 고통을 여의고 도산지옥을 허물어 모든 중생이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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