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07년08월11일 음력06/29 날씨: 흐린 후 맑음 산행지: 백두대간 17회차(지름티재~이화령구간) 산행자: 백두대간 꿈!종주대 산행코스: 은티마을~지름티재~희양산갈림길~배너미평전~이만봉~사다리재~뇌정산갈림길~백화산~황학산~조봉~이화령
도상거리:18.22km ,어프로치:2.5km
산행거리:20.72km , 산행시간:12시간18분 개요 지름티재에서 이화령까지 이어가는 17구간 마루금은 직벽구간과 너덜길 평탄한 오솔길이 조화를 이뤄 커다란 포물선(Y=X)을 그리고 돌아오는 조금은 지루한 산행길이 될 것이다. 은티마을에서 지름티재까지 이어지는 계류는 청아한 물소리 반겨주지만 지름티재에 도착하면 나무장벽이 눈살을 찌뿌리게 한다. 도둑고양이 담 넘어가듯 나무장벽을 통과하여 희양산 오름길은 암릉 사이의 미로를 헤메이듯 하지만 100여미터 직벽오름 구간에 도착하면 정상을 알 수 없는 끝 없는 높이가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이 곳을 어렵게 올라 희양산 갈림길에 도착하여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 있는 암반에서 쉬어가게 되는데 마루금에서 300여미터 벗어난 지점이 우리나라 100명산의 하나인 희양산 정상이다 희양산은 뒤로하고 북으로 이어가는 마루금엔 삼국시대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성터가 있는데 "희양산성으로 불리고 있는 이 곳은 비교적 깨끗한 상태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지만 성곽에 설치한 출입금지 간판들과 철조망이 전하는 묵언를 뒤로하고 암릉길 지나서 시루봉 안부에 도착하면 안티골로 흘러내리는 시원한 물소리 반겨주고 배너미평전 올라가는 길은 습지여서 이 곳이 마루금인가 하는 의구심 느끼게 한다. 배너미편전에서 시루봉을 뒤로하고 이만봉으로 향하는 등로는 너덜의 연속이지만 이만봉에 도착하여 즐기는 조망은 지나온 마루금과 가야할 조령산까지 조망되어 지름티재부터 답답했던 마음이 평온함을 되찾아 진행길 여유롭게 한다. 옛날에 이만호라는 사람이 살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이만봉을 지나 곰틀봉 가는 길은 암릉길의 연속으로 오작교를 건너 직녀를 만나러 가는 견우처럼 가벼운 흥분으로 가슴벅차 오를 것이며,남성의 심볼을 상징하듯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는 마루금은 백화산을 정점으로 이화령으로 되 돌아오는 신비스러움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백화산을 지나 황학산 가는 길은 암릉으로 백화산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비경으로 전망바위에 오르면 지나온 희양산과 대야산은 물론이고 조령산 까지 조망되며 흰두뫼에서 시작되는 분지천을 따라 아늑한 계곡으로 빠져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억새밭으로 이루어진 황학산 갈림길에서 잠시 쉬엇다 가는 조봉 가는 길은 푸른초원이 펼쳐지면서 조림수인 낙엽송과 갈참나무의 자연림 사이를 걸어가는 기분은 "백팔번뇌"를 잊게 하는 대간 길이 가져다 주는 또 다른 선물이다.
푸른초원에는 인공으로 조성된 오아시스까지 있으니.... 우리나라 3대 조림지 답게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곳이다.
위성사진으로 본 17구간 동남방향으로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중심선에 분지천이 흐른다.
50.000분의 1 지형도
은티마을 주차장에 세워진 등산안내도
산행 글
어릴 적 영문도 모른 채 매를 맞아 본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 없는 매는 없을 것이고... 우리는 그 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만..... 정말로 이유없는 매를 맞을수도 있는 것이 우리네 사는 모습일 것이다.
산 길을 다가가 무작정 꺾여지는 나무가지처럼..... 날벼락인가?
그래도 "나만 좋아하는 일을 행 할 뿐이니... 앞으로의 일은 굳이 묻지 말아라.
_얼마 전 서울시장을 지내신 조순님이 회자하였던 당나라말기 학자 풍도의 詩 "천도"의 한 구절이다-
02:38 지난 번 오르지 못 한 대간길을 걸어가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야간산행을 감행 해야 한다.
은티마을에 도착하니 먼저 와 기다리고 계시는 만태님 부부와 함께 승합차가 갈 수 있는 지척거리까지 접근 하기로 하니 은치재와 지름티재가 나누어지는 삼거리에 도착이다.
여기에서 기념사진 남기고 바람한 점 없는 계곡을 따라 어둠속으로 스며든다. (오늘 백두대간 마지막 땜빵에 성공하신(이화령~백화산구간) 고석수님께 축하 드립니다)
달 맞이꽃 오늘 밤은 짙은 안개와 바람한 점 없는 높은 습도가 반겨주는 밤이라 .. 청량제 구실을 해 주는 너에게 감사한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사위를 뚫고 지름티재에 도착하지만 높은 습도 때문에. 천막에서 등로를 지키고 있을지도 모를 스님들의 제지로 오늘도 가지 못할다면 어쩌나? 하는 심정은 사생결단할 결심이지만 혹시나 천막에서 자고 있을 스님들 깨우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대원님들 웅성거림을 잠재우는 내 모습 처량하여 물 속에 빠져버린 새앙쥐처럼 땀에 젖어버린 옷 자락을 정리할 틈도 없이 목책(낙엽송)의 장벽을 넘어야 하는 내 모습이 가관이더라.
04:12 며 칠을 두고 내린 비 때문에 잔뜩 물기를 머금은 바위는 미끄러워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백두대간의 꿈을 안고 아내를 먼저 절벽으로 올려 보내고 기도하듯 안전을 바라는 남편의 마음을... 스님들이 알기나 할까?
03:33 직벽을 올라 희양산 갈림길에 있는 노송을 의자삼아 쉬어가는 곳이다. 이 곳에서 희양산을 갈 수 없게 바리게이트 친 봉암사(엄밀하게 조계종)에 대해 히스토리 해 보자.
봉암사의 유래와 역사
1유래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파(曦陽山派)의 종찰(宗刹)로 879년(헌강왕 5)에
935년(태조 18)에 정진대사 긍양(兢讓)이 중창하고, 1431년(세종 13)에는 기화(己和)가 중수했다. 1674년(현종 15)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신화(信和)스님이 재건했다.
1915년 세욱(世旭)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과요사채 등이 있다. 일제시대의 찬란했던 역사는 유치하기에 기록하기 싫고 1947년 성철스님의 봉암결사(부처님번대로 살아보자)가 있었지만 이 역시 6.25전란으로 소멸되였다.
그 후 70년대에 봉암사에 몰려든 스님들에 의 해 부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82년 조계종 자체적으로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되어 성역화 하였다.
중요문화재로는 지증대사적조탑(智證大師寂照塔:보물 제137호)·지증대사적조탑비
2 역사
"조선불교조계종 통합" 에 대한 것은 사실적인 확인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나 일제시대 때 조선말살정책은 종교계도 피해갈 수 없었나 보다
희양산문은 선종의 구산선문 중 하나이다. (直指人心,見性成佛,敎外別傳.不立文字의 선종 교리를 따른다) 달마대사가 창시한 선종은 신라 선덩여왕5년 도의(道義)가 당나라의 서당지장에게서 법문을 받아드려 가지산문(전남장흥 보림사)을 개창하면서 전국적으로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면서 번창하였으나 고려시대에 화엄종과 법상종으로 대표되는 교종이 번창하면서 쇠퇴하였으나 고려명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조계산에 수선사를 세우고 정혜결사를 세우면서 다시 번창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억붕숭유정책에 의해 점차적으로 쇠퇴하였으나 세종6년에 7개 종파로 나누어져 있던 불교는 선종과 교종(두 개의 종파를 ”양종”이라 한다)의 두 개의 종파로 통합되었다. 이 때 조계종.천태종.총남종의 세 개의 종파가 선종으로 단일화 되었으나 양종제도가 폐지 되면서 불교의 암흑기로 불리는 산중시대를 보내는 혼란기를 맞게 되나 휴정과 선수대사에 의 해 중흥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면서 계통을 이어 오다가 구한말 표교 활동이 자유로와 지면서 원제종.임제종으로 불려져 오던 선종은 1941년 “조계종”이라는 명칭을 확정하였다.(조계종으로 귀속되기전까지 봉암사는 김천의 직지사 말사였다) 숱한 우여곡절을 격으면서 명맥만 유지해 오던 봉암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자운.우봉스님등이 "부처님 뜻대로 살아보자"라는 원을 세워 봉암결사를 하고 칼날같은 법도를 지켜 기강을 잡아갔으나 6.25전쟁 소용돌이에 중단되었다.
그 후 1970년 봉암사에서 모여든 스님들의 정진으로 부활하게 되었으며 1982년6월에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를 선언하였고 82년 7월 문경군은 사찰경내지를 확정 고시하게 되었다.(이러한 이유로 희양산 봉암사지역은 특별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의 수행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기록은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가로막는 스님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그 들과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함이며 출입을 통제하는 스님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서로에게 신임을 주었을 때 등로는 열리게 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나름대로 관할행정관청과 봉암사와 전화통화 그 밖에 참고문헌등을 개인적으로 정리하여 본 것이다.
대간 하시는 분들 그럴리는 없겠지만 ...
1.산에서 쓰레기 버리는 행위
2.취사하는 행위
3.담배꽁초 땅에다 파 묻는 행위
4.야호 하는 행위 등은 절대로 하시 맙시다.
초보산님들에게 알려서 옳바른 산행문화가 조성되도록 산우님들의 협조를 당부 드립니다.
※산에서 야호하는 행위는 산짐승들을 놀라게 하여 불임으로 가져갈 수 있으며 임신한 동물들에게 유산을 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05:08 희양사 갈림길을 지나 배너미평전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성벽이다.
비교적 원형으로 보존되고 있는 문화재급인 성벽 곳곳에 설치된 출입금지 표지판이 눈살을 찌쁘리게 한다. 만약에 민간인이 이러한 행위를 했다면 000법 위반으로 처벌받게 되겠지만 관할관청에서도 어쩔 수 없나보다.
성터를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학습의 장으로 개방할 지혜는 정녕 없는 것인가???? 다 함께 풀어야할 숙제이다.
★ 성터에서 은티마을로 갈 수 있는 등로가 있다.
05:56 시루봉 아래 안부이다.
이 곳에 계곡이 있으며 식수로 사용해도 될 깨끗한 물이 흐르지만 등로를 놓치기 쉬운 곳이다. 계곡의 물줄기를 건너면 산자분수령을 벗어난 다는것 아시죠~~ (얼마 전 어떤분의 산행기에서 시루봉은 백두대간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글귀가 생각 나 넋두리 해 봅니다)
★ 시루봉은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벗어나 있는 배너미평전의 지능선일 뿐이다. 평전에서 마루금은 3시방향으로 급격하게 휘여진다. ★ 알바주의해야 할 구간임!
06:15 배너미평전
노루오줌과 며느리밥풀.병조희풀 등 야생화의 천국이다. 시원하게 불어주는 바람은 선들바람인가.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이만봉으로 향한다. 이만봉 가는 너덜길은 이끼먹은 돌들로 미끄럽지만 산 수국의 화려함이 유혹하고....
용바위(일명:칼등바위)을 지나 이만봉에 도착하지만 아직도 안개속을 헤메이는 미로이다.
07:19 주변을 조망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이 곳에서 아침을 먹기로 하였으나 장소가 비 좁아 마당바위까지 이동하자고 했는데...
치매인가~ 지나버린 마당바위 어디에 있으랴. 사다리재 지나서 뇌정산 갈림길 근처까지 이동하여 때 늦은 아침을 먹는데... 대원님들 원성 자자하더라 ㅋㅋ
이만호골과 분지천 계곡을 보여 주려나보다.
뭐가 보이유???
07:43 하늘가는 오작교를 건너서 곰틀봉에 도착하는데... 아직도 사위는 안개속이다.
이 곳에 오르면 이중환님이 말하는 또 하나의 복지가 있다. 안성골과 봉암용곡.용추골의 물줄기가 만나서 외선유골을 만들어 가는 계루가 형성되는에 이러한 물줄기를 흐르게 하는 산줄기는 백두의 마루금 따라 뇌정산과 둔덕산으로 이어지는 환형의 산줄기가 형성된다.
장거리 산행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코스이다.
50.000분의1 지형도
위성사진
08:10 사다리재 지도상에는 고사리밭등으로 적혀있다. (사다리재는 원인불분명한 이름으로 "미천지"나 고사리밭등으로 불리는 것이 옳다고 한다.
사다리재 지나서 뇌정산 갈림길 오름 직전 때 늦은 아침을 해결한다.
먼 산을 응시하듯...
09:41 뇌정산갈림길
뢰정산과 뇌정산.. 같은 한국말인데 헷 갈리게 하는 곳이다.
이곳을 지나 천주교의 성지로 불리는 백화산 줄기로 성내리와 연풍지역을 넘나들며 선교활동을 펼쳤던 평천치는 병인박해 때 그 들의 은신처였다.
우리는 10:05분 평전치를 지난다.
999봉과 1013봉 이 때부터 시야가 확보되기 시작한다.
1013봉에 있는 화단. 바위솔.바위채송화.부채손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상내리마을
11:16 먹이를 쪼아가는 봉황을 닮았다는 백화산 정상이다. 이 곳에서 우리는 공개할 수 없는 보살님 만나다.
괴목
백화산
우측상단은 981봉(뇌정산 갈림길)
분지천과 희양산
분지천계곡
우측상단은 조령산
지나온 마루금
12:49 황학산 갈림길 황학산(910봉)은 북쪽으로 300여미터 벗어나 있다
월항삼봉과 주흘산
송장풀
13:06 흰두뫼로 갈 수 있는 탈출로
초원 우리는 고삐풀린 망아지들 되었다.
월항삼봉과 주흘산
낙엽송 숲길 가을의 정취는 또 다르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연 못
14;01 헬기장.
흰송이풀
14:16 조봉에 도착 마지막 남은 행동식으로 미각을 자극하고~~
조봉을 지나면 군부대가 있는 681.3봉을 우회하여 이화령에 갈 수 있다
참나리
14:20 이화령 (이화령의 원 이름음 "이우릿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여지도.만기요람등에는 "이화현으로 되어 있으며, 일제 때 신작로가 뚫리면서 이화령으로 둔갑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또 한구간을 마무리 한다.
후기
달마대사의 법통을 이어 받은 육조 "혜능대사"는 까막눈이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는 글을 못 배웠다. 그런데도 달마대사의 법통을 이어 받아 선종의 2대 조사가 되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혜능대사에게 "열반경"에 대해 물었다 혜능이 답 하기를"나는 글자를 모른다고 대답했다" 한 스님은 "글자도 모르면서 어떻게 진리를 아느냐"고 혜능을 명시하듯 하였다.
헤능대사는 한 마디로 그를 제압했다. "진리는 달과 같다.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달을 보는데 손가락을 거칠 필요는 없다" 이 것이 "선종"의 그 유명한 불립문자(不立文字)이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화려한 겉 모습만으로 상대를 대한다. 요즘 화려한 치장과 포장으로 사회가 혼란 스럽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 접어두고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처럼! 모두들 야단법석이다.
올챙이시절 없이 개구리 없듯이 올챙이적 시절을 뒤 돌아보는 여유가 필요할 때이다. 봉암사 스님들과 한판도 그들을 이해 하지 않고 내 욕심만 채우려고 했던 우매함에 조용히 머리숙여 본다.
지난 20여일 동안 도서관에 파묻혀 새로운 세계로 다가설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준 봉암사.괴산군청.문경시청.경북도청.충북도청.산림청등 관계자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어쩔 수 없이 현실을 피해갈 수 없다면 이전투구 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하면서 새로운 돌파구(등로개설등)를 찾기 위 해 함께 노력할 것이다.
이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백두대간을 찾는 모든이들의 소망이기 때문이며 후답자들을 위한 선답자의 고뇌로 이해 해 주기 바랄 뿐이다.
스님들과 맞 짱 보다는 지혜로서 그들과 웃으면서 대화 나눌 수 있는 훌륭한 산악인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스크랩] 백두대간의 꿈! 조령에서 하늘재까지 -북진19구간- (0) | 2007.09.16 |
---|---|
백두대간의 꿈! 이화령에서 조령3관문까지 -북진18구간- (0) | 2007.08.31 |
[스크랩] 백두대간의 꿈! 버리미기재에서 지름티재까지 -북진16구간- (0) | 2007.08.09 |
백두대간의 꿈! 늘재에서 버리기미재까지 -북진15구간- (0) | 2007.07.22 |
백두대간의 꿈! 갈령삼거리에서~늘째까지 -북진14구간- (0) | 2007.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