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 대한 불교 조계종
창건시기: 654년(신라 무열왕 1년)
창건자: 원효
소재지: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산 1 번지
자재암(自在庵)은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소요산(逍遙山)에 있는 절. 한 때 영원사(靈源寺)라고 불렸던 이 절은
대한 불교 조계종 제 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654년(신라 무열왕 1년) 원효(元曉 : 617~686)대사가 창건하여 자재암이라고 했다.
그 후 974년(고려 광종 25년) 각규(覺圭)가 태상왕인 태조의 명으로 중건하여 소요사(逍遙寺)로 바꾸고,
1153년(고려 의종 7년) 화재로 없어진 것을 이듬해 각령(覺玲)이 대웅전과 요사채만을 복구하여 명맥만 이어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872년(고종 9년) 원공(元空)과 제암(濟庵)이 퇴락한 이 절 44칸을 모두 중창하고
영원사(靈源寺)라 하였다.
이때 영산전·만월보전(滿月寶殿)·독성각·산신각·별원(別院)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1907년 화재로 만월보전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1909년 성파(性坡)와 제암(濟庵)이 다시 중창하고 절 이름을 본래의 자재암으로 고쳤다.
이때에는 전각뿐 아니라 약사여래상과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 등의 불상과 함께 이 절의 유래와 깊은 관련이 있는
원효, 의상(義湘), 윤필(尹弼)스님 등의 화상(畵像)을 그려서 봉안했다고 한다.
6·25전쟁 때 다시 소실(燒失 : 불에 타서 잃어버리는 것)되어 1961년 진정(眞精)이 대웅전을, 1968년 성각(性覺)이
요사채를, 1977년 법조(法照)가 삼성각을, 1982년에는 일주문을 각각 지었다.
이어 1984년에는 부설 유치원이 개원하였고, 1983~1985년에 오래된 건물이 헐리고 새로운 중창이 이루어지면서
오늘날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절에는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한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세속의 인연을 맺은 뒤, 이곳에 초막을 짓고
수행에 정진하고 있을 때, 관세음보살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여 원효를 유혹을 하였다.
그러나 설법으로 유혹을 물리친 원효는 이내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이었음을 깨닫고 더욱 수행에 정진하는 한편,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무애자재인(無碍自在人)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절을 짓고 자재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또한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의 승려이던 제암과 자재암의 주지인 원공이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우연히 만나
절을 중창했다는 영험담도 전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삼성각, 나한전, 일주문, 백운암, 요사채가 있는데 전부 1961년 이후의 중창 때 세운 것이다.
경내 및 주위에는 1980년에 세운 속리교와 세심교가 있다.
1909년 중창 때 그린 불화도 많이 남아 있었는데 6·25전쟁 중에 대부분 소실되었고,
1914년 무렵에 그린 칠성탱화만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삼성각에 봉안되어 있다.
'조선지지(朝鮮地誌)'에는 절 근처에는 원효와 요석공주(瑤石公主)의 전설이 얽힌 요석궁(瑤石宮)의 옛터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요석궁지는 요석공주가 설총(薛聰)을 키웠다는 곳으로 그 위치는 자재암 부근의 하백운대 부근으로 보인다.
주변에는 조선 태조 행궁지, 원효대, 원효폭포(청량폭포), 백운선원, 추담대종사사리탑이 있으며, 자재암 경내에는
옥류폭포와 자연석굴로 된 나한전과 원효정(元曉井)이 있으며,위로 더 올라가면 선녀탕과 선녀폭포,
옥로봉, 금송굴, 나한대, 의상대, 하백운대, 중백운대, 상백운대 등이 있다.
바로가기 -www.who-wh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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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로는
1994년 10월 17일 보물 제 1211호 지정되어 소요산 자재암에 소장된 보물 제 1211호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가 있다
당나라 현장이 번역한 반야심경약소에 송나라 중희의 현정기를 붙여 편찬한 주석서인데 세조10년(1464)에 금강경과 함께 간경도감에서 발간한 책이다. 이판본은 현재 보물 제 771호로 지정된 서울대학교 도서관본과 동일한 책이나 이곳에 없는 전이 붙어 있고 교정인이 찍혀 있으며 보전상태는 보다 양호하다. 불교문화재로서 뿐만아니라 서지학 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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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
자재암경내도
일주문
부도전
원효폭포의 옆에 있는 둥굴
백운선원
자재암
대웅전
요사채
삼성각
나한전 현펀
나한전
독성암(옥류폭포)아래 있는 조그만한 동굴을 1980녕도에 확장하여 조성한 법당이다
굴 안에는 석가모니불좌상과 가섭.아난존자입상.16나한상.원불을 봉안하였다.
원효샘
원효대사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이 샘물은 일년내내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으며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석간수"이다.
독성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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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국불교미디어센터의 원효대사에 얽힌 설화를 옮겨 적어 본다. --------------------------------------------------------- 사계절 풍광이 아름다워 봄철 철쭉, 여름철 綠陰, 가을철 단풍, 겨울철 설경이 이 산의 자랑이며 달리 小金剛으로 불러왔다.
이 산에는 신라시대의 高僧 元曉대사(617∼686)와 瑤石公主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는데 元曉와 관련이 있는 지명과 사찰이 남아있다. 즉 下白雲臺 아래에는 元曉가 수도했다는 元曉臺, 元曉굴, 自在庵이 있고 瑤石公主와 薛聰(설총)이 머물렀다는 瑤石宮(요석궁)터가 逍遙山 입구 북측에 있다.
설총이 태어난 곳은 아버지 원효의 고향인 慶北 慶山市 仁興里로부터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洗谷洞에서 태어났다고 밝혀지고 있다. 수도한 自在庵 가까이 거처를 정하고 母子가 머물렀고 이들이 머문 집이 瑤石宮터로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원효대사는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남편과 사별한 瑤石公主(太宗武烈王의 둘째 누이)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여자와 관계했다는 이유로 파문당하며 그때부터 자신을 小性居士라 부르며 전국 名山大川을 주유하고 설법과 수도를 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일화가 전해온다.
원효는 원래 화랑의 일원으로 백제전투에 참전하였고 瑤石公主의 첫 남편도 백제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그리고 원효는 전쟁에 대한 혐오감을 가졌고 인명살상을 죄악시하여인의 길을 버리고 佛門에 귀의하였다. 自在庵의 창건시기가 善德女王 14년 (서기 645년)인 점으로 보아 金春秋가 왕위등극 이전에 사람이 만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조 李太祖의 行宮터는 산 입구에 있다.
조선시대의 시인 묵객들이 많이 이 산을 찾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金時習, 徐花潭, 楊士彦 등이다. 최근 동두천시는 廣岩洞(銅店마을) 일대(67만평)를 향토관광마을로 조성하여 꽃길, 산책로, 주말학습장, 주말농장, 물놀이 시설, 삼림욕장, 향토음식점, 숙박시설을 수용하여 수도권 관광객을 유치할 계획이다. 비바람이 부는 어느 날 밤에 낯선 젊은 여자가 찾아와 하룻밤을 묵고 갈 것을 청했다. 元曉는 비내리는 밤이므로 그 여인을 되돌려보낼 수가 없어 하룻밤 묵어 가도록 허락했다. 침침한 등불에 비친 그 여인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수도승인 元曉는 공연히 여자를 맞아들였다고 뉘우쳤지만 이미 허락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이 여인의 모습이 떠올라 元曉는 精進을 할 수 없었다. 元曉는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법이다.
내가 色心이 없다면 이 여인은 목석이나 다름없다. 나의 오랜 修道를 이 여인으로 인하여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없다."고 되뇌면서 비에 젖은 여인을 따뜻한 곳으로 눕히고 손으로 차가운 몸을 주물러 녹여주었다. 元曉는 묘한 느낌이 일어나지만 마음속으로 念佛을 하면서 유혹을 물리쳤다.
얼마 후 몸이 풀린 여인은 자리에 일어나 앉아 元曉에게 요염한 눈길을 보내고 접근해왔다. 元曉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새벽녘에 元曉는 간밤에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난 계곡에 옷을 벗고 목욕을 하였다.
맑은 물에 몸을 담구어 간밤에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서 유혹을 물리친 佛心으로 기쁨에 젖어 있었다. 마침 그때 우연히 앞을 바라보니 아침 햇살에 비친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이 갑자기 보여 元曉는 가까이 오지 말도록 나무랐다.
그때 그 여인은 "제가 스님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님이 저를 色眼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하고 대꾸하였다. 元曉는 이 말을 듣고 난 뒤 눈이 캄캄해지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 자신을 되돌아보니 광명을 찾은 듯 그의 눈에는 주위 사물이 밝게 보였다. 元曉는 "나는 이제 깨달았다." 하면서 물 속에서 나와 옷을 벗은 채로 여인 앞으로 지나갔다.
그때 그 여인은 더 이상 요염한 여자가 아니라 금빛 찬란한 後光을 띈 觀音菩薩이 되어 폭포 위로 사라졌다. 觀音菩薩이 元曉의 佛心을 시험하기 위해 잠시 인간으로 現身한 것이다.
이 절 이름을 自在庵이라고 고쳐 불렀던 이유는 아무거리낌 없이 마음과 뜻을 다스릴 수 있었다는 元曉의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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