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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의 유래와 변천사
읍지류 양양에서
嶺路連水坡嶺西北七十五里五色嶺 弼奴嶺 朴達嶺俱西五十里麟蹄界所冬羅嶺(曺枕嶺兄弟峴)西六十里絶險舊有通京大路麟蹄界九龍嶺西南六十五里江陵界(영로 연수파령(미시령)은 서북쪽 75리에 있으며 오색령.필노령.박달령은 모두 서쪽 오십리에 있는 인제이다. 소동라령(조침령과 형제현)은 서쪽 60리에 있는 인제界로 험한 절벽지이다. 경성으로 통하던 대로였으나 폐쇄되었다, 구룡령은 서남쪽 60리에 있으며 강릉계이다)
※ 조침령은 所冬羅嶺(曺枕嶺兄弟峴)소동라령과 함께 성종24년 미시령길이 열리기 전 서울로 가던 중요역할을 하였으나 미시령이 개통되면서 오색령(所冬羅嶺寒溪嶺)과 함께 폐쇄되었다.
양양읍지도(1872조선지도)
1.조침령(옛길과 현재의 조침령)
(양양군 서면 서림리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해발750m이다)
曺沈嶺-阻沈嶺-鳥寢嶺(이것이 한자의 마술이다)
같은 고개를 曺沈嶺-阻沈嶺-鳥寢嶺(曺沈嶺-阻沈嶺은 옛 조침령을 말하고鳥寢嶺은 군부대가 개설한 도로를 말 하나 그 아래 터널이 뜷려 鳥寢嶺도 옛길이 되고 말았다)등 시대마다 다르게 표기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깊이 있게 들어가 보면 국어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나 뜻이 전하는 것이 같은 것 같으면서 전혀 다르다.
산경표에 “曺寢嶺”으로 표기되어 있고 해동지도와 대동여지도 등, 고지도에는 阻沈嶺으로, 현재의 이정표에는 새조(鳥)자를 써 鳥寢嶺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고개는 예로부터 영서와 영동을 이어주는 중요한 구실을 하던 고개로 한계령(산경표에는 오색령으로 표기되어 있음)과 함께 중요한 길목으로 여겨 형제현(兄弟峴)이라 하였다. 오색령을 넘어왔던 사람들과 흘리령을 넘어 온 사람들이 만나 내림천을 따라 한양으로 넘나들이 하던 길이었으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루트였던 것이다.
옛조침령에는 우마차가 지날정도로 넓었던 길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2008년도 백두대간2차북진 때 촬영)
1.산경표나 중보문헌비고에 나타나는 조침령(曺寢嶺)은 무리조(曺),잘침(寢)재령(嶺)이다.
2.고지도에 나타나는 조침령(阻沈嶺)은 막힐조(阻),베개침(沈)재(嶺)이다.
3.이정석에 쓰여 있는 조침령(鳥寢嶺)은 새조(鳥)잘침(寢) 재령(嶺)이다.
1. 무리지어 자고 넘는 다는 뜻이고 2. 험한 고개가 가로막고 있으니 하룻 밤 유숙하여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 일게다. 3. 고개가 험하여 새(鳥)들도 자고 넘는 다는 뜻이고 보면 뜻은 같으나,1과2는 같은곳에 위치하고 3의 위치는 다른 곳에 위치한다.
1과2는 쇠나드리에서 윗서림으로 넘어가던 길이었고(이 길은 현재의 조침령에서 구룡령방향1.5km지점에 위치한다) 3.은(김재규의 사단장 재직시 3공수부대원들에 의해 개설되었다고 마을사람들은 증언한다)현재의 조침령을 말하는 것으로 원래지명은 "반편고개" 또는 "반부득고개((서림에서 조침령으로 넘어가는 중턱에 대략 5만여평 되는 소반처럼 넓은 평지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라 하였다.
현재의 조침령은 역사가 20여년 밖에 되지 안했지만 그 당시 군인들의 힘들었던 고난에서 병사들을 새(鳥)로 비유한 것 같고 옛 조침령은 九折羊腸 먼 길이라 서림이나 쇠나들이에서 하룻 밤 유숙하여 이른 새벽길 나서야 해질 녁 목적지에 도착했을 험하고도 먼 길이었을 것이다.
쇠나들이 살고 있는 원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쇠나들이” 에 마방이 있었고 소금을 싫은 우마차가 조침령을 넘나들었다고 하니 “쇠나들이”는 소(소를 “쇠”로 발음함)가 넘나들던 고개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어떤 이는 조침령의 바람이 소도 날려버릴 만큼 거센 바람이 분다하여 "쇠나들이"라 하는데...어째 좀!!
방태천환주도( 주민들은 곁가리를 연가리와 같은 곳으로 설명한다)
2.연가리골
정감록에 나오는 3둔오가리 중 연가리에서 온 지명이다.
참고로 3둔 오가리를 대략적으로 적어 본다.
3둔은 홍천군 내면 미산리에 있는 골의 이름으로 "달둔.생둔.월둔"을 말하고 5가리는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와 진동리 사이의 방태천 따라 이루어진 아침가리.연가리. 적가리.곁가리. 명지가리(곁가리는 확실한 위치파악이 안 되고 있음)를 말하는데 모두 깊은 골짜기를 이름이다.(3둔4가리로 보는 것은 곁가리에 대한 위치를 알지 못함이나, 주민들은 곁가리와 적가리를 같은 곳으로 보고 있다)
“달둔.생둔.월둔“의 둔(屯)은 산자락으로 보았으며 오가리의 “가리”의 뜻은 사람이 농사를 지을만한 골(계곡)이나 밭(田)을 개간할만한 산비탈을 일컬음이다.
방태산을 중심으로 남사면인 구룡령 방향(숫돌봉아래)에 “3둔“이 자리하고 북쪽의 방태천 주변으로 5가리가 있다.
5가리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아침가리는 밭뙈기가 너무 좁아 아침 해가 들 때쯤이면 밭을 모두 갈아버릴 수 있어“아침가리“라 하고 한자로“朝耕洞”이라 쓰며 예전에는 정감록의 풍수지리사상을 신봉하는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 화전을 일으키며 20여 가구가 살았으나 무장공비 사건으로 소개(疏開)되어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단 한 가구(사재봉씨 거주)만 남아 있다.
또한 약수산을 기점으로 약수터가 많아(가칠봉의 삼봉약수와 조경동의 방동약수.구룡령의 구룡약수가 갈천리의 갈전약수 마늘봉 아래 불바라기약수 등이 유명하다)예로부터 찾는 이들이 많다.
참고:약수산은 남개리 약수터에서 온 지명이다.
3.갈전곡봉(葛田谷峰)
양양군.인제군. 홍천군의 경계를 가르는 삼각고지인 갈전곡봉의 원 지명은 “치밭골봉“이며
“치밭“은 ”칡밭”의 변음으로 이두문 갈전(葛田)으로 표기하고 “谷“은 골짜기를 말하고 ”溪”로 나타낸다.
4.구룡령(九龍嶺)
양양군 서면 갈천리와 홍천군 내면 명개리를 넘는 고개로 해발1013m이다.
구룡령은 명개리와 갈천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아흔아홉 고개가 용이 승천하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고 구룡령의 옛길이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72년경으로 임산물과 자철광을 운반하기 위해 개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진참조:
1994년에 아스팔트 포장된 현재의 구룡령은 일제 강점기에 자원찬탈을 목적으로 개설 된 도로를 확포장 한 것으로 옛날 사람들이 넘나들던 옛 구룡령은 현재 샛령으로 불리는 곳이다.
신구룡령에는 동물이동통로가 있고 휴게소가 있었으나, 운영이 되지않아 산림청에서 인수하여"산림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5.신배령
홍천군 내면 명개리와 강릉시 연곡면 삼산동 부연동을 이어주는 고개이다.
명개리 사람들이 신배령을 넘어오면 부연동사람들과 합류하여 전후치(앞과 뒤가 같다고 하여 “전후치”라 한다)고개를 넘어 주문진으로 장을 보러 다니던 고개로 신맛이 나는 돌배가 많아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신배령
6.오대산
오대산은 원형으로 감싸고 돌아가는 1.호령봉.2.비로봉.3. 상왕봉.4. 두로봉.5.동대산을 5산으로 보았고 오산의 줄기에서 “대”를 이루는 1.만월산 2..기린산.3.장령산.4.상왕산.5.지로산의 정상을 5대(산등성이에 가장 돌출 된 부분으로 사방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지형을 가진 산등성이를 “대”라 한다)라 하여 5山과 5臺를 합하여 五臺山이라 하였고 그 아래 다섯암자를 지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오(臺)와 다섯 암자”는 .1.북대(상왕산). 2.(만월산). 3중대(지로산). 4.서대(장령산) 5.(남대.기린산)과 1.미륵암(북대).2서대(수정암).3.사자암(중대).4지장암(남대).5.관음암(동대)을 이름이다.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 된 상원사와 월정사의 거리를 원형을 그리며 병풍처럼 감싸고 돌아가는 산줄기가 중국 “산서성“의 오대산과 닮은꼴이라 하여 같은 지명을 얻게 되었다.( 중국의 오대산는 산약숭배를 모태로 하는 문수신앙과 밀교가 번창하였는데 이것은 산에 거주한다고 생각하여 山神을 崇拜한데서 유래한 신앙으로 일명 “오대산신앙”이라 한다.
자장율사에 의해 “석가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과 함께 창건 된 상원사는 160여년이 지난 후 신문왕의 왕자인 “보천”과 “효천”이 수도하면서 만월산(동대)에는 지장보살을, 기린산(남대)에는 지장보살을. 지로산(중대)에는 비로나자를, 장령산(서대)에는 무량수여래를, 상왕산(북대)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다섯의 암자를 창건하게 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보천”이 임종할 때 신라의 안위를 위해 아래와 같은 방안을 남겼다고 한다.
"오대산은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대(臺)는 진신(眞身)이 상주하는 곳이다"
1."靑"은 동대의 北角아래와 북대의 남쪽 기슭에 있다.
그 곳에 “관음방“을 두어 원상관음과 푸른 바탕에 1만 관음상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오원을 두어 낮에는 “팔권금경”과 “인왕반야” “천주주”를 읽게 하고 밤에는 관음예참을 念하게 하여 그곳을 “원통사”라 이름하라.
2. "赤"은 남대의 남면에 있다.
그곳에 “지장방“을 두어 ”원상지장”과 붉은 바탕에 “팔대보살“을 수반으로 1만 ”지장상”을 그려 봉안하고복전5전을 두어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를 읽게 하고 밤에는 “점찰예찰“을 念하게 하여 ”금강사“라 이름하라.
3.“백색방“은 서대의 남쪽에 있다.
그곳에 “미타방“을 두어 ”원상무량수”와 흰 바탕에 ”무량수여래”를 수반으로 하는 1만 대세지를 그려 봉안하고복전5원을 두어 낮에는 “팔권법화”를 읽게 하고 밤에는 “미타예참”을 念하게 하여 “수정사”라 이름하라.
4. "흑색지"는 북대의 남쪽에 있다.
그곳에 “나한당“을 두어 원상석가와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수반으로 “오백나한”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5원을 두어낮에는 “불보은경”과 “열반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열반예참”을 “백련사”라 이름하라.
5."황색처"는 중대에 있다.
그곳에 “진여원“을 두어 가운데에다 “이상분수부동“을 모시고 후벽에는 누런 바탕에 ”비로나자”를 수반으로 섭삽육화형을 그려 봉안하고 복전오원을 두어 낮에는 ”화엄경“과 ”육백반야“을 읽게 하고 밤에는 ”문수예참”을 念하게 하여 ”화엄사“라 이름 하라.
“보천암“을 개창하여 “화장사”로 하고 “원상비로나자삼존“과 ”대장경“을 봉안하고 복전오원을 두어 낮에는 장문장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화엄신중”을 念하게 하고 해 마다 100일 동안 “화엄회”를 열게 하여 “법륜사“라 이름 하라. 이 ”화장사”로 오대사의 본사를 삼아 굳게 호지하고 정행복전을 명하며 길이 향화를 받들게 하면 국왕이 장수하고 백성이 안태하고 문무가 화평하고 백곡이 풍요할 것이다.
보천의 지시에 의해 행하여진 이러한 방안은 오대산 각 봉우리에 대한 신앙형태와 수행실천에 대한 것을 엿볼 수 있으며 또 한 신라인들은 산악에 신이 거처한다고 생각하여 산악을 숭배하는 습성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도 토속신왕과 불교가 혼합한 산악신앙으로 가장 융성한 곳이 오대산신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대산 환주도
{오대산신앙은}
동북방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1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항상 설법한다.
“육십화엄경 , 보살주처품”과 내가 멸도한 후 섬주부의 나라가 있어 대진국이라 이름한다. 그 국토중에 오정이라는 산이 있고 문수사리동자가 유행거주하면서 모든 중생을 위하여 “문수사리법보장다라니경”을 설법한다.
오대산(寺)는 신라선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고 보천에 의해 융성하였으나 고려 충렬왕 때 모두 소실되어 이일스님의 의해 중창되었다가 조선순조 때 큰 화재를 당했고 6.25전쟁 때 17동의 건물과 문화재들이 전소되었다.
탄허스님의 중건을 시작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상원사와 월정사는 두루봉을 우두머리로 하는 산줄기 따라 내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얼마 전까지 남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왔던 우통수가 발원한다
우통수는 다른 물과 쉽게 석여지지 않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따르면 “한수”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7.진고개
진고개는 대동여지도와 기타 문헌에 니현( 泥峴) 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긴고개”가 “진고개”로 변음 되었다가 니현 (진흙(泥)과 재현(峴)=泥峴)으로 한자화 된 것으로 보인다.(긴 고개를 (長嶺)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참고:대동여지도
뒤 돌아 보는 노인봉
진고개의 모습
어떤이들은 긴고개는 고개가 길다하여 붙여진 지명이고, 진고개는 땅이 질퍽거려 걸어넘기 힘들다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
8.노인봉과 소금강
1.노인봉은
심마니의 꿈 속에 노인이 나타나 산삼이 있는 곳을 알려주어 "노인봉'이라 지명되었다 하고
2.소금강은기암절벽이 금강산을 닮았다고 하여 소금강이라 하고....
대동여지도에는 청학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진고개에서 조망하는 노인봉
9.곤신봉
곤신봉은 강릉부사의 집무실이 있던 동헌(칠사당)의 서쪽에 자리잡아 풍수지리 24방에서 볼 때 곤신(坤申)에 속하므로
“곤신봉"이라 했으며 곤신봉의 가지줄기에는 ”대궁산성“이 있다.
10.선자령
새봉과 곤신봉 사이에 위치한 선자령은 서북 방향에 오대산과 황병산이 자리 잡고 남.서쪽에는 제왕산과 발왕산이 자리 잡아 오행을 이루며 동쪽에는 강릉시와 서쪽으로는 평창군(횡계)이 자리 잡고 있다.
산경표에 “대관산”이라 하였고 동국여지지도에“보현산”태고사법에는 “만월산((선자령 아래 보현사에서 바라보는 봉우리의 모습이 보름달처럼 둥그런 모습이라 만월이라 하였다)”으로 적혀 있으나 “선자령”으로 불리게 된 뚜렷한 기록은 없어 보인다
다만“山”이 “嶺“으로 둔갑 된 것을 유추 해 보면 대관령이 뚫리기 전 관동(강릉)과 관서(원주)를 넘나 들던 사람들의 발걸음에 의해 ”령“으로 불려 지게 된 것으로 보이며 ”선자“의 지명은 계곡의 경치에 반한 선녀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 와 목욕을 하고 놀다 하늘로 올라 갔다는 전설에 유래하여 ”仙子嶺“이라 하지만 고갯마루 넘어가며 바람결에 나풀거리는 선비들의 옷 자락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자처럼 그 모습 아름다워 "선자령"이라 했다면 더 민초적인 것이 되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선자령
12.대관령산신각
고려시대에 “대현”이라 불렸던 대관령에는 수 많은 역사와 민초의 애환이 살아 있은 곳으로 고려 태조(왕건)가 신검을 제압할 때 하늘의 계시를 받아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산신각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려사)에는 대관령산신제와 다른 한편으로는 국사성황신(신라김유신장군을 모신 사당)제를 지낸 역사가 기록되어 있고 그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 져 강릉단오제의 근거가 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보너스로 횡계팔경과 소개와 더 불어 횡계 사람들이 황병산에서 사냥을 마친 후 서냥당에 사냥감을 올려 놓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던 사냥노래 한 토막을 여기에 남긴다.
횡계팔경(橫溪八景)
1. 刀山狂風(칼산에 휘몰아치는 매운 바람)
2. 黃柄白雲(黃柄山의 높이 뜬 구름)
3. 嶺路行人(大關嶺 아흔 아홉 구비 돌아 오가는 行人)
4. 橫溪垂約(橫溪里 三井坪의 고기 낚는 것)
5. 高樓晴月(高樓山에 맑게 갠 달)
6. 曉星霽月(曉星山의 밝은 달)
7. 祥鳳落照(祥鳳嶺의 해가 지는 光景)
8. 能政出日(能政山에 해가 돋아 오르는 光景)
사냥노래(구절)
눈이 많이 내렸으니 산짐승이나 잡으러 가세
에~헤야 얼 ~럴 ~럴 상사디야
너도 가고 나도 가세 손에 손에 창을 들고
에~헤야 얼~ 럴 ~럴 상사디야
이 산 저 산 살피면서 황병산에 올라가세
에~헤야 얼 ~럴 ~럴 상사디야
지명(地名)으로 본 대륙조선(大陸朝鮮) -펌- (0) | 2009.0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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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지명의 유래와 변천사(대관령~피재구간)1-4 (0) | 2009.0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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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지명의 유래와 변천사 [本文] (0) | 2009.07.02 |
산경표에 나타나는 백두대간의 수다산과 백병산의 現 지명과 옛 지명 ! (0) | 2009.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