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백두대간(남한구간)을 3차에 걸친 답사와 이론으로 접했던 산경표와 고지도에 나타난 옛지명과 현지명의 변천에 대해 알아보면서 역사속에 묻혀 버린 옛 지명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자 작성하였다.
산경표에 나타난 백두대간의 지명과 변천사
1.백두대간의 이해
2.문헌에 나타나는 백두대간
3.산경표의 백두대간
4.고지도의 백두대간
5.산경표와 고지도에 나타나는 백두대간의 상이
6.山, 峰, 岳, 臺, 德, 嶺, 峙의 차이 ...
7.옛 지명과 현 지명의 비교.
1.白頭大幹의 理解
①백두대간은 우리의 영산인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한반도의 중심부를 지나는 산줄기로 태백산에 이르러 해안선을 따라 낙동정맥을 보내고 남으로 뻗어가는 산줄기는 소백산.속리산.덕유산을 연 이여 낳으며 지리산에 이르러 脈을 다하니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리서 山徑表에서는 이름하여 “백두대간”이라 “稱” 하였다.
백두대간의 총 거리는1.658.6m(백두산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거리)이고 향로봉에서 천왕봉까지 남한구간의 백두대간의 거리는 695.2km이다.(신산경표 자료인용)
②우리의 산줄기 체계는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에 한남금북정맥과 금남호남정맥은 한남.금북정맥과 금남.호남정맥의 두 줄기를 분기하기까지의 산줄기로 혼합된 지명을 사용하였으며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황봉과 장안치(무령고개)에서 분기한 산줄기들이다.
(도표참조:무순)
白頭大幹(1대간) 靑北正脈(13-2정맥) 臨津北禮成南正脈(13-5정맥) 漢南錦北正脈(13-8정맥) 錦南湖南正脈(13~11정맥) 長白正幹(1정간) 靑南正脈13-3정맥) 漢北正脈(13-6정맥) 漢南正脈(13-9정맥) 錦南正脈(13-12정맥) 洛南正脈(13-1정맥) 海西正脈13-4정맥) 洛東正脈(13-7정맥) 錦北正脈(13-10정맥) 湖南正脈(13-13정맥)
따라서 모든 산들이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이에 물줄기가 있어 실 타래 풀어지듯 엉켜지는 부분이 없다는 것이 산줄기의 매력이다.
산과 산 사이에 계곡이 있고 계곡에는 반드시 물줄기 흐르니 山川이 조화를 이루고 그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니 자연의 위대함에 항상 겸손할 줄 알아야 하는 12정맥의 종산과 12종강의 도표를 아래와 같이 정리 한다
12종산과 12종강
1.삼각산(북한산) | 5.두류산 | 9.태백산 | 1. 한 강 | 5.사호강(영산강) | 9.청천강 |
2.백두산 | 6.분수령 | 10.속리산 | 2.예성강 | 6.섬강(섬진강) | 10.용흥강 |
3.원산 | 7.금강산 | 11.장안산 | 3.대진(2) | 7.낙동강 | 11.압록강 |
4.낭림산 | 8.오대산 | 12.지리산 | 4.금강 | 8.대동강 | 12.두만강 |
12항의 두만강은 조선 명종 때 학자 어숙권(漁淑규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실려있는 내용과 동일하고~~따라서 위 내용은 여암 신경준이 담당한 [여지고}에 기록된 내용임으로 1700년대 중반의 시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2.문헌에 나타나는 백두대간
백두대간이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 연대부터 최근의 역사를 시대 순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옥룡기(玉龍記))(도선의 비기로 현재 전하지 않는다)에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산에서 끝났으니,그 지세는 물의 근원이요 나무의 줄기와 같은 땅이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어숙권(魚叔權)의[패관잡기』(稗官雜記)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고려사절요에 나타나는 옥룡기의 내용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그 밖에 문헌에 나타나는 백두대간의 역사는 < 백두대간 문헌정리 요약 ('96.3월 산림청 발간) >의 내용을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요약정리 한다.
1402년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권근).백두대간의 산줄기가 표시되어 있음.
16세기 경 :『패관잡기』(어숙권)에 보면, 고려 공민왕 때 우필흥이 임금께 올리는 글(上書)중에 우리나라 지세는 백두에서 시작하여 지리에서 끝났다'는 내용이 있음.
1751년 :『택리지』(이중환) 조선 산맥, 백두대맥, 백두남맥, 대간 등의 용어 사용.「산수」편에 대간과 정간 12정맥으로 볼 수 있는 내용 묘사.
1760년 경 :『성호사설』(이익) 「천지문」 편 제목 : '백두정간' 중에 백두대간 용어 사용
1770년 :「여지고」(신경준) 『동국문헌비고』 중의 한편으로 산경표의 뿌리가 됨.
1861년 : 「대동여지도」(김정호) 백두대간이 지도상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음.
1899년 :『대한지지』백두산은 전국산의 조종으로 지리산에서 끝 난다로 표현.
1908년 :『대한신지지』(장지연) 백두산맥이라 표현
1913년 :『산경표』(조선광문회) 간행번역본. 조선광문회는 '빼앗긴 국토와 역사의 줄기를 되찾으려는 방법의 하나로 조선 구래(舊來)의 문헌·도서 중 중대하고 긴요한 자료를 수집'하여 편찬하였는데 지리서 중 『산경표』를 세 번째로 간행함.(참고 자료 : 영인자료)
1980년 :『산경표』(조선광문회)가 이우형의 손에 들어와 <대동여지도>와의 대조 등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됨.
1986년 :『스포츠레저』에 이우형의 권유에 의해 백두대간이란 용어 등장함. 『조선일보』(07/24)에 이우형의 「국내 산맥이름 일제가 바꾸었다」는 기사 실림.
1988년 : 한국대학산악연맹 학술지 『엑셀시오』에 ( 1. 백두대간이란 무엇인가 -박기성. 2. 백두대간을 가다 : 종주기 - 편집실)을 특집으로 다룸.
1990년 :『산경표』조선광문회본 영인.(박용수 해설. 푸른산)
1993년 :『산경표를 위하여』(조석필. 산악문화),『태백산맥은 없다』(조석필. 사람과 산)은“대동여지전도”의 발문에 실려 있는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山自分水嶺)'는 원리를 산악인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현대적으로 해석, 설명하였음.
1997년 :『태백산맥은 없다』는 『산경표』와 백두대간에 대한 관심을 결정적으로 촉발시킴,(당시에 조선대학교 학생들의 백두대간 출정으로 인하여 산악인들에게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옴)
2000년 :『한글 산경표』(현진상)은“여지고”등 문헌을 검토하여 『산경표』의 저자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여 『산경표』의 저자는 여암 신경준이 아니라 신경준의 「여지고」를 기본으로 1800년대 초에 누군가가 지은 것으로 추정함.
2004년:[신상경표](박성태) 신경준의 산경표를 수정 보완하여 “신산경표”를 발간함.
3.산경표의 백두대간
①산경표의 이해
산(山)과 강(江)이 어울린 자연적인 구조에서 원리를 찾는데 목적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산경표(山經表)」를 접할 수 있는 것은 1910년 최남선이 설립 한 조선광문회의 고전 간행 사업 때문이다. 당시 조선광문회는 일본에서 발행된 온갖 신간서적과 우리의 귀중한 고문서를 수 천 권씩 보유하고 있어서 당시의 지식인들이 자주 회합을 갖던 장소였으며, 주요 실 무자는 장지연(張志淵), 유근(柳瑾), 이인승(李寅承) 등이었다.
·조선광문회에서 1912년 6월 우리나라 지리서 중 가장 청요(淸要)하고 또 인문 지리학의 시초라고 평가받고 있는 『택리지(擇里志)』가 출판된데 이어 1913년 여암 (旅庵) 신경준(申景濬)의 「산경표(山經表)가 출판되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 지리에 관한 저서로는 1904년 일본 동경의 환선주식회사에 서 발행한 『한국지리(韓國地理)』가 있었으며, 이 책은 우리나라 산맥의 계통을 일 본 동경 제국대학의 이학박사인 고또 분지로(小藤文次郞)가 연구한 개요에 따라서 기술하였고 지리 교과서에 사용되었다.
"고또 분지로"는 1900년부터 1902년 사이에 2회에 걸쳐 우리나라를 방문해 14개월간 전국을 답사하면서 우리나라 지형을 연구하였으며, 그의 이론은 지리학적인 분석이 아닌 지질학적으로 분석하고 명명한 것으로 이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통치, 그리고 일본 기업과 민간인들의 국내 시장 침투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 때문에 산맥 명칭을 둘러싼 문제점을 우려하여 최남선과 조선광문회에서 「산경표(山經表)」의 간행을 서둘렀다고 보여 지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왜곡되어 가는 우리나라 산줄기 갈래와 이름을 바로잡기 위한 민족적 저항 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리 교과서에 실린 산맥의 명칭과 개요는 고또 분지로의 이론을 아무런 검토도 없이 그대로 따르고 있는 형편이므로 이것은 후학들이 연구 노력하여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
·산경표의 저자인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은 1754년(영조 30)에 증광시 을과 (乙科)에 합격(合格),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 성균전적을 지내고, 왕명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便覽)』을 감수(監修)하여 그 공으로 승정원 동부승지에 뽑힌 후, 병조참지로 옮겨 [팔도지도]를 감수하였다.
·[여지승람(與地便覽)]은 그 책이름이 뜻하는 그대로 땅 모습을 보기 쉽도록 만 든 책으로, 영조 45년(1769)에 간행(刊行)되었다. ·[여지승람(與地便覽)]은 2권 2책으로 건책(乾冊)과 곤책(坤冊)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이중 건책이 바로 산경표(山經表)이다. 곤책은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 로 당시 서울과 각 지역 간의 거리를 표기하고 있다.
·내제목(內題目)이「산경표(山經表)」로 되어 있는 [여지승람(與地便覽)의 건책은 백두대간, 장백정간 등으로 우리나라 산줄기를 나누어 그 밑에 각각 중요 한 산 이름을 적고, 그 옆에 부읍의 지명과 거리를 이수(里數)로 표기하여 산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도록 기술하였다.
아직까지 공인(公認)된 것은 아니지만 1769년 여암 신경준이 펴낸 것으로 되어 있는 족보(族譜) 형식으로 써 내려간 산경표(山經表)라는 지리서(地理書)와 1866년 고산자 김정호가제작(製作)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그러한 노력의 한 결실(結實)이라고 볼 수가 있다.-양보경교수 글에서-
④고지도의 백두대간
①삼국시대
『구당서(舊唐書)』 동이전 고려조에 의하면 '정관2년 파돌궐 서리가한 건무견사봉하 병상봉역도(貞觀2年 破突厥 署利可汗 建武遣使奉賀 幷上封役圖)'라 하여 고구려가 당에 봉역도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②고려시대
신라말 도선에 의해 일기 시작한 풍수지리설은 이후 고려시대 지리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풍수지리 사상은 조선시대에 이어져 지도상에 내맥(래맥)을 따져 사용한 것도 그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목종 5년(1002)에는 고려지도를 거란에 보낸 기록이 있으며(주2 : '내공본국지리도(來貢本國地理圖)'『요사』외기 고려전(『遼史』 外紀 高麗傳)참조), 여말선초에 살았던 이회(1345 ~ 1405)의 「삼국도후서」에 고려도를 소개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즉 산줄기는 백두산 - 철령 - 풍악 - 태백산 - 소백산 - 죽령 - 계림 - 삼하령 - 추양산 - 운봉으로, 또한 강줄기는 살수·패강·벽란·임진·한강·웅진(이상 서해), 가야진(남해)으로 표기하여 오늘날 백두대간의 주요 산줄기와 그로부터 강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주3 : 방동인 『한국지도의 역사』신구문화사. 2001. 33 ~ 34쪽에서 재인용
③조선시대
조선 초의 지도로는 이회의 <팔도도>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가 그렸다는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일명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주4 : 이 지도의 16세기 모사본이 현재 일본 쿄토 나라현의 류코쿠(龍谷)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라는 세계지도에서 그의 <팔도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고려시대부터 전해져 오던 고려지도들이 저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지도의 특징은 하천과 산맥의 표시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인데, 산악을 개별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하계망(하계망)과 관련시킨 산맥으로 표시한 것은 이회의 새로운 지도제작 기법이다. 이러한 산맥표시법은 후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에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세조 9년(1463)에는 정척(鄭陟)·양성지(梁誠之) 등에 의해 <동국지도>가 완성되었다. 이 지도는 현재 전하여지지 않으나 고려 이후 현존하던 지도를 종합하면서 세종대의 발달된 과학기기로 실측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당시로는 가장 정밀하고 과학적인 지도였을 것이라고 한다.(주5 : 방동인, 『한국지도의 역사』, 85쪽)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리지로는 『동국여지승람』이 있다. 이것은 도(圖)와 지(誌)를 함께 편집하여 지리지로서의 새로운 체계를 완성하였다. 즉 팔도총도와 각 도의 첫 머리에 해당 도의 전도가 1장씩 들어 있어 모두 9장의 지도가 삽입된 것이다. 이러한 지리서의 개념은 조선 말까지 계속되어 조선지리지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그 후 정상기에 의해 <동국대지도>가 새로운 제작법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그 특징은 1) 백리척을 사용한 축척의 비에 따라 그려졌으며, 2) 지도표 범례를 설정하는 등 세밀하고 정확한 실제 지도이다.
조선시대 고지도를 근대지도로 발전시킨 이는 고산자 김정호이다. 물론 그의 지도계통은 조선 초 이회의 <팔도도>에서 시작되어 정척과 양성지의 <동국지도>로 계승되고, 다시 조선 후기 정상기의 <동국대지도>로 발전하여 <대동여지도>에 이르러 그 완성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대동여지도>는 산줄기의 내맥을 명료하게 나타냄으로써 행정구역의 경계가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 면에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전통지도의 도법을 따라 우리의 역사·문화·풍속·언어 등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지도라 할 수 있다.
-김병기(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참고: 백두대간이 지나는 남한지역의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다.(32개 시·군)
(강원도 영월군, 태백시, 삼척시, 동해시, 정선군, 강릉시, 평창군, 양양군, 홍천군, 인제군, 속초시, 고성군, 경상북도 김천시, 상주시, 문경시, 예천군, 영주시, 봉화군, 경상남도 거창군,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전라남도 무주군, 장수군, 남원시, 전라남도 구례군, 충청북도 영동군, 보은군, 괴산군, 충주시, 제천시, 단양군)
-서울대 규장각-
5.산경표와 고지도에 나타나는 백두대간의 상이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의 집필시기와 제작연도는 100여년의 차이가 난다.
산경표는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팔도지도를 참고로 하여 작성 되었으며 대동여지도는 정상기의 지도를 바탕으로 세밀화 되었다.
따라서 대동여지도에 나타나고 있는 산지의 지명이 산경표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산경표가 작성된 시기에서 보면 현재의 지명으로 불려지고 있는 산들은 이름이 없는 무명봉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예) 대동여지도에 나타나고 있는 大朴山(함백산)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산경표가 작성되던 당 시대에는 이름 없는 무명봉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산경표에서는 태백산으로 기록한 것이고 지리산이나 덕유산처럼 여러 개의 봉들이 합쳐진 하나의 집단(山)으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낙동정맥이 분기하는 현재의 천의봉(매봉산)도 태백산의 한 자락으로 보아 낙동정맥의 시작점이 태백산~유치~마읍산 으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김정호의 필사본인 청구도와 대동여지도 등은 산경표나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팔도지도 보다 100여년 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다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정상기의 팔도지도와 비교 해 보면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같음을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산경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신경준이나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는 우리가 배워온 것 처럼 백두대간을 오르고 산을 오르던 사람들이 아닌 학자요, 지도제작자로 각 지방에서 수집된 자료를 참고로 하여 문집이나 지도를 재편집 한 분들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6.山, 峰, 岳, 臺, 德, 嶺, 峙의 차이 ...
山은 峰이 모아져 하나의 집단을 이룬 것을 칭한다.(예: 천왕봉은 지리산의 주봉이기는 하지만, 지리산에 속한 가장 높은 봉우리 중 하나 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러 개의 봉우리 집단을 지리산이라 부른다)
峰은 집단의 객체에서 꼭지 점을 이룬 각 자의 개체를 말하는 것이다.
(예: 천왕봉.중봉.하봉.명성봉.토끼봉 등은 지리산 산군에 속해 있지만 각자의 지명(峰)을 가지고 있다)
岳(嶽)은 산우뚝할봉(峯)과 과 같은 뜻으로 뾰쭉한 산으로 나타내는데 차이점을 비교 해 보면 岳(嶽)은 암봉(바위)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를 말하고峯은 峰중에서도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를 말하는 것으로 올라가기 어렵다(인수봉이나 만장봉 등이 있으나 국어사전에는 "峯"으로 풀이하였으나, 백과사전 등에는 "峰"으로 쓰고 있어 백과사전의 오기로 보임)
臺는 강경대. 낙수대 경포대등과 같이 정자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의 야산이나 산마루 중턱 전망좋은 곳을 뜻하는 것으로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곶(串)과 같다.
德은 가목덕.내지덕.검의덕 등과 같이 오늘날의 고원을 뜻하나 당시에는 사용치 않았으므로 德을 고원의 개념으로 본다.
嶺.峙.峴는 고개(古介)에 해당한다.
嶺는 대관령, 한계령 조령, 추풍령 등 관방이 설치되어 있던 곳과 교통상 중요한 몫을 하던 곳은 영의 명칭이 붙어 있다.
峴과 峙는 팔량치 .외치 .삼마치 .수유현.부황현, 등이 있으며 峙가 峴에 비해 높고 험하다.
따라서 嶺.峙.峴는 모두 고개를 뜻하지만 峙나 嶺은 높고 험한 곳을 말하고,서냥당 고개등 고을의 어귀를 넘나들던 곳을 고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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