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남한구간인 진부령에서 지리산까지 옛 지명과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명에 대한 비교와 함께 잊혀져 가는 역사속의 기록을 남겨 선조들의 얼을 되새겨 보고 자 함이다.(이 글은 私見임을 전제로 한다)
本文을 이어서....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백두대간) 중 남북분단으로 인하여 가고 싶어도 가지 못 하는 북쪽의 산줄기를 찾아 갈 그 날을 기다리며 남쪽구간만의 기록을 남겨야 하는 답답한 마음! 문턱을 넘나들며 목구멍에 쏟아붓고 남은 빈 술잔의 공허함은 글쓰기 마져 힘들게 한다.
산경표17혈과 19혈( "혈"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페이지를 뜻 한다)
산경표를 쓰시는 분께서 나 처럼 한 잔하시고 정리를 하셨던지 진부령과 마기라산(麻耆羅山)이 바뀌어 있다.
마기라산은 현재 향로봉을 말하며 " 간성(간성은 고구려 때는 達忽이라 했고 신라진흥왕이 이 곳을 점령한 후에는 達忽停이 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達은 山을 말하고 惚은 마을을 뜻 한다)의 주산이었으나,현재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므로 등정할 수 없으나
방문을 원하는 자는 승인을 받아야 한다.
아래 대동여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지명을 근거로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명과 비교 해 볼 것이다.
대동여지도
嶺路連水坡嶺西南八十里舊廢不行 成宗二十四年復開此路-생략-所坡嶺西南六十里珍富嶺西四十里仙遊嶺西四十五里屹里嶺四南五十里右五嶺竝麟蹄界(미시파령(彌時坡嶺) 고을 서남쪽 80리 쯤에 있다. 길이 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成宗)24년 이 길을 다시 열었다.-생략-소파령(所坡嶺)은 고을 서쪽 59리에 있다. 진부령은 서쪽 40리에 있으며 선유령은 서쪽45리에 있고 흘리령은 서남쪽 50리에 있으며 오령과 함께 인제계이다)
1.진부령(陳富嶺)= 진부리에서 온 지명으로 높이 559m이며 46번 국도가 지난다.
진부는 신라 경순왕 김부가 넘었던 곳이라 하여 "김부"가 "진부"가 되었다고 口傳되어 왔다
陳富嶺은 인제군 북면 용대리와 간성읍 진부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진부리에서 온 지명이며 소양강의 상류인 북천과 소하천의 분수령이 된다.
이 길은 경사도가 완만하여 구곡양장(九曲羊腸)의 16km에 달하는 길목마다 영하취락(嶺下聚落)을 이루고 있다.
1632년 간성 현감이었던 택당 이식이 인근의 승려들을 동원 해 좁은 길을 넓혔다는 기록과 1930년 일제시대에 신작로를 내면서 차가 다니기 시작하고1987년 2차선 도로로 포장되어 국도로 승격되면서 인제와 간성을 이어주는 도로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진부령은 또 다른 이름으로 "조쟁이"라 부른다.
영서의 곡식과 영동의 해산물이 고개(진부령)에서 만나 자연스럽게 새벽장(朝場)이 서게 되고....
새벽場이 서던 곳이라 하여"조쟁이'라 하였고 이를 이두문화 하여 "조장(朝場)이가 되었다.
2.흘리령(屹里嶺)=우뚝 솟아있는 산 아래 있다는 마을에서 온 지명(洞=里)
용대리와 진부리를 이어주던 中路(조선시대에는 대.중.소로 도로를 구분하여 우마차가 통행이 가능한 도로를 大路,말을 타고 갈 수 있는 도로를 中路,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협소한 도로를 小路로 구분하였다)로 진부령이 개통되기 전 까지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 길은 용대리 물굽이계곡(732봉)과 흘리계곡을 연계하여 대간꾼들이 부르는 외딴집 근처에 있는 고성산(641.8m)을 넘어 소똥령으로 이어진다.(용대리는 흘리령을 넘어 간성으로 가는 길과 대간령을 넘어 속초로 가는 길목이 나누어지는 곳이다)
3.대간령(大間嶺)=새이령=샛령
인제군 북면 용대리와 간성읍 토성면 도원리를 이어주던 길로 1970년대까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대간령보다는 샛령으로 부르는 원주민들에 의하면 고갯마루(샛령)에는 산신각과 원터(주막)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아직도 고갯마루에서는 돌담과 집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에는 “석파령(石波嶺)”또는 “소파령(所坡嶺)”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현대지도는 대간령(大間嶺) 또는 “새이령”으로 적고 있다.(석파령은 신선봉의 너널지대에 온 이름으로 보인다)
여러지명으로 불리는 이 고개는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에 있는 고개란 뜻에서 "사이령"이 되었고 사이령이 변음되어 새이령-샛령으로 불렸으나, 이두문화 하면서 사이(間)자를 사용하여 "間嶺"이 되고 창암의 간령과 구분하기 위하여 大.小자를 붙여 "大間嶺"이 되었다.
참고로 1970년대 진부령과 미시령 길이 포장되기 전 까지는 사람의 왕래가 가장 많았으며 당시만 하여도 인제군수와 간성군수가
대간령에서 산신제를 지내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4.화암재
마장터에서 화암사로 넘어가는 재를 이름으로 화암사에서 온 지명이다.
5. 미시파령(彌時坡嶺)=여수파령(麗水坡嶺)=연수파령(連水坡嶺)=미시령
해발808m로 속초와 인제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권45 간성(杆城) 산천조》
“彌時坡嶺 在郡西南八十里許有路舊廢不行 成宗二十四年以襄陽府所冬羅嶺險?復開此路” (미시파령 간성서쪽팔십리에 있으며,길이 있었으나, 다니지(험로)않아 폐쇄하였다, 성종24년에 양양부 "소동라령이 험하고 좁다하여 다시 이 길을 복개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23 여지고 2》.
“ 成宗朝以襄陽府所冬羅嶺險?復開此路俗稱麗水坡嶺"
성종 때 양양부 소동라령이 험하여 이 길을 복개(개통)하고 "여수파령"이라 "稱" 하였다
그 밖의 문헌을 살펴보면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에 연수파령(連水坡嶺)으로 ,택리지는 연수령(延壽嶺).관동읍지(關東邑誌)》에서는 미시령(彌矢嶺)으로적고 있다
정리해 보면 처음에는 미시파령(彌時坡嶺)으로 불려졌으나 점차 이 길의 통행량이 많아지면서 관(官)에서는 미시파령(彌時坡嶺)을 미시령(彌矢嶺)으로 바꾸어 불렀고, 그 당시 세간에서는 미시령(彌矢嶺)보다는 연수파령(連水坡嶺), 연수령(延壽嶺), 여수파령(麗水坡嶺)으로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 속초(束草)는 큰 고을이 아니었고 간성군(杆城郡)의 관로를 진부령(陳富嶺)이나 소파령으로 본 다면 이 길은 많이 사용되지 않아(예전에 왕래하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여 다니지 않는다)라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는 미시령(彌矢嶺)이 험한 까닭이며 그 이후 민간에서 불려지던 이름도 사라졌다.
다만 관청 기록인 미시령(彌矢嶺)이 오늘날까지 알려지게 되었을 뿐 이다.
6.저항령(低項嶺)=노루목이
북주 능선(北主綾線)에 있는 고개 중의 하나. 동쪽으로는 정고평(丁庫坪)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길골(路洞)을 거쳐 백담사(百潭寺)에 이른다. 다른 말로 늘목령이라고도 하는데, 저항령(低項嶺), 늘목령은 모두 노루목 고개, 목우(牧牛)재와 마찬가지로 길게 늘어진 고개라는 의미의 "늘으목, 늘목"에서 유래하였다.
즉 늘목령은 늘목에 다시 고개 령(嶺)자가 합쳐져서 늘목령이 된 것이고, 저항령(低項嶺)은 늘목이 노루목 등으로 변하고, 이것을 한자로 장항(獐項)이라고 표기하여, 거기에 다시 고개 령(嶺)자가 합쳐져서 장항령(獐項嶺)이라고 하던 것이, 발음 상 저항령(低項嶺)으로 변하고, 이것이 의미와는 관계없이 한자로 저항령(低項嶺)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속초문화원)
7.마등령(馬登嶺)
마등령(馬登嶺)은 높이가 1,327m의 준봉으로 마치 말의 등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옛 기록에는 마등령(馬等嶺)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등산객들만이 넘어 다니나 예전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에는 속초(束草) 지역 행상인, 민간인들이 동서를 넘나들 때 이용한 옛길 중의 하나이다.
마등령은 설악산(雪嶽山) 대청봉(大靑峯)까지 공룡 능선(恐龍稜線)이라 부르는 암릉의 기점이다. 북쪽의 미시령(彌矢嶺, 826m), 남쪽의 한계령(寒溪嶺, 1,004m)과 함께 태백산맥을 가로지르는 주요 통로였다. 지금은 북한강의 지류인 북천 백담 계곡(百潭溪谷)과 동해로 흐르는 천불동 계곡(千佛洞溪谷)의 비선대(飛仙臺)를 잇는 대표적 등산로이다.
설악산국립공원의 중심부이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대청봉(大靑峰)의 조망이 일품이다.
(참고: 진대봉 마등령(馬登嶺) 바로 북쪽에 해발 1,327 m(헬리포터)의 봉우리는 주민들에 의해 "진대봉"으로 불려 져 왔다.
8.무너미 고개
천불동 계곡(千佛洞溪谷)과 가야동 계곡(伽倻洞溪谷)의 경계에 위치하여 내-외설악(內?外雪嶽)을 구분 지으며, 고개 바로 북쪽에 희운각 대피소(喜雲閣待避所)가 있다. 무너미의 무는 물에서, 너미는 넘는다(건넌다)에서 왔다. 물을 넘는다(건넌다)란 뜻의 무너미를 한자로 수유(水蹂), 수월(水越)이라고도 표기하는데, 이 땅이름도 전국에 많이 분포한다.
9.대청봉(大靑峰)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
“멀리서 보면 아득하게 푸른 옥색으로 보인다. 그런 까닭으로 그 봉우리를 가리켜서 이름을 청봉(靑峰)이라고 하였다.(遠見只??而靑故指其絶頂而名日靑峰).”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말로 상청봉(上靑峰), 또는 청봉(靑峰)이라고도 하는 설악산(雪嶽山)의 주봉으로 해발 1,708m이다. 바로 밑(북서쪽)에 중청봉(中靑峰)이 있고, 그 밑(북쪽)에 소청봉(小靑峰)이 있다.
광여도
읍지류 양양에서
嶺路連水坡嶺西北七十五里五色嶺 弼奴嶺 朴達嶺俱西五十里麟蹄界所冬羅嶺(曺枕嶺兄弟峴)西六十里絶險舊有通京大路麟蹄界九龍嶺西南六十五里江陵界(영로 연수파령은 서북쪽 75리에 있으며 오색령.필노령.박달령은 모두 서쪽 오십리에 있는 인제계이다. 소동라령(조침령과 형제현)은 서쪽 60리에 있는 인제界로 험한 절벽지이다. 경성으로 통하던 대로였으나 폐쇄되었다, 구룡령은 서.남쪽 60리에 있으며 강릉계이다)
※ 조침령은 所冬羅嶺(曺枕嶺兄弟峴)소동라령과 함께 성종24년 미시령길이 열리기 전 서울로 가던 중요역할을 하였으나 미시령이 개통되면서 오색령(所冬羅嶺寒溪嶺)과 함께 폐쇄되었다.
10.소동라령=오색령=한계령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편에 이르기를
소동라령은 서쪽20리에 있으나 산줄기가 겹치고 포개져 산세가 험하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었으나 미시령길이 열리면서 폐쇄되었다. 하였고 그 밖에 문헌(증보문헌비고.여기고등)에는 " 오색령"으로 적어 양양에서 서울로 향하던 중로였음을 확인 해 주고 있다.
중종25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침령阻沈嶺, 구룡령九龍嶺은 모두 강릉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적혀있는에 이는 소동라령 또는 오색령으로 불리던 이 길이 너무 험로하여 페쇄하고 미시령길을 열었다는 기록이 나타 난다.
따라서 중종 이전에는 소등라령(等羅嶺)으로 불리다 중종이후에 오색령(五色嶺)으로 불렸고 김재규에 의해 현재의 도로로 개설된 1970년 때부터 한계령(寒溪嶺)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인제군과 양양군의 氣싸움이 치열하여 한계령은 접어두고 인제군에서는 "소동라령'에 무게를 두고 있고 양양군에서는 "오색령"이라 하여 한계령정상부 양양방향에"오색령"의 유래에 대한 안내문과 더불어 입석을 세워놓고 있다.
참고: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증언문헌비고.고지도.읍지류.속초문화원 등.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권45 간성(杆城) 산천조》
“彌時坡嶺 在郡西南八十里許有路舊廢不行 成宗二十四年以襄陽府所冬羅嶺險?復開此路”
성종(成宗) 이전에 이미 길이 있었지만 험하여 다니지 않았다는 것과, 성종(成宗) 24년에 양양부(襄陽府) 소동라령(所冬羅嶺)이 험하고 좁다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23 여지고 2》.
“在西南八十里見麟蹄右蔚山見總說 本朝 成宗朝以襄陽府所冬羅嶺險?復開此路俗稱麗水坡嶺"
“본 조 성종 때 양양부(襄陽府) 소동라령(所冬羅嶺)이 험하고 좁은 까닭에 다시 이 길을 열고 여수파령(麗水坡嶺)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한계령(한계령휴게소)에는 “오색령”이라 쓴 이정석이 세워져 있다
駐:한계령의 원 지명은"바드라재"였다.
바드라재를 이두문으로 所等羅嶺(세종실록지리지 국역본에 소등라령으로 표기)으로 표기하였으나 변음되어 所冬羅嶺(중중 때 편찬된 신승동국여지승람 이후 부터는 일관되게 "五色嶺"으로 표기하고 있다)으로 불리다가 "오색령"이 되었다.
참고: 이중환의 택리지 등.
다른 한편으론 所東羅嶺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 것은 문학적인 풀이로 해석된다.
(이문구의 소설 "매월당 김시습"에 등장하는 양양고을 관기의 성명이 "所東羅"였다.
한계령의 현재 지명은 3공수여단장이었던 김재규와 사병들에 의해 도로가 개설되면서(한계리에서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불려지기 시작한 이름으로 일제시대부터 한계령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재고하여야 할 또 다른 사대주의 발상이다.
한계령에서 대청봉으로 오르기 전에 있는 설악루에는 김재규가 쓴 (雪岳樓의 편판은 박정희의 친필) 표지석이 현재에도 남아 있다.
雪岳樓에 새겨진 김재규의 詩 여기에 옮기노라.....
바라보면 서기(瑞氣)어린 영봉(靈峯)과 영봉(靈峯)
국토(國土)는 이렇게도 장엄(壯儼)하고나
오늘은 산(山)을 뚫어 동서(東西)를 열고
내일은 그 뜻으로 남북(南北)을 열리
여기 그 뜻 기리어 樓(루)를 세우고
위대( 偉大)한 영도자(領導者)의 휘호(徽號)를 받다.
1971.12.27 (김재규는 이렇게 박정희에게 충성하였다)
여지도
읍지류 인제편에서
連水坡嶺東七十五里杆城界迂回絶險五色嶺弼奴嶺朴達嶺俱東七十里襄陽界(所冬羅嶺寒溪嶺)珍富嶺東北九十里仙遊嶺 屹伊嶺 所波嶺俱東北七十里杆城界 (연수파령은 동쪽 70리에 있으며 간성界로 迂回絶險( 겹쳐지고 포개진 산맥의 지세가 험한 절벽)이다. 오색령.필노령. 박달령은 모두 동쪽 70리에 있으며 양양界이다(소동라령= 한계령) 진부령은 동북90리에 있고 선유령,흘리령.소파령은 모두 동북70리에있고 간성계이다)
11.필여령(弼如嶺)=필노령(弼奴嶺)=필례령
필례약수에서 온 지명(필례를 이두문화 하면서 "노"나 여"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으로 오색에서 필례약수터 방향으로 나 있는 현재의 필례령을 말한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은 한계령휴게소에서 오색방향으로 도로를 따라오다 삼거리에서 필례약수터가는 방향이며 설악산국립공원초소가 있었으나 현재는 폐쇄되어 있다.(이 길은 험로였으나, 양양에서 인제로 넘어가는 지름길이었기에 많이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駐: 소설가 이순원은 필례령을 은비령(隱秘嶺)으로 표현하였다. 이 것은 작가의 문학적인 표현이며 문헌상 나타나고 있는 지명은
필례령(弼奴嶺)이다(이두문은 "례"를 "노(奴)나 여(如) "로 나타나는데 "여"는 "노"의 오기로 보인다)
※ 필례령은 필레약수와 함께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들기 전 머물던 곳으로 유명하다.
12.점봉산(點峰山)
이 산은 조선시대에 산골짜기에서 어떤 사람이 몰래 엽전을 만들다가 들켰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근처에서는 꽹과리 소리를 가리켜 ‘덤붕산 돈 닷 돈, 덤붕산 돈 닷 돈’ 한다고 한다.
이 산을 한자로는 점봉산(點峰山)이라고 하지만, 원래 둠 계통의 산이름인 덤붕이다. 아마도 다른 산에 비해 그리 험하지 않고 산머리가 둥글게 보여 이런 이름이 나왔으리라고 본다. 즉, 점봉산은 둥금(圓)의 뜻인 둠을 취했음을 그 산세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선인지 덤붕산이나 둠붕산이란 이름이 그 산모습에 아주 잘 어울린다.
누군가는 말했다. “설악이 화려한 재주와 마력을 두루 갖춘 대부쯤 된다고 보면 점봉은 속 깊고 온화한 여인의 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굳이 국어 학자가 아니라도 덤붕산이 한자로 점봉산으로 소리옮김되었을 것이라는 데는 그리 어려움이 따르지 않는다.
덤+붕(蜂) = 덤붕 > 점붕(+산) → 점봉산
점봉산의 유래는 (한국 땅 이름학회 배우리님의 글을 옮겨적음)
13.홍포수막터.
홍씨 성을 가진 사냥꾼이 살았다고 하여 홍포막수처로 불리고 있으나 실제로는 포수의 수발을 들던 수하가 홍포수 행세를 하며 마을에 들락거리자 사람들이 그를 포수로 착각하여 "홍포수"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전해 져 온다.
14.오색의유래
훙포수막터 아래에 있는 오색은 "오색화의 전설에서 기원한다.
부처의 가르침을 뜻하는 청색·황색·적색·백색·주황색이 "오색"이라는 지명을 얻은 유래가 되었다고 전해지며 "오색석사"역시 같은 뜻을 가지고 세웠다고 전해지며 "오색석사"에 들리면 "오색화"을 볼 수 있다.
15.박달령(朴達嶺)=단목령(檀木嶺)
점봉산과 북악령 사이의 안부로 인제군 진동리와 양양군 오색을 넘나들던 고개로 1217년(고려고종4년) 김취려 장군이 거란군을 제천과 원주에서 추격하여 이 곳에서 격퇴한 곳으로 전해 져 오지만 김취려장군이 거란군을 격퇴한 장소는 제천의 박달령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박달나무가 많아 "박달령"이라 하는 것 같으며 박달나무 단(檀)과 나무 목(木)을 써 단목령이라 지명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백두대간 상 남한구간에는 선달산과 옥돌봉 사이에 있는 박달령과 두타산과 청옥산 사이에 있는 박달령이 유명하며 밝고 큰 고개라 하여 "박달령"이란 지명을 가지고 있다.
해동지도
16.북암령=북암령
양양군 북암리와 인제군 진동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북암리와 미천골의 선림원지 북쪽에 있는 암자의 이름에서 유래 했으며 다른 이름으로 "북애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1-3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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