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지명의 유래와 변천사(대관령~피재구간)1-4
남한의 백두대간 중 가장 난해하고 지명이 불투명한 곳이다.
소우음산과 ㅡ능경봉. 고루포기산-소은백이산, 삽현-삽당령의 관계에 대해 풀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소우음산은 발왕산이요, 소은백이산은 옥녀봉이며 삽현은 닭목이재이고 삽당령은 삽당령일 뿐이다.
대동여지도 (출처:규장각)
揷雲嶺으로 표시된 위치가 揷當(堂)嶺임.
조선팔도지도와 조선지도 강릉대도호부편(출처: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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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관령(大關嶺) 해발 865m
강릉과 평창을 이어주는 고개로 영동과 영서의 관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大關嶺西四十五里 卽州之 鎭山自女..(대관령은 서쪽 45리에 있으며 이주(강릉부)의 진산이다) 하였다.
강원도 평창군 횡계리와 강릉시 어흘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99曲을 이루는 험지이나 대관령 정상부 서쪽은 평탄한 고을을 이루며 서울로 가는 큰 길이 있다고 문헌에 적고 있다.
대관령은 예로부터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통요충지로 중요시 하여 삼국사기는 대령책(大嶺柵), 고려사 등은 대현(大峴)으로 적고 있으며 서유록(西遊錄).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는 대령(大嶺)으로, 중보문헌비고와 임영지 등에서는 대관령이라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 고형산이 1511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다음 해에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사비를 들여 오솔길이었던 대관령길을 넓혔으나.사후 125년이 지난 후 부관참시를 당했다. 사유는 병자호란 때 주문진으로 상륙한 오랑캐군이 대관령길을 이용 해 한양이 함략 당하자 분노한 인조에 의해 참시를 당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대관령길 통행이 많아지고 다방면 활용이 많아지자 재평가되기 시작하여 고형산은 복권되어 위열(威列)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곳의 설화도 많이 전해 져 오는데 대표적인 것은 구산. 굴면이. 원울이재. 제멩이. 반쟁이. 웃반젱이를 거쳐 대관령을 오르내릴 때 강릉에서 대관령방향은 험하여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뜻에서 “대굴령”이라 하였고 이것이 변음되어 대관령으로 되었으며 또한 영서지방에서 영동지방 으로 오는 “ 큰 관문이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대관령이라 한다고 구전되어 온다.
2.제왕산과 능경봉
1.제왕산은 고려우왕이 이성계에 의해 유배되던 중 능경봉의 가지줄기인 제왕산에 성을 쌓고 두 달 동안 머물던 곳이다.
근처에 왕산리마을과 왕산이 있고 백두대간 마루금에는 왕산 쉼터가 두 곳에 마련되어 있어 이곳에서 쉬어가는 대간꾼들에게는 슬픈 역사를 돌이켜 보게 한다.(우왕은 원주.고성.강릉등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정착하게 되나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살해된 장소를 "살피재"라 한다.
2.능경봉(陵鏡峰)은 능정산(凌頂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자음에서 알 수 있듯이 능(陵)처럼 둥글다는 뜻에서 온 것으로 같은 맥락에서 지명을 얻은 산으로는 영남알프스산군에 있는 능동산(凌東山)등이 있다.
능경봉은 능정출일(能政出日)이라 하여 頂上에서 바라보는 동해의日出은 그 아름다움이 제일이라 횡계팔경(橫溪八景)중 하나이다.
3. 고루포기산 참고사진
일본어 같지만 순수 우리말이다.
산 아래 고루포기마을에서 온 지명으로 “골패기”에서 온 말이다. 골패기는 “골짜기 또는 골짝”의 강원도 사투리로 고루포기는 "골패기"온 연음현상이다.
고루포기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여 어떤 이는 소은백이산(所隱柏伊山)이라 하고 어떤 이는 일본에 의해 왜곡된 ‘고루포기“산이라 하지만, 소은백이산은 각 종 문헌에 강릉부 서쪽 65리에 (所隱柏伊山西六十五里)에 있다고 되어 있고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5만분의1 지형도에는“カルミ峯”으로 표기 하였다.(고루포기에 대한 마땅한 이두문자가 없었던 모양이다)
따라서 고루포기산은 고루포기 마을에서 온 지명이며 소은백이산으로 보고 있는 고루포기산은 고루포기산 가지줄기인 옥녀봉(닭목이 북쪽에 있는 1146.2봉)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애들은 고루포기가 이두문으로 표기가 되지 않자 “가타카나” 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굳이 이두문자로 표기한다면 골짜기마을이니 谷實山 정도 되지 않을까?
?풀어야할 과제
소우음산(所亏音山)과 소은백이산(所隱柏伊山)의 위치에 관한 문제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소우음산을 “능경봉(실제로 능경봉 정상 안내판에도 그렇게 써 놓았다)”이라 하고 소은백이산은 “고루포기산”이라 한다.
나 역시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소견임을 전제로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자 한다.
1.소우음산은 읍지류 고산자편에 所亏音山俗呼■音峯西八十里로 되어 있다.
풀이해 보면 소우음산은 속칭 “0音峯” 서쪽 80리에 있다는 것이데. 여기에서 “■音峯”의 ■가 지워진 것이 안탑깝지만 ■音峯의 ■子는 바리때발(鉢)子로 생각되어진다.(한자사전:鉢 ㉠바리때(승려의 밥그릇) ㉡사발(沙鉢: 사기로 만든 국그릇이나 밥그릇) ㉢승려가 되는 일 ㉣대대로 전하는 것)
따라서 所亏音山은 鉢音峰(발왕산)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所亏音山의 “亏”는 어조사로 생략되여 소음산(所音山)으로 쓰기도 한다.(所는 장소를 가리키고 音은 소리음이니 소리가 나는 산이란 뜻으로 보임)
2.소은백이산은 읍지류 고산자(다른 문헌에도 이 기록은 한결같다)편에 所隱柏伊山西六十五里(소은백이산은 서쪽 65리에 있으며 신선이 살고 있는 곳이다) 하였다.
고루포기산을 소은백이산으로 보는 사람들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세밀히 살펴보면(오늘날 기준에서 본다면)고루포기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루포기산은 백두대간 마루금 선상에 있는 산이 맞으나.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소은백이산은 고루포기산에서 분기하는 산줄기 끝에 우뚝 솟아 있으므로 “옥녀봉”이어야 한다.(지도제작 당시에는 고루포기산이란 지명이 없었으므로 현재의 고루포기산과 옥녀봉을 포함하여 소은백이산으로 통칭한 것으로 판단됨)
그러나 조선중기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바탕으로 하는 조선지도와 팔도지도 등에 나타나는 소은백이산은 오대산 줄기 발음산(발왕산) 윗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이 부분 더욱 세밀하게 연구 되여야 할 것이다.(대동여지도와 팔도지도를 비교하여 분석하기 바람)
※所隱柏伊의 뜻을 괴상하게 해석하여 혼동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각 종 문헌에 쓰여 있는 것과 같이 “신선이 살고 있는 곳“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4. 삽현(鈒峴)=닭목이재
닭벼슬을 닮은 옥녀봉아래 닭목이가 있다(金鷄抱卵形)
삽현은 읍지류 고산자편에 鈒峴西南六十里旌善路(서남쪽 60리에 있으며 정선가는 길)이다 하였다.
창삽(鈒)자를 쓰는 뜻은 알 수 없으나, 전옥산(典玉山)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삽현은 현재 “닭목령(鷄項嶺)”으로 불린다. 닭목이는 옥녀봉 남사면 대기리 안부에 화전민이 일군 마을이고 닭목골은 닭목재에서 강릉쪽에 있다.
따라서 중간지점에 있는 백두대간 마루금선상의 고개를 “닭목재”라 한다.
닭목이는 옥녀봉정산 남사면 아래에 위치한 곳으로 풍수지리에 의해 닭의 목에 해당하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세로 보아 “닭목이”로 지명하였다.
여기에서 연관되어 고개를 닭목이재 또는 닭목치라 한다.
★ 화란봉(花蘭峰)은 난초처럼 예쁘다 하여 지명되었다.
5. 삽당령(揷唐嶺)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송현리와 강릉시 구정명 목계리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역사의 흐름만큼이나 많은 지명이 바뀌었고 현세의 사람들에 의해 삽현과 같은 곳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木溪嶺一云插雲嶺南五十里(목계령과 일운하는 삽운령은 남쪽 50십리에 있다 하였고 대동여지도에는 삽운영(揷雲嶺), 증언문헌비고에는 삽당령(揷當嶺),으로 적고 있는데 현재 쓰고 있는 揷唐嶺의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이 고개는 목계리에서 온 지명으로 木溪嶺이라 부르다 插雲嶺으로 바뀌었으나, 후에 (揷堂嶺=揷黨領)~揷唐嶺으로 변천되어 온 것이다.(고개마루에는 산신각(山神閣)이 있다)
삽당령 산신각과 고개마루
※ 삽당령을 꽂을삽(揷)으로 표기한다고 하여 생김새가 삼지창처럼 세 가닥으로 생겨서 온 지명이라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한자사전에서 揷은 ㉠꽂다 ㉡끼우다 ㉢삽입하다 ㉣찌르다 ㉤개입하다(介入--) ㉥끼어들다 ㉦가래(농구(農具)의 한 가지)등으로 쓰이고
唐은㉠당나라, 나라 이름 ㉡길, 도로(道路), 통로(通路) ㉢둑, 제방(堤防) ㉣새삼(메꽃과의 한해살이 기생 식물) ㉥뜰 안의 길 ㉦허풍, 큰소리 ㉧정자 ㉨갑자기, 느닷없이 ㉩황당하다 ㉪공허하다(空虛--), 텅 비다 등으로 쓰이며 ,堂은 ㉠집, 사랑채 ㉡마루, 대청(大廳) ㉢근친(近親), 친족(親族) ㉣남의 어머니 ㉤관아(官衙)등으로 쓰이며,
嶺은 ㉠고개, 재 ㉡산맥 이름 ㉢산봉우리 ㉣연속한 산 ㉤산마루의 고개 ㉥잇닿아 뻗어 있는 산줄기 ㉦오령의 약칭 ㉧산이 깊다 ㉨산이 깊숙하다 ㉩산이 으슥하다 등으로 쓰인다. (출처:다음한자사전)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각자가 조합 해 보시길......
삽현과 삽당령이 같다고 하는 것은 어디에 근거하여 그렇다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으나, 각 종 문헌과 고지도 등에 표시된 삽현은 강릉부서쪽60리(鈒峴西南六十里旌善路)로, 삽당령은 남쪽 50리방향(木溪嶺一云插雲嶺南五十里)에 있다고 기록되어 그 위치가 분명 다름을 알 수 있다.
바로 잡아야할 것이다.
쉬어갑시다
☞ 산신각과 국사당 그리고 서냥당 서냥당
고갯마루에 있는 국수당은 서냥신앙을 모태로 하는 서냥당과 산신당으로 정착되었고 영마루(고개)에 있는 서냥당(산신당)을 지나는 사람들은 침을 뱉아 주거나 돌을 줘 탑을 쌓으며 자신의 안녕을 빌었다.
이러한 풍습은 전국 어디에서나 전해 져 온 우리 고유의 미습이었며 산신당과 서냥당의 형태는 돌을 쌓아 제단을 만든 것이 대부분이나 영마루의 산신당은 쇠로 만든 당집을 지었다 (산신각에 모시는 산신과는 다르다)
강원도지방에는 산세가 험하였던 관계로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堂)과 마씨부인(唐)을 보시는 산신당및 서냥당이 곳곳에 산재 해 있으며 대표적인 곳을 살펴보면 샛령(대간령) 한계령.삽당령.느릎령. 진고개.등이 있다.
서냥당은 고객마루에 위치하여 산신각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출처:http://blog.daum.net/mokryeon/7775348
6. 두리봉 석병산일월문
1.두리뭉실 해 두리봉 또는 두위봉(斗圍峯)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산줄기의 분기하는 가지줄기는 만덕봉에서 두 줄기로 나누어 진다.
한줄기는 옥계로 보내고 다른 한 줄기는 칠성산으로 불리는 담정산을 지나 강릉으로 이어지는데 산자락 끝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사굴산문인 굴산사가 있다.
담정산 골짜기(두리봉과 석병산사이)를 “담정골” 또는“담정계곡”으로 하는데 담정골에는 고려에 대한 전설이 아래와 같이 전해 져 온다.
고려"우왕"이 제왕산에 제왕산성을 쌓고 유배시절을 보내다 피살당하고 고려가 멸망하자 우왕을 모시던 유신들은 우왕의 위패를 보시고 담정골로 피신하여 석병산에 위패를 안치한 후 임금이 계신 곳이라는 의미로 담정골의 이름을 “단경동(壇京洞)”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해 져 온다.
참고로 담정산 아래 흥원사가 있었다고 문헌은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 흥원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페허가 된 것으로 보인다.
7. 생계령(산계령)
산계리에서 유래 하였다
강릉 옥계면 산계리에서 정선 임계면 직원리를 넘나들던 고개로 원 지명은 “산계령”이었다.
생계령은 산계령의 전음으로 일부 지도상에 “雙溪嶺”으로 표기된 것은 산계령의 경음화현상으로 현상이다.
예전에 생계령 정상에는 주막집이 있어 길손들의 사랑방 역학을 했다지만 지금은 주막터만 남아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8. 자병산
자병산
자병유화로 불리기도 하는 자병산(자주빛 병풍을 펼쳐놓은 듯 아름다운 산이란 뜻)은 기우제를 지내면서 생겨 난 말이며 가뭄 때 자병산 산자락에 있는 닭목병대(닭목대)에서 닭의 목을 잘라 피를 뿌리며 기우제를 지내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는 일화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기우제는 80년대 초까지 이어 지다가 시멘트채취로 자병산이 헐리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전해 져 오던 풍습이 사라졌다고 한다.
“紫屛油花 또는 紫屛血花“란 기우제를 지낼 때 혈화(닭의 피꽃)가 피면 비가 내린 다는 설에서 나온 말이다.
수려하던 자병산의 모습은 이제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9. 백복령
정선군 임계와 동해시 옥계를 이어주는 고개
백복령은 읍지류 삼척부에 기록하기를 白福嶺俗呼希福嶺西五十里通旌善最高險(백복령은 속칭희복령이며 서쪽 50리에 있으며 정선으로 가는 길이며 최고로 험한 길이다)이라 하였다.
지금의 2차선 포장도로가 뚫리기전 산간오지의 대표적인 험한 길이었던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기에도 수 많은 이름표를 달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百復嶺 , 百腹嶺,白鳳嶺,百伏嶺 등이 있으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업드릴 복(伏)자를 쓰는 “百伏嶺”이 될 것이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근세한국50.000분의1지도와 그것을 모태로 하여 1963년 국립건설연구소에서 편집하여 초판한 50.000/1지형도 그리고 각 종 사전이나 한국지명총람등에도 그대로 답습하여 百伏嶺으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제작과정의 실수로 보이므로 옛 문헌의 내용에 근거하여 白福嶺으로 訂正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白福嶺은 希福嶺에서 온 것이므로 한약재로 쓰이는 백복령(白茯笭)에서 白茯을 가져다 白茯嶺으로 둔갑시켜 버린 것은 커다란 오류이다. 문헌이나 고지도에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白福嶺으로 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8.댓재(竹峙·810m)
삼척시와 태백시를 이어주는 고개
큰 산줄기를 넘어가는 고개의 의미인 “대고개”가 변음 되었다.
10. 원방재
동해시 관촌마을과 정선군 가목리를 넘나들던 고개
원방은 "먼 곳"을 뜻 하는 것으로 먼 거리 고개를 힘들게 넘나들던 사람들의 애환이 깃든
고개란 의미로 보인다.
11. 이기령(耳基領)
동해시 삼화동과 임계면 도전리를 이어주는 고개
“동기(銅基)“의 순수 우리말로 구리터가 있던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구리터”의 중간 자음인 ㄹ이 탈락되어 “구이터”가 되고 “구이”가 “귀”로 축약되어 “귀이(耳)로 표기 되었다.
구리터의 “구리”는 “동”이니 자연스럽게 동(銅)이고 터는 기(基)이니 銅基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재”를 뜻하는 “嶺‘을 넘어 가니 이기령이 되었다.
이 고개는 삼천의 해산물과 정선의 특산물을 물물교환하기 위해 우마차가 넘나들던 고개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12. 해동삼봉
고적대(高積臺).청옥산(靑玉山).두타산(頭陁山)을 일컫는다.
고적대는 높은 기암절벽이 대(臺)를 이루고 있다 하여 원효대사가 이름을 짓고 이곳에서수행을 하였다고 한다. 이 곳 고적대를 시작으로 해서 청옥산과 두타산의 연봉은 신선이 노닐었다는 무릉계곡을 안고 있어서 해동삼봉이라고 한다. (청옥산과 두타산은 생략함)
13. 연칠성령(連七星嶺)
하장면(삼척)과 삼화동(동해)을 이어주던 고개
험준한 산세여서 난출령(難出領)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정상부를 “망경대“라 하고 인조원년 명재상 택당 ”이식”이 중봉산 단교암으로 은퇴하였을 때 이곳에 올라 서울을 바라보며 망경 한 곳이라 한다.
다른 일설은 하늘에 계신 칠성님께 이어지는 고개로 보기도 하고, 사원터에서 하장면 방향으로 늘어선 일곱 개의 봉우리에서 온 말로 보기도 한다.
14.박달령(朴達嶺)
삼척시 삼화동과 하장면 번천리를 이어주던 고개
박달산의 박달은 “밝달“에서 온 말로 ”밝”은 광명을 비추는 높고 큰 산을 의미하고 “달”은 산과 들을 뜻하는 말로 청옥산과 두타산을 합하여 광명을 주는 맑고 큰 산이라 하여 두 산을 연결하는 안부를 박달령으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15.목통령(木通嶺)
번천으로 유입되는 통골재에서 구룡소로 넘어가는 고개로 통골재로 불리기도 한다
16. 명주목이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에 속하는 여러 마을 중 하나이다.
명주목이(고개)의 원래 이름은 "데바지령"이며, 그 뜻은 삼척지방을 넘나들던 고개로 협소한 계곡의 지류를 따라 오르기가 힘들었다는데서 유래하였다.
17. 햇댓등
산신각에 빗대어 나름대로 풀어 보는 내용은 이렇다.
산신각에서 산신제를 지낼 때 山神이 강신하기 가장 좋은 곳에 횟대를 세우고 山神을 맞이하는 의식을 치뤗는데 여기서 말하는 횟대란 대나무(生竹)를 말하며, 두 개의 대나무를 잘라서 통째로 세우고 꼭대기에 오색천을 걸었다.
횟대는 경상도와 이북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햇대"로 변음되는 사투리로 "햇댓"은 "댓재"와 합하여 "햇댓"이라 한 것으로 보이며. 등(登)은 산줄기에서 전망하기 좋게 뛰어 나온(岬이나 臺)부분을 말하는 것이므로 세 곳의 뜻을 합성하여 "햇댓등"이라 지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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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재의 산신각(쉰음산에 있던 것을 고갯마루로 옮겨 왔다)
고지도에는 “죽치(竹峙)“로 표기하였는데 이 것은 ”대“를 대나무를 뜻하는 ”竹“의 훈(訓)을 빌려 쓴 것으로 보인다.
대동여지도 등에 댓재의 서쪽에 죽현전, 죽령현이 표기되어 있고, 고구려 때는 죽현현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경덕왕 때 “죽령현”으로 개칭 되었다.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 까지는 죽현~죽령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는 “죽치”로 불렸고구전으로 전해 져 온 우리말은 "대고개→댓재"이다.
19. 큰재
삼척시 신기면 고무릉리와 태백시 하사미동을 이어주는 고개로 물물교환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20.지각산과 지극산
지각산과 지극산을 혼동하지만,지각산은 일명(찌걱산)이라고 하는 Y자형태의 산으로 Y내경를 향해 돌진하는 산줄기 하나가 저돌적인데 이곳을 지나던 남녀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그냥가지 못하고 꼭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한다.
하였든 보기만 해도 얼굴빨개지게 하는 기묘하게 생긴 지각산은 광동호 남쪽방향에 있고 지극산은 고랭지채소밭 개발로 대머리가 된 산으로 대간꾼들에게 알바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정상부에 있는 물탱크는 대간꾼들에게 길라잡이를 해 주는 고마운 놈이다.
지각산 지극산(고냉지 채소밭 정상에 물탱크가 있다)
21.귀내미골
현재 광동댐 이주민의 거주지를 이름이다.
정감록에 이르기를 귀내미골이 이상향(무릉도원)으로 가는 길목이라 했다.
귀내미골은 우귀(소귀)의 이두표기인 牛耳嶺(토정 이지함은 牛耳間으로 보았음)으로 되었다가 "귀넘이" →"귀내미"로 변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2.덕항산
예전에 삼척사람들이 화전밭을 일구기 위해 태백(하사미)으로 넘어 오던 산이라 하여 "덕메기산"으로 불렸으나 이두문자 표기로 덕항산(메기=목덜미(項)으로 바뀌었다.(참고로 환선굴이 있는 방향에서 덕항산이나 환선봉 오름길은 직벽에 가까우나 백두대간의 마루금에 올라서면 서쪽(광동댐방향)으로 화전을 개간할 신천지가 펼쳐진다)
23.자암재(장암재)
신기면 대이리와 하사미동 귀네미골을 이어주는 고개
자암재와 장암재 등 두 개의 지명을 가지고 있어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그러나 환선굴이 있는 대이리쪽에 "장암목이"라는 마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암재"의 표기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지도 삼척부
24.새목이
이두문으로 조항(鳥項)으로 풀어 쓴다.
(새목이는 넘나드는 고개가 아닌 능선의 V선을 이루는 곳으로 풍수지리에서 새의 목과 닮은 산세에서 유래하였다)
25.구부시령(九夫侍嶺)
태백시 하장리와 삼척시 대기리를 이어주는 고개
팔자가 기구한 어떤 여인이 아홉 남편을 모시고 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 된 구부시령이다.
함께 살다가 죽어 간 남정네들도 그렇지만 밤 사이 죽어 간 아홉송장을 파 묻어야 했던 여인네의 한은 무엇일까.
에궁~
26. 건의령(巾衣嶺) = 한의령(寒衣嶺) 건의령
태백시와 상사미동과 도계읍 고사리를 넘다드는 고개
건의령과 한의령은 같은 지명을 두 개의 지명으로 부르는 것으로 異名異地가 아니고 異名同地이다
巾衣嶺은 고려마지막 왕인 우왕이 이성계에 납치되어 원주.고성 강릉을 전전하다 최후의 유배지인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정착하나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재에서 피살되자 그를 모시던 신하들이 시신을 거두어 고돌치에 장례를 치루고 조선군의 칼날을 피해 도마재를 지나 건의령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들은 망국의 한을 통곡하며 관복과 관모를 벗어서 나무에 걸어두고 피재와 싸리재를 넘어 두문동에 숨어들어 杜門不出하니 개성 땅 만덕산 서쪽골짜기 두문동재에 이은 두 번째 두문동이 되니 나라잃은 서러움 오즉했을까?후세인들은 그 들이 살았던 마을을 杜門洞이라 하고 뒷 산의 고개를 두문동재라 부른다.
참고: 건의령 동쪽 50여미터 지점에 있던 “白人敎君子堂”이라고 하는 당집이 있었다
건의령을 넘다들던 사람들에 의해 산신제를 지내는 당집으로 지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백인교군자당은 고려인들의 설화까지 추적할 수는 없지만 오래전부터 세워 져 있었다는 확신만 가질 뿐이다.
27.노루메기
목루목~노루목이~노루메기로 변형되었다.
한자로는 노루장(獐) 목덜미항(項)으로 쓰며 풍수지리에서는 노루의 목 부분에 해당한다고 하여 노루메기(노루가 지나다니는 길목 또는 산이 막히는 막다른 곳)라 한다.
이러한 지명을 전국에 걸쳐 여러 곳이 있으나 대부분의 표기는 “노루목”이나 “노루목이” 또는 장항(獐項) 등으로표기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노루메기(이 지방 사투리로 보임)로 표기하고 있다.
28. 피재(삼수령)
태백시 적각리와 상사미동을 이어주는 고개로 해발920m 이다.
이 고개는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지 안하 역사속에 파묻혀 있던 곳이었으나, 한강의 발원지가 발견(검룡소)되면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현재 35번 국도가 2차선으로 포장되어 전선과 태백을 이어주는 교통중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금대봉아래에서 발원하는 한강물줄기는 오대천에서 흘러오는 물줄기와 합류하여 남한강을 이루고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함께 한강을 이루어 서해바다에 합수된다.
또한 적각리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는 오십천을 따라 삼척의 동해바다로 합수되며 함백산에서 발원하는 낙동강의 물줄기는
낙동정맥을 따라 몰운대의 남해바다에 합수되니 사람들은 피재를 삼수령(三水嶺)이라 이름지어 부른다.
피재의 어원은 삼척사람들이 난리(전쟁)를 피해 적각동은 넘어 황지지방으로 피난(避難)한 고개라 하여 피재라 한다.
피재라는 지명이 붙기전에는 사람의 왕래가 없는 고독한 산이란 뜻에서 고적령(孤跡嶺)이라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
백대사랑 11팀 따라서 우봉동천길 떠나면서 남긴다......
2009/09/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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